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협회의 청탁에 의한 소책자 하나를 쓰기 위해서 구약을 내 나름대로 다시 훑어 읽을 기회를 가졌다. 구약이 내 전공이 아니기 때문에 전문가의 안내서 몇 권에 의존하면서 읽어 갔다. 나의 관심은 예언자들에게 있었다. 읽어가면서 예언자들에 대해서 새삼 눈을 크게 뜰 수밖에 없었다.
이스라엘 역사는 객관적으로만 봐서도 하나의 기적이 아닐 수 없다. 지구 한구석에 자리한 한 민족으로서 벌써 2500년 전에 국권을 완전히 잃었으면서도 세계사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고 앞으로 할 가능성을 보유하고 있다.
무엇이 저들의 저력인가라고 묻는다면 역시 저들의 역사관이다. 그런데 이 역사관은 바로 예언자들의 눈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다. 구약에서 보는 대로 저들의 전승 자료는 다른 민족의 건국설화와 민속 전설과 본질상 다른 것이 없다. 미개한 상태에서 얻은 경험에서 축적된 전승, 밖에서 유인된 설화 등 온갖 것이 난맥상을 이루어 그대로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의 결정체로서 인류의 재산이 된 것은 예언자들에 의한 것이다. 저들의 역사 안목이 저들의 과거의 전승을 꿰뚫는 힘줄이 되어 하나의 생명체로 만들었다. 저들의 눈이 과거를 비추면 죽어 묻혔던 것이 살아나서 현재의 힘으로 되고 미래를 향하면 현재에로 앞당기는 힘이 됐다. 그래서 나는 저들을 역사에의 힘줄을 만드는 마술사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스라엘의 전승 자료는 단속적인 것이다. 그러나 예언자의 눈에 의해서 한 유기체가 됐다. 그럼으로써 그들의 죽은 과거는 미래에로 향하게 하는 추진력이 될 수 있었다.
나는 이스라엘사를 읽다가 한국민족사에 마음이 기울어졌다. 이 민족의 역사도 수난의 연속이다. 그 점에서 이스라엘과 비슷하다. 그 수난의 원인이 강대국 사이에 끼어 있는 지리적인 조건 때문이라는 점도 비슷하다. 그러나 이 민족은 세계사적으로 공헌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 왜? 타고 날때부터 우열이 결정됐나? 그런 것 같지는 않다. 과거의 자취가 추했는가?
그렇지도 않다. 문제는 자기 역사를 꿰뚫는 핏줄을 만드는 예언자들이 없는 데 있지 않을까? 만일 그런 예언자 같은 얼이 있었더 라면 이 민족의 낡은 삶의 자취, 민속전설, 설화 등에도 산재한 수천 년 된 해골들의 뼈와 뼈가 갑자기 제자리를 찾고 힘줄아 생겨서 기동할 수 있어서 앞으로 나가는 추진력이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우리의 고사가 겨우 김부식 같은 눈이 없는 수공사의 손에 이루어졌다. 거기는 핏줄이 없다.
그러나 예언자란 있었어도 그 민족이 그 말을 듣고 그 소리를 인정해주지 않으면 홀로 소리 질러도 소용이 없다. 예언자는 그 민족과 더불어 설 수 있다. 한국사에도 예언자들이 있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이 민족이 귀 기울이지 않아서 땅에 묻혀 있는지 모른다. 한국사 연구가 얼마나 진행됐는지 갑자기 궁금해졌다. 소위 정사에는 흥미 없다. 소리 소리치다가 그 소리가 민족의 귀에 미치지 못하고 되돌아오는 외로움을 안고 그대로 죽어간 숨은 인간들의 모습을 발굴한 것을 보고 싶다. 역사 자체는 얼을 갖고 있지 않다.
아니! 역사의 얼은 예언자와 같은 인간이다. 이 얼이 과거 현재 미래를 꿰뚫어서 한 생동하는 유기체로 만든다. 나는 우리 역사에도 예언자는 꼭 있었을 것만 같다. 그래서 예언자를 찾기 운동이 벌어졌으면하는 염원이 생겼다. 예언자 찾는 눈은 예언자의 눈을 가진 자만이 가진 것이다. 그게 누구들인가?
(1970. 8. 『현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