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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서의 맥 3 |
생명을 살리는 신앙
(한국신학연구소)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고전 12, 12-27

에페소서 1장 23절과 골로사이서 1장 18절에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라 한다. 그게 무슨 뜻인가? 이 대답이 오늘의 본문인 고린토전서 12장 12-27절에 정확하게 밝혀져 있다. 그러므로 좀 사변적인 감이 있더라도 몇 각도에서 그 뜻을 확실히 밝혀 보려고 한다.

1. 몸

첫째로 몸은 하나라고 한다. 즉, 몸이 한 실체의 단위라고 한다. 그러므로 몸이 있고 그것에 붙은 것이 지체이지, 지체가 모여서 몸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지체는 몸에 붙어 있는 한 산 것이며 또 필요한 것이지, 몸에서 떨어져 나가는 순간 그것은 쓸데 없는 것이 되고, 썩어버리고 만다. 이것을 교회에 적용해 보면 교회가 있고 교인들이 그것에 속했지, 교인들이 모여서 이룬 것이 교회가 아니라는 말이다. 이 점에서 교회는 어떤 주식회사나 클럽과는 다른 것이다.

바울은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보았으며, 그러므로 그리스도가 있어 그리스도인이 있지, 사람들이 모여서 그리스도를 만들어낼 수 없다는 당연한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명심해야 할 것은 그리스도인이란 교회에 속한 존재이고, 따라서 교회에 속해도 그만, 속하지 않아도 그만이라는 생각은 잘못 되었다는 사실이다. 교회에 어떤 어려움이 있거나, 불만이 있을 때 '교회에 안 나오면 그만이야'라는 태도는 몸에 붙은 팔이 아니 손가락이 나 혼자 떨어져 나가면 그만이지 하는 것과 같다.

둘째로 그러나 몸은 지체가 있으므로 몸이지, 만일 지체가 없다면 한 관념에 그치고 말 것이다. 지체는 가시적인 몸이다. 교인이 없으면 교회가 성립되지 않는다. 요한복음에 나온 비유를 따르면, 나무에는 가지가 있고 그 가지에 잎이 필 때 대기를 호흡함으로 나무일 수 있지, 가지가 없으면 죽어버리는 것과 같다. 교인들이 바로 교회의 팔, 다리, 눈, 입, 귀로서 촉각이고, 시각, 감성대인 것이다. 그런고로 교인들이 제 구실을 하지 못하면 교회가 제 구실을 하지 못한다. 몸의 지체인 눈 하나가 제 구실을 못하면 애꾸가 되듯이, 교인의 일부가 제 구실을 못하면 애꾸눈의 교회가 되고 만다.

셋째로 몸과 지체는 두 개의 다른 실체가 아니라, 한 실체의 양 면을 표시할 따름이다. 몸 따로, 지체 따로가 아니라는 말이다. 이 지체는 몸의 연장이지, 이물질이 아니며, 장식품도 아니다. 교회란 희랍에서 말하는 이데아처럼 따로 선재하고 교인은 거기에 첨가되어 주종관계를 이루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가령 수도교회가 먼저 있고 여러분은 평신도로서, 여자로서, 남자로서, 집사로서, 장로로서 그것에 속한 것이 아니라, 바로 이 교회를 대표한다. 여러분의 모여진 생각이 그리고 여러분의 행동이 바로 수도교회의 생각이고 행동이지, 그것 외에 따로 수도교회의 본 정신이나 행동이 있을 수 없다. 따라서 사람들이 예수를 따르기도 하고, 메시아로 추앙하기도 하며, 십자가에 못박기도 한 것처럼 여러분이 수도교회를 영광스럽게도 하며, 동시에 죽여버릴 수도 있다.

넷째로 위의 뜻을 종합해 한마디로 말한다면 몸이란 바로 유기적 실체라는 말이다. 눈이 아프면 몸 전체가 아프다. 손에 가시 하나가 박혀도 온 몸이 아프다. 어느 부분이 약하면 온 몸이 약하다. 나는 심장이 고장났기 때문에 외모는 멀쩡해도 온 몸으로 앓고 있다. 교회는 유기적 공동체란 말이다. 그것은 쓰레기통과 다르다. 쓰레기통은 무기적 집성체일 뿐이다. 그리고 또한 이 주머니 속에 든 것과도 다르다. 주머니 속에서 나오는 것은 간접적 공동체일 뿐이다. 한 이름 없는 평신도의 불행이 목사, 장로를 위시한 전체의 불행이 되고, 목사나 당회의 잘못이나 어떤 약한 것이 교인 전체의 잘못으로, 약점으로 받아질 때 각기 다른 역할을 하면서 하나를 이루어 나간다. 이것이 유기적인 공동체이며, 이것이 바로 교회의 본 모습이다.

