기독자교수협의회에서 지난 한 해의 주제를 어떤 '크리스챤 아이덴티티'로 정하여 계속 여러 신학자들의 발표가 있었다. 나도 한 시간동안 그 프로를 담당했는데 무슨 말을 했는지 잘 기억이 나지는 않는다. 그런데 어떤 작은 모임에서 그런 문제를 놓고 좌담을 할 기회가 있었다. 나는 극히 단순한 대답밖에 할 수 없었다.
'크리스챤 아이덴티티'를 묻는 것은 벌써 그 선 자리에서 동요하고 있는 증거이다. 내게는 그 질문이 아들이 부모를 보고 "어떤 뜻에서 나는 당신의 아들이요?" 하는 것과 비슷하게 들린다. 사랑하는 사람이 "나는 당신에게 무엇이요?"라고 묻는다면 벌써 그는 그 사랑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밖에서 있다. 사랑은 사랑하는 자만 아는 것이며, 사랑할 때만 아는 것이지 그것을 객관화해서 설명할 수는 없다. 그런데 "내가 무어냐?"고 묻는 순간 그는 이미 그 밖에 있기에 아무리 설명해도 그 설명은 그 사람을 이해시킬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자기가 그리스도인 됨을 묻는 것은 성실한 태도에서 오는 것임은 틀림없다. 어떤 직장인이 됐거나 또는 가정주부가했을 때 그의 하루의 생활은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들과 별로 다른 것 같지 않다. 꼭 같은 질서 속에서 꼭 같은 것을 위해서 하루 종일을 보낸다. 각 장소마다 서로 다르게 요청하는 것은 그 장소에 걸맞은 기능뿐이다. 타이피스트에게는 오자 없이 타자를 성실히 해 주는 것을 기대하며, 교사에게는 실력과 성실성으로 학생들을 가르쳐 주는 일이며, 주부에게는 세간 잘하고 아이들 잘 기르는 것을 요청한다. 이런 요청에 자기 임무에 충성하려다 보면 그리스도인은 생활인 이상 아무것도 아니며, 일주일 내내 비그리스도인과 다를 바 없다. 여기서 어딘지 공허감이 생긴다. 주일에 교회에서 한 시간 예배에 참여한 정도로써 내가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있는가? 또 비록 한 시간의 예배가 내 생활에 영향을 주어 생활에 어떤 전환을 가져온다면 몰라도 그것과 이것은 전혀 딴 세계로 느껴진다는 것을 반성해 보면 더욱 그렇게 된다. 만성화된 사람이면 주일에 골프 치러 가거나 낚시를 가는 것과 같이 교회로 나가면 된다. 그러나 거기서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은 자신의 삶에 성실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더러 왜 그리스도인이냐고 묻는다면 먼저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특수한 종교인이 된다는 것이 아니라 참 사람이 된다는 것과 다를 것이 아니라는 것을 먼저 알아야 한다고 한다.
그러면 꼭 그리스도인이 아니더라도 가능하지 않느냐는 질문을 받는다. 그러나 그것은 쓸 데 없는 가정이다. 나는 그런 질문이 저 아내가 반드시 내 아내여야 할 이유는 없지 않느냐라는 질문과 본질상 다르게 들리지 않는다. "당신은 이 사람을 아내로 맞이하겠오?" 하는 질문에 "예"라고 대답한 이상 그는 당신의 아내이며, 그와 함께 지나는 한 그 관계는 자명하다. 그러나 "저 여자가 왜 내 아내여야 하느냐?"는 질문은 공연한 시간의 낭비이다. 차라리 나는 저 여자가 싫다라고 분명히 해야 한다. 만일 그녀와 이혼까지 하게 된다면 그때에야 비로소 이미 꼭 그 여자가 유일한 아내가 아님이 현실로 입증된다.
그리스도인은 "당신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느냐?"라는 물음에 "예"라고 대답한 것으로 시작된다. 이것은 세례 받을 때 교회에서 묻는 질문이지만 성서도 "나자렛 예수가 우리의 그리스도이다" 하는 말씀이 그것을 마주하는 사람에게 동의를 청한다. 그때 "나는 동의할 수 없소"라고 했으면 그리스도인이 아니며 "예"했으면 그리스도인이다.
만일에 후에라도 이런 동의를 철회하면 그 때부터 그는 "그리스도인" 이 아니다. 그런데 그런 동의를 하고 나서 왜 하필 예수만이 그리스도냐고 묻는 것은 공연한 질문 같다. 까닭은 내게 그가 그리스도이면 그것으로 족하다. 그 외에도 그리스도가 있을 수 있지 않느냐는 것은 쓸데없는 가상(假想)이다. 까닭은 그는 아직 묻는 내게는 그리스도가 아니기 때문이며, 만일 예수가 그리스도로 믿어지면 이미 그리로 전향했을 것이 아니겠는가? 가령 "불교를 통해서는 구원이 없단 말이오?"라는 질문을 받는다. 그것은 기혼녀가 "저 남자와 결혼하면 행복하지 않다는 법이 있소?"라는 질문과 같다. 그것은 자기도 모르고 남은 물론 대답할 수 없다. 그러나 반면에 그리스도교 이외에도 구원이 없다는 말을 보편화하는 것도 어리석다. 그것은 나 자신에게는 해당되는 말이기는 하지만 남에게까지 적용시킬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꼭 "이 여인과 결혼한 나만이 행복해!" 하는 것과 같다. 나는 이 여자와 만나 행복할 수 있다는 말과 나만이 행복하다는 말은 구별된다.
물론 처음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습니다'고 결단했을 때의 그 내용은 언제나 같을 수는 없다. 또 그래서도 안 된다. '예수는 그리스도다'라는 교조적인 표현은 우리를 사로잡지 못한다. 예수가 그리스도란 어떤 의미에서? 이것은 계속 달라질 수 있다. 까닭은 사람은 추상적인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그것은 성서의 뜻을 추구하면서도 달리 이해될 수 있지만 내 선 자리와 질문에 따라서도 달라질 수 있다. 그것은 사랑하는 사람과의 관계도 처음 만나서 사랑을 고백했을 때의 사랑의 내용이 언제나 고정될 수 없는 것과 같다. 그 대상이 여자라면 때로 마돈나로도 보이고, 엄마로도 보이고, 누이처럼 될 수도 있다. 그것은 상대방이 가변적이어서만이 아니라 서로가 산 관계이기 때문에 그렇다. 우리는 그 상대방을 너와 나와의 단둘의 관계에서 평가할 수도 있고, 사회 속의 일원으로서의 의미를 물을 수도 있다. 어떻든지 간에 중요한 것은 '나'는 '그'라는 존재를 전제로 한 존재인 한 '그'와 깊은 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내가 그리스도인이냐?" 하는 질문은 금해서 안 되지만 그 확실한 대답은 기대하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사랑의 관계와 같다.
"내가 그를 사랑하오?"라고 남에게 물어 보아야 속 시원하게 원하는 대답은 못 구한다. 아무리 심리분석을 해 준다고 해도 그게 바로 내 것일 수는 없다. 반면에 참 사랑하는 사람은 그의 사랑의 강도를 모른다. 까닭은 그는 이미 그 안에 있기에 자기와 사랑을 분별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사랑하면 할수록 사랑하지 못하는 자기를 발견하는 것이 정상이다. 사랑한다고 자기 확인함은 오히려 그 사랑이 흔들린 흔적이며, 사랑하지 못하는 자기를 고민함은 오히려 참 사랑 안에 있는 증거일 수도 있다.
(1972.1. 『현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