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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서의 맥 2 |
우리와 함께 하는 예수
(한국신학연구소)
미래의 크리스마스
루가 2, 1-38

어릴 때의 크리스마스 추억은 아름답다. 그것은 축제 분위기 때문만이 아니라 교회가 전하는 크리스마스에 관련된 전설들이 황홀했기 때문이었기도 하다. 처녀 마리아가 외양간에서 어린아기 예수를 말구유에 눕혔는데, 별의 안내를 받은 동방의 현인들이 찾아와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드리는 장면(마태오), 들의 목자들이 천사의 찬양과 지시를 받고 어린아기 예수를 찾아 경배하는 장면(루가) 등은 참 아름다웠다. 그 반면에 어린이들의 학살, 어린아기의 이집트 피란(마태오) 등은 눈물겨웠다.

그러나 철저한 과학 시대에 사는 성인인 우리에게 이 전설은 무슨 의미가 있는가? 우리의 삶은 전설은 고사하고 어떤 추상적인 의미에 시간을 빼앗기는 것까지도 거부하고 있지 않는가?

성서의 탄생 설화 자체도 그것이 역사적인 사실임을 고집하려는 생각은 없다. 정말 이것을 역사적 사실로서 말하려면 왜 처녀탄생에 의미를 두면서 어린아기 예수를 혈연적으로 상관없는 요셉의 족보에 결부시켰을까? 동방의 현인들이 하느님에게 인도함을 받았다면 왜 새삼 아기 난 곳을 물어야 했을까? 또 천사가 마리아에게 아기를 낳을 것이라(미래)고 고지할 때 이미 요셉과 약혼한 처지에 남자를 모르는 데 이런 일이 어떻게 있을 수 있을까고 했으며, 세례자 요한의 부모와 마리아가 임신 때부터 그렇게 밀집한 관계에 있었는데(루가 1장) 그후 아무런 관련성도 전해지지 않았을까? 왜 어린아기 난 것을 목자들에게만 나타내 보이고 정작 베들레헴의 모든 사람들은 그들의 말을 듣고 비로소 그 사실에 놀랄까?

오늘의 성서학자들은 동방의 현인들의 경배는 아랍의 두사레스(Dusares) 제사에 근원된 것임을 밝히고 있다. 이 제사는 동정녀에게서 난 신의 탄생의 축제로서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리는 것으로 거행됐다. 목자의 경배는 메시아가 목자탑에서 탄생하리라는 타르굼에 나타난 유다적 대망에 연유했을 것이라고 한다. 성서분석의 결과는 루가 1장은 독립된 자료로서 첨부됐으며, 루가의 본 기사는 2장부터라는 사실을 입증하며, 루가가 전승 받은 자료는 "마리아는 해산한 날이 되어 첫 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였습니다. 여관에 그들이 들어갈 방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6-17)"며 그 위의 것은 루가가 결부시킨 것이라고 한다. 그러면 처녀탄생이란 사실을 전제할 필요는 없게 된다. 또 아우구스투스 황제 치하와 예수 탄생을 결부시킨 것은 역사적으로 맞지 않는다. 구레뇨가 시리아 총독으로 있을 때인 A.D.6년에 조세부과한 것 때문에 유다에는 유다스의 반란, 젤롯당의 독립투쟁이 생겼다는 것은 루가도 알고 있다(사도 5, 37). 호구조사는 그보다 14년전인 헤로데 대왕 치하였어야 하는데, 헤로데는 B.C.4년에 이미 죽었다.

또 종교사학은 그 당시에 처녀탄생 설화가 헬라와 이집트에 얼마든지 그 유형이 있음을 발견하고 있으며, 그 용어나 유형으로 보아 예수의 탄생설화는 유다적인 요소와 이방적(헬라, 이집트)인 요소가 뒤섞여 있음을 입증한다.

