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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서의 맥 3 |
생명을 살리는 신앙
(한국신학연구소)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마태 7, 7-11
1. 구하라, 찾으라, 두르리라

'구하라 주어질 것이요, 찾으라 찾아질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열릴 것이다.' 이것은 유명한 말씀인데, 루가복음에도 있다(11장). 루가에는 주기도와 그리고 멀리서 찾아온 친구를 위해 친구집에 밤중에 가서 결국 떡을 얻어 오는 비유와 관련시켜서 기도에 관련시켰다. 즉, 끈질기게 기도하면 종당에는 이뤄지고 만다는 것이다.

유대교에는 기도에 대한 확신이 있었다. 기도가 응답된다는 것은 그 때의 다른 종교와 구별된 유대교 나름의 특성이었다. 유대교에는 기도에 대한 세 가지 표상이 있다. 첫째는 사람이 기도하면 그 기도는 그대로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천사들이 왕관을 만들어 하느님의 머리에 얹는다는 것이다. 둘째는 그 기도는 인간의 죄악과 상관없이 천사가 순수화해서 상달(上達)되게 한다는 것으로 시편 65절 3절에 나타나 있다. 셋째는 그 기도는 아무리 반복해도 하느님은 기뻐한다는 것이다. 그것을 인간의 경우와 비교한 얘기가 있다. 사람은 친구가 처음 찾아오면 맹주의 자리(polster)에 앉힌다. 두번째 오면 단순한 의자에 앉힌다. 그러나 세번째 오면 나무의자(schemel)에 앉힌다. 그런데 네번째 오면 너는 너무 나를 귀찮게 하고 짐스럽게 한다고 마침내 항의한다. 그러나 하느님은 성화를 시키면 시킬수록 기뻐한다고 한다(zeeira). 그렇기에 야곱이 천사와 씨름을 했다는 것을 높이 평가한다. 정말 하느님과 씨름하듯이 짖궂을 정도로 하는 기도는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그러면 반드시 얻고 열리리라.' 이것은 물론 그 대상은 하느님을 두고 한 말씀이다.

2. 중심점

그런데 여기서 몇가지 주의할 것이 있다.

첫째, 어떤 일이 이루어진다는 것은 하느님이 일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추구하는 인간의 노력과 결부된다는 것이다. 은혜는 그저 하늘에서 땅에 떨어지듯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인간의 노력, 소원과 결부된다. 그래서 어떤 이는 하느님의 은혜를 광산과 비교한다. 광산에는 금이 많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찾아서 가려내야 인간의 것이 된다. 어떤 이는 무수한 대문이 달린 궁전과 비교했다. 들어갈 권리는 주었으나 닫혀 있다. 그는 문을 두르려야 열린다. 그리고 열고 또 열어야 비로소 보화와 영광이 있는 옥좌에 이른다.

둘째, 그런데 다음 주목할 것은 그 성과는 피동형을 사용했다는 것이다. '찾아라, 발견할 것이다'가 아니라 '주어질 것이다', '열라'가 아니라 '열려질 것이다'이다. 즉, 인간이 비록 이니셔티브를 취해도 그것은 주어지는 것이지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아무리 열려고 해도, 아무리 두드려도 문고리는 밖에 없으며, 열어주지 않으면 들어갈 수 없다. 그러면 구할 생각은 뺏는 것이 아니라 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셋째, 기도는 입으로나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해야 한다. "나더러 주여 주여하는 자마다 하늘나라에 들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실)행하는 자라야 들어갈 수 있다"(마태 7, 22)는 바로 이런 뜻이다.

넷째, 그러나 여기 약속이 있다. 반드시 두드리고, 구하고 찾는 자에게는 그 소원대로 되리라는 약속이다. 이 신념은 확고하다. 그러므로 악한 인간도 자식이 생선을 달라면 뱀을 주고 떡을 달라면 돌을 줄 사람이 없거늘 하물며 하느님이 꺼리냐고한다. 끝으로 또 하나는 하느님은 기도를 듣기 전에 이미 그 내용을 다 아신다는 것이다. 이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면 기도는 뜻을 나누는 교류에 있지, 기복적인 응보는 아니라는 말이 된다.

