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쎄 나는 '정치신학'이라는 용어가 싫어요. 정치란 원래 나쁜 뜻이야 아니지. 바르게 다스린단 말이겠지. 그러나 그 본뜻이야 어떻든 '정치' 또는 '정치적' 하면 그 얼마나 추잡한 연상을 해야 하는지는 속일 수 없는 일이 아니요. 누가 정치는 음흉한 동물이하는 짓이라고 했다지만 사실이 그렇지 않아요! 학계나 종교계에 있는 사람으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세계지요. 오늘의 정치의 중심처럼 보이는 미국을 봐요. 그 대통령 권한은 대단하지만 그래도 가장 민주적으로 선거되고, 또 자유를 보장받은 귀신같은 언론계와 고도로 발달된 국민의 비판의식이 행정부가 무엇을 음성적으로 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라는 일종의 신앙 같은 게 있는데, 그런데 워터이트 사건을 봐요. 이른바 페어플레이니 해서 마치 아무리 위기에 있어도 총 없는 자에게 총으로 맞서지 않고 뒤에 대고 총질 않는다는 카우보이적 기사정신의 전승처럼 정당한 싸움을 하는 줄만 안 미국의 현역 대통령이 도청을 하다니 상상이나할 수 있는 일이오. 얼마나 치사하고 비겁하오. 아니, 얼마나 잔인하고 야수적이오. 아니, 두 세 식구의 가장으로도 제 체면 다 못하는 나 같은 사부라고 그런 일은 자존심이 허락지 않아 못하겠는데 그래도 미국이라는 대국의 '총명한' 국민들이 모아 뽑은, 세계를 주름잡는 대통령이 그같은 일을 하다니! 그걸 닉슨이라는 개인의 인격 자체에서 그 이유를 물을 수야 있소! 나는 정치 때문이라고 보오. 그가 정치라는 권좌의 노예가 아니었던들 그럴 수야 있소?
어디 워터게이트 사건이 새삼스러운 일이우? 아직 케네디 일가의 연속 저격사건의 배후는 오리무중이 아니요. 도대체 정치란 기계 문명시대의 유령 아니고 뭐요? 이런 일이 어디 미국에만 있는 일이요? 지난 번 서독 선거가 과열됐을 때 얼마나 추태를 부리는지 나는 보았소. 그건 정치는 그런 것이라는 전시를 하고 보니 정신이상이 안 생기지 그런 음흉이라는 전유권 없이야 어디 상상이나할 일이요?
정치신학이라 함은 정치적인 것이 사실상 이 현실을 지배하는 데도 그것을 오불관하는 것은 그것에서 생기는 불의를 방임하는 것이니 정치의식을 일으켜 바른 정치하게 하자는 것이겠지만, 오히려 그 더러워진 이름을 쓰다가 그것에 그대로 휘말려들어가게 될 것은 왜 계산하고 있지 않는지 모르겠소.
나는 정치는 도깨비 소굴로 봐요. 그러니 그것의 정화는 필요하지요. 그러나 우리가 전하는 말에는 도깨비는 쳐다보면 볼수록, 주목하면 할수록 점점 커진다고 하죠. 그러므로 도깨비를 없애는 방법은 아주 눈감아버리거나 아니면 계속 눈을 아래로 내리깔면 점점 작아지다가 없어진답디다. 그런데 신학마저 정치신학 운운하면 정치는 정말 유일한 현실의 주제가 되어 점점 비대해져서 하늘을 치솟는 도깨비가 되고 말거야요. 그래서 나는 정치에서 도깨비를 제거하는 방법은 그것을 묵인하는 길도 하나의 묘안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어떤 신문인을 만났을 때 신문들은 이제부터 정치기사는 뒷 구석에 약간 내고 일면은 아주 문화면으로 바꿀 수 없느냐고 했어요. 까닭은 정치기사를 자꾸 일면에 대문짝만큼 내므로 관심의 초점인줄 알고 무슨 방법으로나 국회의원 되려고 애를 쓰고 어떤 방법을 써서든지 그 이름 내려는 돈키호테가 범람하기 때문이지요.
어떤 이는 '정치라면 왜 권력구조만 생각하느냐? 커뮤니케이션은 모두 정치 아니냐?'고 발뺌을 합디다만 그것은 억지지요. 그렇다면 차라리 '사회신학'이라고 해요. 정치를 정화하기 위해서는 정치를 말해야 된다는 주장이 있으나 그것도 부분적인 정당성만 말하는 것이에요.
나는 예수에게 의아했던 것은 그가 로마제국의 존재를 알고 있었냐하는 것이었어요. 까닭은 그의 말씀이나 행위에 로마제국을 계산에 넣은 흔적이 없거든요. 그에게 로마 식민지 민으로서의 자기 민족의 고뇌나 또 그것에서의 해방 따위를 반영한 말 따위는 한 곳도 없어요. 이것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지 난 퍽 오래 생각해본 때가 있어요. 왜 로마제국을 묵살했을까?
그런데 바꾸어 생각해서, 만일 그가 로마제국의 당대의 정치에 민감했다면 어찌됐을까 생각해 봤어요. 그랬다면 아무래도 당시에 젤롯당과 결탁했을 수 있었을 것이며, 또 세리 따위를 그의 주변에 가질 수 없었을 것이며, 따라서 그를 따르는 이들은 폭동을 일으켰을지 몰라요. 그랬더라면 오늘의 그리스도교가 가능했을까 생각해 봤어요.
그렇다고 그가 불의에 대한 방임주의를 택했다고 할 수 있어요? 왜 그토록 세밀한 이가 시대의 기상도를 모르고 있었겠어요.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아 기뻐하는 한 목동의 심정, 잃은 돈 한푼 줍고 기뻐하는 여인의 심정, 억울한 일을 당해서 밤중에 재판장 문을 두드리는 여인의 심정을 헤아려 보는 이가 로마제국의 말발굽소리를 못 들었겠어요. 그는 정치에서 일어나는 불의를 탈정치화함으로써 그 뿌리를 뽑았다고 볼 수 없겠어요? 그는 로마로 진격하지 않았어요. 예루살렘으로 향했어요. 왜? 물을 일은 많지요. 하여간 그에게 '정치적'이라는 말은 어떤 각도로 보나 해당되지 않아요.
나는 이론을 펴자는 게 아닙니다. 그저 느껴지는 것을 그대로 표현해보는 것뿐입니다. 이것은 정치에 신물이 나서하는 이야기입니다.
(1973. 4. 『현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