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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서의 맥 3 |
생명을 살리는 신앙
(한국신학연구소)
나를 따르라
루가 9, 57-62
1

나를 따르라! 이것은 예수에게서 볼 수 있는 특유한 권고이다. 예수를 믿으라는 말은 세례자 요한이나 바울에서 많이 본다. 본 뜻은 같은 것이리라. 그러나 믿으라는 것은 도피구가 많다. "나는 예수를 믿습니다"고 하면서 그를 내 삶의 튼튼한 후견인처럼 생각하고 말할 수 있다.

어떤 청년이 무슨 의논을 하러 온다. "글쎄, 이렇게 하는 게 좋을 걸!" 하면 "선생님만 믿겠습니다" 한다. 자기 결단은 보류한다. 후에 보면 내가 원했던 것과는 다른 길로 간다. 원래는 '나를 따르라' 해야 하리라. 이렇게 했다면 그에게 변할 틈을 주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럴 자신이 우리에게는 없다. 석가는 최후에 "나를 따르지 말고 내 한 말을 따르라"고 했다. 니체는 "나를 따르지 말라"고 했다. 바울은 "나를 본받으라"고 했다. 그런 것은 다 여유를 주는 것이다. 그런데 나를 따르라는 것은 완전히 내게 너를 맡기라는 뜻이다.

언젠가 해인사에서 소승이 '나만 따라 오십시오'라는 말을 들었다. 여기 예수를 따르는 혹은 따르려는 자에 대한 세 가지 예가 있다. 여기서 예수를 믿는다는 뜻을 배우자.

2

첫사람: 그는 예수를 자진해서 따르겠다고 한다. 그런데 그의 말은 "선생님이 가시는 곳이면 저는 어디든지 따라가겠습니다!" 어디든지? 그게 원래의 따르는 자의 결심이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어디든지'라는 한계를 생각하고 하는 말인가? 사랑하는 순진한 소녀가 "당신과 만이라면!" 과도 같이 들린다. 그럴 때는 행복하리라는 전제만이 있는 법이다.

이에 대해서 예수는 수락도 거부도 하지 않고 "여우도 굴이 있고 새도 보금자리가 있으나 인자(人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한다.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루가복음서는 기록이 없다. 마태오에는 서기관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그 청년이 예수를 따라 나서겠다고 한 것은 신학, 율법을 배우기 위해서인가? 그러나 루가에는 그를 특정인으로 말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를 따르려는 모든 사람에게 하시는 말씀으로 했다.

왜 예수는 이런 반응을 했을까? 여우와 새는 굴이 있고 보금자리가 있다. 즉 제가 휴식하고 은거할 거점이 있다. 그런데 예수 자신은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한다. 이것은 내 머무를 자리가 없다는 뜻이다. 집이 없다는 뜻인가? 그러나 루가에는(9, 1) 그의 어머니와 형제가 가파르나움에 살고 있다고 한다.

'여우'라는 말은 구약에서는 암몬족의 속칭이다. 암몬은 유대인과의 정치적 원수이다. '여우'같다는 말은 우리 말에서도 간교하다라는 증오심을 포함한다. 신약성서에서도 헤로데는 '저 여우'라고 한 데가 있다.

새 또는 공중의 나는 새(마태오)는 이방인을 표현할 때 잘 쓴다. 그것은 남이 지어 놓은 곡식을 공짜로 먹어버린다는 뜻도 있는 듯하다. 즉 침략자다. 그래서 에돔이나 로마인을 그렇게 부른 기록이 있다. 우리 말로 오랑케, 왜놈이란 뜻이 통할런지도 모른다. 하여간 둘 다 가장 싫어하는, 경계해야 하는 미움받는 상징이다. 그러나 저들에게도 굴이 있고 보금자리도 있다. 그런데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한다. 이것을 보면 잡으려고 하는 자들에게 쫓기는, 그리고 미움을 받는 자는 여우나 새보다도 더 비참한 처지에 있다는 고백이다. 얼마나 고독한 자의 소리인가? 이 말은 그의 생애를 보면 결코 과장이 아니다. 그가 어디 머리를 둘 곳이 있었나! 그 민족, 로마인 심지어 제자들에게까지 종말적 실존의 반영이다. 요한복음은 이것을 그리스도인에게 적용했다. "너를 세상이 미워하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 알라. 너를 미워하기 전에 나를 미워하리라. 까닭은 나는 세상에 속하지 않았으니!"