희랍의 제우스와 다르다. 새벽의 여신 '오로라'가 사랑하여 결혼할 때 선물로 장수(長壽)를 달라고 했다. 그러나 불노(不老)를 말하지 않아 늙어서도 죽지 않아 고통했다고 한다. 이것은 희랍신화의 전형적인 것으로 신들은 무조건적인 자기 개방으로 은혜를 베푸는 것이 아니라 그 소원(기도)의 결과가 어찌 될 지 알면서도 들어주어 궁지에 몰리게 한다.

3. 올바른 기도

그런데 구체적으로 기도한다는 것은 어떤 것이며 또 무엇을 찾으라는 것이며, 무엇을 두드리라는 말인가?

유대교에서는 언제나 '이스라엘아!'라고 불렀다. 저들의 기도의 중심은 개인의 일보다는 전민족적인 일이다. 그 민족적인 일은 바로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우리는 이스라엘과 다른 상황에 있다. 우리는 우리대로 그때, 그때에 찾고 두드려야 할 것이 다르다.

첫째, '문을 두드린다, 찾는다'는 것은 벌써 '잃어버렸다, 차단됐다!'는 것이 전제된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관계가 깨지거나 차단된 것을 뜻한다. 그러면 우리에게는 무엇이 잃어졌으며 무엇이 차단 됐나? 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하여간 그것이 우리의 비극이다. 내 비극은 역시 나와 사랑해야 할 이 사이의 사랑이 잃어지고 관계가 차단된 것이다. 인간의 슬픔을 요약하면 결론은 '이별'로 요약된다. 병도 잃은 건강을, 늙음의 슬픔도 젊음을, 죽음도 다시 만날 수 없다는 사실 때문이다. 재산이나 그외의 것을 잃으면 결국 그게 없으므로 너를 잃게 되어 슬프다. 이러한 이별은 너와 너와의 사이에 넘을 수 없는 담을 만든다. 우리의 비극은 이 막힌 담, 분단의 담이 우리 사이를 가로 막기 때문이다.

민족적인 차원에서 보면 우리의 슬픔, 비극 그리고 과제는 역시 남북의 분단이다. 6.25 비극도 또 앞으로의 비극도 여기 있다. 우리는 다시 합하는 일을 위해 잃은 관계를 찾아, 막힌 문을 향해 구하고 찾고 두드려야 한다. 우리는 인간관계에서 어느 정도의 노력으로 아주 절교를 선언하고 체념한다. 그러나 그것은 언제나 내 안에 그림자처럼 아니 어떤 독소(毒素)처럼 나를 좀먹어 무의식 중에 나를 불안하게 한다. 남북협상은 정치적 측면에서 볼 때 절망에 가깝다. 그러나 우리는 계속 찾고 구하고 철의 장막을 두드려야 한다. 이 부단한 노력을 포기하는 쪽이 진다. 우리는 반드시 열릴 것을 믿고 두드리고 찾고구해야 한다.

둘째, 그런데 우리는 너와 나와의 관계에서 잃은 것, 막힌 담만 찾고 그것을 두드리다가 보면 끝끝내 찾아지지 않고 열리지 않는 것을 본다. 그러나 그 대문은 그 다음의 대문과 연결이 돼 있다. 한 대문을 열면 더 강한 장애물에 부딪힌다. 그것은 바로 내 안에 있다. 결국 내 안에 분단의 담이 있고 체념의 상실이 있다. 참 구하는 자, 참 찾는 자, 참 두드리는 자는 결국은 내 마음의 문을 두드리게 된다. 여기 이른바 정치협상이나 사회학적 방법에 한계점이 있다. 우리 자신 안에 원수가 있다. 사랑이 상실됐다. 배타적 철문이 있다. 내 안에 남북의 분계선이 있다. 결국 싸움의 표현은 내 마음 상태의 창이다.

참 기도는 찾고 싶은 것과 그것을 거부하는 것, 구하는 것과 배타성, 두드리는 것과 폐쇄성이 함께 있어서 체념은 대체로 후자가 자기 정당화의 구실을 찾은 데서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A와 화해해야지 하는 어떤 부정적인 부분이 드러나면 곧 주장의 결과 그것 봐!'로 맞서며 반론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많다. '북한과의 문을 열어야 한다'고 하는 한편에서는 그러나 열리지 않기를 바라는 심정이 언제나 도사리고 있다.