2. 몸은 '우리'

'이 교회는 이런 의미에서 정말 그리스도의 몸인가?', '이 교회는 하나의 유기적인 공동체인가?'를 물어야 한다. 만일 그렇다면, 나, 너로 왔으나 그것이 용해되어 '우리'가 되어야 한다. '우리'라는 말은 영어의 We와는 다르다. 우리는 하나의 복수가 아니다. '우리'는 우리나라의 가족주의에서 잘 보존되어 있다. 개인주의가 고도로 발달된 서구인들은 내 집, 내 남편, 내 아내, 내 아들이라고 하는데, 나는 차마 내 자식, 내 아내라고 부르지 못한다. 우리는 우리 집, 우리 아이라고 할 뿐 아니라, 내 남편이라고 하지 않고 우리 아빠, 더 나아가면 우리 목사님, 우리 장로님 등등으로 부르며, 아내에 대해서도 '내 아내'라는 말 대신 '집 사람'이라고 한다. 그때에 '집'은 '우리'라는 말을 대신한 것이다. 서구인들은 우리들이 '우리 아내'라고 해서 다부일처제가 아닌가 하는 착각을 일으킨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돼지우리, 양우리의 '우리'이다. 울타리라는 말도 같은 어원에 속한다. 그것은 곧 숙명적 공동체를 뜻한다. 이 교회 교인들이 자기 교회를 우리 교회라고 하는가? 그럴 때 그 뜻을 알고 그렇게 말하는가? 이제 담임목사를 '우리 목사'로 받아들이는가? 그게 사실이라면 '우리'라는 숙명적 공동체에 수용했다는 말이 된다. 그게 사실이라면 그가 어떤 잘못을 하고, 그에게 어떤 약점이 나타날 때 그것을 우리의 잘못, 우리의 약점으로 받아지게 될 것이다. 만일 교인 중 어떤 사람이 '나'로 튀어 나와 '너'를 공격하고 비판하면 이미 '우리'를 깬 행위가 된다. 담임목사가 '우리 교인, 우리 장로'라고 하는가? 그게 사실이라면 앞으로 '저 집사, 저 장로 때문에'라는 소리는 할 수 없어야 한다. 까닭은 그의 잘못에 내 잘못이 포함되어 있으니까 그렇다.

3. 몸에 박힌 이물질(利己主義)

그런데 그게 그렇게 되지 않는 데 문제가 있다. 바울이 몸이라는 말로 교회의 본질을 역설한 것은 고린도교회의 '우리 됨'이 깨져 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무슨 문제가 어떻게 생겼었는가? 그것은 평등성이 파괴되고 기득권자들이 불균형을 정당화하는 기존의 사회성이 그대로 교회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기존 사회는 가난한 자와 부한 자, 신분있는 자와 없는 자로 갈라져 있었다. 이것을 계급 갈등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러한 사회의 계급 갈등이 그대로 교회 내에 밀려 들어와서 '우리 됨'을 깨고 있었던 것이다.

구체적으로 애찬에서 이 갈등이 노출된다. 초기의 애찬은 성만찬과는 달리 각기 능력껏 먹을 것을 가지고 와서 함께 나누어 먹는 행위이다. 그런데 더 가진 자들이 좋은 음식을 싸가지고 와서 비슷한 생활 수준의 사람들끼리만 모여서 나누어 먹었고, 못 가져온 사람들이 굶고 있는데 대해서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러고도 교회인가? 이러고도 한 그리스도를 믿는 공동체인가? 교회가 먹기 대회를 하는 장소인가? 못가진 자들에게 가진 것을 자랑하는 장소인가? 그러려거든 제 집에서 처먹지. 가난한 자의 한만 더 쌓이게 해. 거기다가 못 가져온 자들을 무시해.