즉 우리가 가야 할 길은 이 땅안에 살면서도 이 땅에 삶의 거점을 두지 않고 보이는 것으로 살면서도 거기 매이지 않고, 오고 있는 미지의 미래에 밧줄을 던지며 새 천지에 상륙하려는 모험자처럼 그런 그리스도의 길이다.

어디든지 따르리라고? 그러니까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그 길은 네가 이미 가진 것을 더해 주거나 그보다 더 화려한 것으로 대치되는 그런 길이 아니다. 아니 네 일체의 가치관, 행복 따위는 단절돼야 하는 길이다.

네가 나를 따르려면 이 과정 없이는 새 세계에 갈 수 없다. 마음대로 결정해라. 제자들이 예루살렘 도상에서 서로 높은 자리에 대한 꿈에 취하면서 그를 따를 때 "너희가 내가 마시는 잔을 마실 수 있느냐?"고 물었다. 이와 유사하다.

흔히 천재는 고독하다고 한다. 그것은 천재는 그 시대에 한걸음 앞섰기 때문이다. 그러나 언젠가는 그가 인정받는다. 그래서 천재라고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말은 이 세상보다 한걸음 앞서 가기에 고독한 게 아니라 "영원히 방랑하는 유대인"처럼 이 세상에서 원칙적으로 이방인처럼 살아야 하기에 고독하다. 저들이 어느 때인가 이 세상에 합류할 수 없다. 그것은 이 세상에 몸을 맡기고 살지 않기 때문에 이런 길을 결단할 수 있느냐? 그가 어떻게 결단했는지의 뒷얘기는 없다.

둘째 경우는 좀 다르다.

이번에는 예수가 만난 사람에게 "나를 따르라"고 한다. 그가 누구인지는 모른다. 그러나 예수는 그에게 위급한 것이 지금 결단하지 않으면 안 될 처지에 있다고 봤기 때문인지 모른다.

그런데 첫 사람에게는 예수가 일단 거리를 둔 데 대해 이 사람은 자신이 일단 거리를 둔다. "먼저 제 아버지를 장사하러 가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이것은 그를 따르라는 것을 거부한 게 아니다. 단지 먼저, 우선 그 전에 해야 할 정리할 일을 처리하고 나서 하는 것이다. 일에는 순서가 있다는 것이다. 죽은 아버지 장례를 지내는 것은 십계명과도 관련된 자식의 임무다. 일상적 너무나 당연한 '먼저'이다.

그는 모범생이다. 계획성이 있다. 그러나 일상성이라는 것 외에 비상시를 계산했기에 모범생이다. 무엇이 '먼저' 할 일인가? 그 '먼저'의 순서를 언제나 고정되는가? 이에 대해 예수는 "죽은 자들은 죽은 자들에게 맡겨두고 너는 가서 하느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과격한 말씀이다. 그래서 르낭(Renan)은 이 말은 인간의 사랑, 가정의 신성한 의무를 짓밟으며 삶의 기쁨, 사랑의 기쁨, 감정의 희열을 잊은 말이라고 한다. 확실히 잔인할 정도이다. 그러나 문제는 '먼저', '후에'의 순서를 평상시처럼 지키게 돼 있지 않다. 지금 당장 종말이 온다. 지금 집에 불이 붙고 있다. 지금 전쟁이 터졌다. 이런 때는 '먼저', '우선'이 달라진다. 지금 아이가 차 사고를 냈다. "먼저 화장을 하고 나가지!" 하는 엄마가 있을까? 그게 옳은 태도일까? 이것은 확실히 비상시를 말한다. 먹고 입는 일은 '먼저'해야 한다. 그러나 "너희는 먼저 그 나라를 구하라"고 한다. 그리스도인이란 이러한 마음의 태세여야 한다. 보통때는 가계부에 따라 돈을 쓴다. 그러나 그런 것보다는 '먼저' 하고 다음에 따지는 한이 있더라도 해야 할 게 있다. 병자를 놓고 '먼저 입원수속부터'인가? 그것은 일상성이다. 그런데 지금 빨리 손을 대지 않으면 죽는 판에 '먼저 입원수속인가'? 이러한 현세에서 그리스도인도 그렇다면? 그럼 그를 따를 수는 없는 것이다.

