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번 한국교회 100주년을 기념하며 신학회가 열렸는데 발제자들의 관심을 성격화한다면 '자주적 신학모색'이라고 하겠다. 그러한 노력이 한국인에 의해 이뤄지니까 '한국적 신학' 추구가 되는 것이다. 한국적 신학 모색은 두 가지 동기를 갖는다. 하나는 서구 신학의 지배에서 해방되어야 한다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한국인으로서의 자기 발견이다.
우리는 서구 신학을 소화하는 것이 바로 신학 하는 일로 생각했다. 그러므로 그들이 제기한 물음을, 우리 물음으로, 그들이 얻는 대답을 우리 대답으로 받음으로 우리 자신은 쇠퇴되어 왔다. 그러나 서구 신학이 아무리 객관적임을 강조해 온 그들의 역사와의 관련에서 형성된 것이기에 저들의 문화와 신학을 분리하기 어렵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의 본질과 서구 신학을 구분해야 한다. 성서로 돌아가는 일이 그 길이다.
우리를 추구하는 데는 두 가지 길이 있다. 하나는 우리의 뿌리를 찾는 작업인데 그것은 문화, 종교 등에서 우리의 본래적인 그릇을 찾는 일이요 다른 하나는 우리가 선 오늘의 현장에서 제기되는 문제에 대응하기 위한 작업이다. 그런데 전자는 몰역사적이 쉽고 후지는 몰가치적이 되기 쉽다. 그러므로 이들은 같은 동기에서 출발하면서도 상반의 길로 가기 쉽다. 그러나 목표만 뚜렷하게 세우면 상호 보완의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목표는 어떻게 설정되나?
바울로는 그의 메시지의 진수를 믿음, 소망, 사랑으로 집약하고 그 중에도 제일은 사랑이라고 했다. 그러나 마태오(Q)는 '그 나라와 의'가 목표로 제시되어 있다. 이런 차이는 그 상황판단에 의해서 그 목표도 이동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면 우리는?
오늘 우리에게 지상 명령이 무엇인가? 이 물음은 우리가 우리 현실에 진실하면 얻어지는데 그것을 사회과학 등으로 분석하여 공동의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 그러면 그것이 바로 우리의 물음이 되어야 하고 그리스도인으로서 그것에 대답하되 분명한 근거를 제시하는 것이 신학 하는 일이며, 그 결과 우리의 신학이 될 것이다. 따라서 신학 작업은 이 지상 명령과 무관한 것은 상대화하며 그것을 이룩하는 데 방해가 되면 배타적 도그마로 간주해 버리며 그것에 적극적 대답을 주는 것을 오늘의 복음(메시지)으로 강조하는 일이 될 것이다.
(1984. 10. 『세계와 선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