그렇다. 이 마음의 문을 두드려야 한다. 내 안에 있어야 할 것을 찾아야 한다. '안되더라!'는 결국 핑계가 된다. 그러나 나를 추구하다가 보면 내게 있을 폐쇄성, 내 안에 체념성은 아니, 내 실존(實存)을 추구하다가 보면, 정말 진지하게 추구해 보면 종당에는 '나'면서 '나' 아닌 다른 것에 부딪친다. 그것은 그럴 수밖에 없는 '나'다. 아니, 내 안에 '나' 아닌 어떤 것이 바위와도 같이 나와 아무 관계없이 내 안에 철문처럼 들어 앉은 것을 느낀다. 그것은 내 의식세계에서 알 수 없는 어떤 것이다. 내가 남과 차단했거나 남과의 관계를 잃은 것은 내 안에서 이미 차단이 있고 상실이 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사람을 죽였다. 그래서 잡히지 않기 위해 그 죽인 증거를 다 도멸하는 데 성공한다. 그를 계속 괴롭히는 것이 있어 나를 괴롭힌다. 그것은 양심이다. 그 고뇌에서 풀려나기 위해 양심을 해부하고 상대화해 버리므로 '양심 따위가 무어냐'할 수 있게 됐다. 그런데 그다음에 더 엄격하게 나를 감시하는 눈이 있다. 그가 누군 가? 그것은 양심 밖에서 양심이 용서해도 용서하지 않는 어떤 것이다. 성서는 이를 바로 하느님이라고 한다. 니체는 이처럼 속속들이를 우리 내부의 비밀을 추적하는 신을 죽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렇다고 그 자신이 살아 있는 한 감춘다는 것은 무의미한 헛수고다.

그래 결국 '구하라, 두드리라, 찾으라'는 하느님을, 그와의 잃은 관계를, 그와 차단된 문을 두드리라는 것이다. 이것 없이는 아무것도 안 된다. 우리 말에 '신이 난다'라는 말이 있다. 신은 신(神)이다. 그것 아니고는 아무것도 하기 싫다는 것이다.

결국 우리는 크게 세 가지 관문(關門) 앞에 이르렀다. 이웃, 나(良心), 신, 그래서 하느님과의 단절의 대문 앞에 서게 된다. 그래 그 문을 끝끝내 두드리라는 것이다. 이웃이 용서하면 되지 않는다. 내가 용서 해야지. 내 양심(良心)이 용서해서 끝나지 않는다. 우리는 하느님과의 관계에 막힌 문 앞에 선다.

그런데 그것은 우리의 차원에 적용하면 먼저 오랜 차단 사이에 생긴 이질성의 극복이 첫과제다. 그러면 민족통일을 회복하는 일이다. 그 다음에 또 대문은 화해의 문제다. 화해란 용서를 중요한 계기로 삼지만 그 용서가 진심에서 우러나온 것이 아니면 양심이 용인하지 않는다. 그것은 이해를 희생하는 것이 아니라 이해 위에서의 용서다. 끝으로 신의 자리에 이데올로기의 장벽이 가로막은 것이다. 이것은 미소로도 전쟁으로도 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세계의 방향전환과 맞물려져서 그것의 절대화가 어리석었다는 것이 인식될 때다. 이것이 시간이, 그러니까 인내가 해결해 줄 것이다.

 

2차대전 후 분단되었던 모든 나라는 어떤 형식으로든 분단에서 해방되어 통일 민족을 이루었다. 그런데 비단 우리만 분단 속에서 갖은 비극을 겪고 있다. 그러나 끝까지 체념 말고 구하고 두드리고, 찾으면 분단의 문은 열리리라. 역사의 방향이 이미 우리 편에 섰다. 모든 일은 우리에게 문두드림이다.


| 성서의 맥 3 |
생명을 살리는 신앙
(한국신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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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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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상과 하느님 (고전 8,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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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마태 7, 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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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斷)! (마르 9, 42-48)
살림운동은 죽임의 세력과 투쟁이다 (요한 1, 4; 6, 53)
 
제3부 새 세계의 건설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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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세계의 건설자 (에페 2, 11-22)
죽음보다 더 확실한 것 (로마 8, 3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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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의 현존 이해 (필립 3, 1-14)
문(門) (요한 10, 7-16)
나를 따르라 (루가 9, 57-62)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현실 (갈라 3, 26-29)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고전 12, 12-27)
자유에의 길과 그리스도 (루가 4, 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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