죽은 자들은 죽은 자로 장례하게 하리라. 여기 죽은 자라는 육적 정신적인 죽은 자를 구별한다. 과거를 사는 자들에게, 일상성에만 매인 자에게 죽은 자의 장례를 맡겨라! 네 할 일은 따로 있다. 나는 이런 사람이 되련다. 이런 선한 일을 하련다. 참 그리스도인 답게 … 그러나 첫째 '우선'은 하고 나서 그리고 새 출발하는 사람을 본 일도 없지만 그것은 현재의 자책감을 모면하는 일이다. 그것을 다하면 또 그것이 꼬리를 물고 계속 우선권을 주장한다. 기회란 언제나 있는 게 아니다. 결단의 기회, 한번 남을 살릴 수 있는 기회가 오면 그때 일상성 '먼저'가 바뀌어질 수 있어야 그게 참 인간이다. 내가 하지 않으면 안 될 일, 내게 지상명령이 내릴 때 '우선'의 순서는 바뀌어야 한다.

서양 격언에 "지옥 가는 길은 잘 계획되고 포장이 되어 있다"고 한다. 우리에게는 "핑계 없는 무덤이 없다"고 한다. 자기는 지금 제 임무를 뒤로 미루면서도 언제 "먼저 요것을 하고"라는 것으로 결단을 미루어 간다.

아니 너는 네게 지상명령, 네가 해야 하겠다고 하지 않으면 그 일에, 그 사람에게 치명상이 온다고 보이는 것이 있으면 바로 지금, 여기서 당장 하라고 한다. 그런 기회는 다시 안 오겠기에!

셋째는 둘째 경우와 비슷하다. 그래서 마태오는 이것을 빼고 있다. "먼저… 하게 해 주십시오"와 같다. "먼저 내 가족을 작별하게 해 주십시오." 평상시라면 얼마나 당연한 일인가? 그런데 예수의 말씀은 다르다. "손에 쟁기를 집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치 않다." 이 사람은 아직 지금까지의 관련에 미련을 가진 자이다. 둘째 사람은 의무를 다 하겠다는 것이요, 셋째 사람은 지금까지의 애착을 아쉬워하는 이이다. 가졌던 것이 아까워 다시 한번 보고 만져 보고 떠나려는!

본회퍼는 "쟁기를 가지는 인간은 뒤를 돌아보지 않으며 또 꿰뚫어 볼 수 없는, 이제 갈 저쪽도 보지 않고 지금 스스로 할 수 있는 다음의 한 발을 내디딘다. 되돌아 보는 것은 그리스도교적이 아니다. 불안, 슬픔, 죄책에도 불구하고 당신에게 새로운 출발을 명하는 그 분을 우러러 보는 것이 바른 자세다. 그러면 그 분으로 인해서 모든 것을 잊게 될 것이다"고 했다.

과거를 청산하고 생활을 정리하고 사랑에 매듭을 짓고 또 죄를 정리하고 그리고 새 출발이란 성서적 요청과는 다르다. 이것이 유대교나 또 다른 종교의 순서이다. 그러나 예수는 청산하고가 아니다. 지금 그대로이다. 그래서 일하던 손 그대로 오라는 것이다.

3

문제는 이상의 말씀들을 듣는 자의 입장이다. 만년대계를 세우라는 윤리, 세계가 영원하다고 생각하고 내 설계에 따른 '生'을 영원히 구축할 수 있다는 사람들, 안전, 안일주의에 있는 사람은 성서를 읽어도 이런 구절은 싫어한다. 그러나 비상시, 지금 금방 손을 대지 않으면 안되는 위기를 보는 자, 지금 금방 전환하지 않으면 기회가 없다. 지금 금방하지 않으면 죽는다 등의 위기를 알면 이 말씀은 진리인 것이다.

우리는 사실 위기에 살지 않는가? 역사적으로도 그렇지만 우리의 삶 자체가 무슨 보장이 있는가? 어떻게 내일로 미룰 만큼 그렇게 자신이 있다는 그런 보장이 있나?

그래서 예수는 지금 곧 "나를 따라오라!"고 한다.


| 성서의 맥 3 |
생명을 살리는 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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