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신학대학의 개강 강연의 의무를 띠고 최근의 신약학에서 가장 활발한 편집사적 연구의 일단을 시도해 볼 생각으로 자료를 정리하다가 아무래도 강연으로는 적합치 않아서 갑자기 제목을 바꾸어 대중성이 있는 최근의 신론들을 나름대로 소개하기로 정하고, 손에 있는 책들을 읽다가 그들의 그리스도론에 시선을 모았다. 저들은 본래의 신론에서 탈출하려고 여러 백방에서 시도했는데 하나 같이 낙착된 데는 바로 그리스도이다. 저들은 하늘에 정좌한 신을 땅으로 끌어내리려다 보니 결국 그리스도에게 관심할 수밖에 없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거의 일치한 것은 그 그리스도론이 케노시스적 해석에 기울어졌다는 사실이다. 즉 하느님이 자기를 비우는 행위가 그리스도 사건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소위 무신론적 그리스도론에까지 이르게 된 것은 자연스러운 귀결인지도 모른다. 자기를 철저히 없이하는 데서 신을 본다는 것은 중요한 일면을 본 셈이다. 신은 육(肉)으로서의 그리스도로 바뀌면서 자기를 비우고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자기를 버리므로… 그럼 무엇이 남는가? 저들은 이 역사적 현실뿐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런 결론이야 세계에 주는 대답이 될 수 있을까? 현대는 애당초 무신 세계라는 저들의 전제가 사실이라면 그런 번거로운 수속을 밟아 그리로 도로 와야 할 것은 무엇인가?
결국 자기 문제지, 그리스도인된 자기의 관념과 싸우는 과정뿐이지, 그래서 나도 지금은 무신 세계의 일원으로 한자리 달라는 애소지 무언가! 공연히 이미 땅에 있는 사람을 높은 산에 끌어 올렸다 낙하산을 타고 땅에 떨어지게 할 것은 없지 않나. 그건 그리스도교 2000년에 쌓인 짐에 눌렀든 서구인의 고민이지 비그리스도인과는 애당초 상관없는 소리이며, 그 논리는 차라리 아직도 저 하늘에 신이 정좌하고 있다는 소리보다 더 어려운 말이다.
그것이 정말 이 세계를 위하는 일이 되려면 더 철저해야 할 것이다. 즉 너를 위해 자기를 철저히 비우는 바로 그 행위를 자기에게 적용할 때에만 그것은 정말 몸으로 세계를 위하는 일이 될 것이다. 그렇지 못하고 머리로만 그래 봐야 결국 '너는 죽어도 나는 살아야겠다'아니, '내가 살기 위해 너는 죽어야 한다'라는 이기주의자의 표본밖에 될 게 없다. 신학의 파괴를 머리로 아무리 해봐야 또 하나의 신학을 형성할 뿐이다. 신학을 파괴하려면 폭력을 쓰는 길뿐인 것이다. 자기에게 향하는 폭력 말이다. 사변의 부정은 사변으로는 안 된다. 사변에의 저항은 무사변의 길뿐이다. 그게 바로 폭력행위이다.
(1971. 3. 『현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