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신학연구소에서 『신학사상』 제4집을 위한 심포지엄의 주제를 교육 문제로 설정했다. 한국 신학계에서 사계의 학자들이 거의 모였었다. 발제는 감신의 온준관 교수, 경희대의 장진호 교수가 했고 토론은 한신의 문동환 교수의 사회로 이화여대의 정의숙 교수, 감신의 차풍노교수, 한신의 정웅섭교수, 그리고 목회자로서 연동교회 김종열 목사가 참여했다.
전문가들의 이야기들은 『신학사상』에 발표되겠지만 그것에 문외한인 나인데도 이미 같은 분야에 있는 듯한 착각을 일으켰다. 까닭은 교육 문제로 출발했는데 문제는 다른 분야에서 부딪치는 바로 거기에 도달하고 말았기 때문이다. 교육이라는 기술 이전에 도대체 무엇을 위한 교육이냐가 문제되고 보니 결국 가치관이 문제 될 수밖에 없다. 무엇을 위한 어떤 인간을 기르자는 것인가? 이제는 독존적 이상적 인격의 모델이 없다. 그것은 언제나 공동체의 일원이라는 측면에서 문제 돼야 한다. 그러니 결국 어떤 공동체냐가 문제 될 수밖에 없게 된다. 이래서 마침내 사회윤리나 경제, 정치의 분야와 경계를 지을 수 없게 된다. 까닭은 교육의 장이 가정이거나 학교 아니면 교회와 같은 데 국한시킬 수는 없기 때문이다.
결국 모든 것은 새로운 미래를 지향하는 창조적 실험이 필요하게 된다. 그래서 마침내 이 심포지엄에서도 교육의 장으로서의 새로운 '공동체의 모델'을 구상해 보아야 한다는 데 이르게 됐다. 어떤 모델이 가능할까? 오늘의 가족 제도란 부족사회의 유물이다. 본래적 가족 제도는 시대사적으로 많은 변동을 일으켜서 원모습의 끄트머리만 남은 셈이다. 이른바 핵가족제도라는 모습이 그것이다. 그러나 그 외형적인 변화에만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다. 실은 이른바 재래의 가족의 모랄이 완전히 흔들려 버린 것이 문제다. 그것이 아직은 사회 구성의 단위로 간주되고 있으나 사실은 그렇지 못하다. 동양의 윤리는 가족 제도의 확대라고 한다. 그러나 그 윤리의 변모는 가족 제도와 그 모랄의 변동을 불가피하게 했다. 그런데 삼강오륜인지는 낡은 유물처럼 비판하면서도 한국 가족적 모랄을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고 착 각하거나 그래야 한다는 주장은 결국 눈감고 아웅하는 격이다. 사회의 가치 기준이 이처럼 난마적이고 그러면서도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혼이 어디 한 곳에도 집중하지 못하게 하는 이 판국에 가정은 여전히 하나의 방주인 양 옛 모습 그대로 전전하거나 짐작하거나 그러기를 바라는 것은 몽유병자가 아닐 수 없다. 가정도 이미 전인적으로 몸담을 장소일 수는 없다. 이것은 성인들의 경우에만 한하는 것이 아니라 말귀나 알아들을 수 있는 어린이에게도 그렇다. 그러면 학교나 교회 등이 그런가? 학교야 말해 뭘 해! 그게 어디 인간교육인가 비인간화의 과정이지. 교회 역시 그런 원심을 포기한지 오래다. 그렇게 보면 교육의 장은 없는 셈이다. 그에 궁해진 교육자들은 사회교육이라는 말을 쓰고 있다. 그런데 사회교육마저 교육자의 것은 아니다. 독재국가들의 경우에는 정부가 완전히 그 권리를 독점하려고 하고 있으며 그렇지 않은 사회에는 매스컴이 우선권을 주장한다. 이렇게 보면 교육자란 설 곳이 없다. 있다면 겸손하게 꾸며지고 울타리 두른 학교라는 자리뿐이다. 그러나 우리 문제는 교육자의 일터를 장만하는 일이 아니다.
문제는 인간을 인간답게 살게 하는 일이다. 이 일은 구조화된 사회 속에서 개인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하며 또 개인인격형성이라는 낡은 목표로도 되지 않는다. 인제는 공동체의 일원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은 숙명과도 같다. 그러면 공동체의 일원으로 훈련해야 한다. 이 공동체 훈련은 공동체가 그 교육의 장이어야 한다. 그런데 그 공동체는 이 구조 사회에 예속돼도, 그렇다고 외면해도 안 된다. 그것은 이 구조사회의 여건을 압축한 것이어야 하나 현존질서와 거리를 가져야 한다. 그래야만 독백이 아니면서도 그것의 그릇된 것을 지양 또는 극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게 어떤 것일까?
적어도 지금은 이미 있는, 도는 기존의 어떤 것을 이식해서는 안 된다. 까닭은 이제 세계사는 완전히 전환점에 왔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전적인 창조적 과제일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제도적 구상에 앞서서 새로운 사상, 새 가치관의 정립이 필요하다. 그러고 보면 새로운 미래 앞에 선 모든 분야가 총동원돼야 할 과제이다.
(1975.1. 『현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