이에 바울은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역설하면서 '몸 가운데서 비교적 약하다고 보이는 지체가 오히려 더 요긴합니다. 몸 가운데 그리 중요하다고 생각되지 않는 것들을 더욱 귀한 것으로 입히고, 보기 흉한 것들을 더욱 더 아름답게 꾸며 줍시다'라고 말했다. 즉, 바울은 사회에서 무시당하는 자를 교회 안에서도 무시하는 것은 하느님의 뜻에 반하는 것이라고 역설하는 것이다.

여러분은 기존 사회에서 계급, 또는 계층적으로 구분되며, 여러 다른 이해관계에 있는 이들로서 교회에 모였다. 이 사회성을 그대로 교회 안에서 반영한다면 한 몸이 될 수 있을까? 어떤 여의사가 개업 예배를 드릴 때 그 어머니가 이렇게 기도했다고 한다. '하느님! 병자들이 구름같이 모이게 하소서.' 이대로라면 장의사는 '오늘도 사람들이 구름떼같이 많이 죽게 하되, 특히 이 지역에서'라고 기도할 것이다. 이러한 이기성을 그대로 안고 교회에 모여 어쩌자는 것인가?

젊은 날 나는 친구들을 그 가족과 함께 묶어 공동체를 이뤄 보려고 정열을 쏟은 때가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인가 나는 일기에 달팽이들이 구수회의하는 그림을 그렸다. 그 달팽이들은 회의를 할 수 있게 원형을 만들고 모두 촉각을 내밀고 진지하게 오래도록 무슨 뜻인가 논의하였다. 그런데 그들은 각기 그들의 등에 자기들의 둥지를 그대로 메고 왔으며, 그 둥지에 몸을 실은 채 머리만 내밀고 있다. 그리고 무엇인가 장애물이 출현하면 그 둥지 안으로 온 몸을 감추고, 또 구수회의를 끝내고는 그 둥지 안으로 들어간다. 나는 이 그림으로 그 당시의 모임의 실상을 묘사했다. 사실 모여서 숙의하는 것은 머리와 촉각뿐이고, 저들의 몸은 여전히 각기의 가정에 있었다. 그 가정이 바로 나에게는 이기적 소굴로 보였다.

우리는 모이면 매번 함께 주기도문을 외운다. 그런데 명심할 것은 이 기도에서는 계속 내가 아니고 '우리'를 내세운다는 사실이다. '우리 아버지',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 '우리가 우리에게', '우리를 시험에 들지 않게' 등등 계속 '우리'다. 나의 아버지가 아니라, '우리' 아버지다. 그러면 이러한 '우리'의 기도를 계속 반복하는 우리에게 '우리'가 되기 위해 총력을 기울이는 이상 더 중요한 과제는 없다.

4. 교회의 최고의 헌장

바울은 오늘 본문의 바로 다음에 교회에서 사도, 예언자, 병 고치는 사람, 관리하는 사람 등으로 그 기능이 나뉘어 있음을 말하고, 서로 그 역할을 존중하라고 하면서 보다 더 귀중한 은혜의 선물을 열심히 사모하라고 한다. 그리고 그런 후에 저 유명한 '사랑의 찬가'를 부른다. 사랑이 없으면 그 따위 예언, 그 지식, 그 믿음, 아니 제 소유를 다 팔아 바친다 하기로, 아니 자기 몸을 내주어 불사르게 한다 해도 그게 도대체 무슨 값어치가 있느냐고 한다.

사랑! 이것이 바로 '나'와 '너'를 '우리'되게 하는 용광로다. 사랑 안에서 모든 것이 녹아 하나의 쇳물로 부어져 나온다. 사랑이라는 용광로는 큰 것, 작은 것, 미운 것, 예쁜 것, 싫은 것, 좋은 것 모두 함께 끌어 모아 하나의 쇳물로 만든다.

목사는 홀로 못한다. 설교도 혼자하는 게 아니다. 아니 '우리'가 하는 일이다. 신앙도 홀로 못지킨다. 우리로서만 지킬 수 있다. 우리는 이 '우리'안에 그리스도가 죽음에서 살아날 것을 믿는다.


| 성서의 맥 3 |
생명을 살리는 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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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고전 12, 12-27)
자유에의 길과 그리스도 (루가 4, 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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