하여간 우리는 실제상으로도 이 성탄설화에 매여 있지도 않거니와 성서의 기사 자체도 그것을 강요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처음 기록된 마르코에도 또 요한에도 그러한 성탄 전설이 없으며, 바울의 편지를 위시한 그 어디에도 처녀탄생이나 그 밖의 전설을 전제하거나 보도하는 일이 없이도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신앙하는 데 지장을 받지 않는다.

그러면 우리는 어떤 마음으로 크리스마스를 맞이할까? 아직도 동심에 머물러 축제에 말려들까? 아니면 역사적으로 허구한 전설과 더불어 이를 거부해 버릴까?

스스로 믿지 않으면서도 전설을 사실처럼 넘겨버리는 것은 자기 기만이요, 하느님과 사람 앞에 가장 불성실한 태도이며, 그렇다고 사실만을 골라서 2천년 전의 그 때를 재생시킬 수도 없으며, 비록 있다고 해도 회고적인 감상 이상이 될 수 없다. 그렇다고 성탄절에 메시지를 비역사적인 기록이라고 내버려서도 안 된다. 까닭은 그 안에는 중요한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성탄설화는 역사적 서술이 그 목적이 아니다. 그것은 한 신념과 희망의 시(詩)이다.

마태오는 헤로데가 두 살 아래 어린이를 마구 학살하는 참상을 그린다. 이것은 이스라엘을 이끌 모세가 난 때의 정황과 꼭 같다. 악랄한 현실이다. 인류의 희망을 죽여버리는 악랄한 현실! 이것이 바로 예수를 죽인 현실이요, 그리고 이 전설을 낳게 한 처음 그리스도인들이 선 땅의 정황이었다. 어디서 구원이 올까? 지평선상에는 아무런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 희망이 있다면 그것은 인간의 역사 자체, 인간의 혈육에서 와질 수는 없다. 아니 그 희망은 하느님에게만 가능하다. 그래서 그가 우리와 함께할 때(임마누엘)만이 우리에게 구원이 있다. 이 하느님은 결코 인류의 유일한 희망의 순을 자르게 하지 않을 것이다. 사지(死地)에 버림받은 현실에 난 어린아기지만 하느님이 함께할 때 헤로데의 잔인성은 그를 죽이지 못한다. 아니 이 세계가 그를 십자가에 죽였어도 그를 죽음에 가두지 못했듯이, 그를 통해서 하느님은 우리 안에 계시다. 그러므로 우리의 희망은 결코 꺾이지 않는다. 그 최후의 구원의 때, 구원의 주는 꼭 오시고야 만다. 이제 올 것이다. 이러한 철저하게 산 신앙과 희망이 마태오의 탄생시에 충일되어 있다.

루가에는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주께서 기뻐하시는 사람들에게 평화로다"가 주제가 되어 있다. 여기는 자기 안에 아무런 가능성을 못 가졌기에 자기 체념과 더불어 전혀 새로운 것을 구하는 군상들로 싸여있다. 홀로 임신할 수 없는 동정녀, 남편이 있어도 임신할 수 없는 노녀(老女), 민족에게 소외된 천민 목자, 마치 그대로는 눈감고 죽을 수 없어 애타는 늙은 시므온, 일생 과부로서 죽음을 앞둔 84세의 안나, 이들은 모두 불가능 속에서 가능을 바라 마지 않는 자들이다. 그들은 이 땅위에서 부조리, 부정 불의에 시달려 있었기에 그 눈은 언제나 저 미래를 향해 있다. 마리아의 찬가와 사가랴의 예언은 이러한 상태를 대변한다.

주께서 여종의 천함을 돌보셨습니다.
주께서 그의 팔로 권능을 행하시고
마음이 교만한 사람들을 흩으셨고
제왕들의 권력을 낮추시고
낮은 사람들을 높이시고
주린 자들을 좋은 것으로 배부르게 하시고
부한 사람들을 빈손으로 떠나 보내셨도다.
우리는 원수들에게서 구원하시고
어두움 속과 죽음의 그늘 아래 사는 사람들에게 빛을 비추게 하시고
우리의 발을 평안한 길로 인도하시리로다.

또 시므온의 노래는 "주여 주께서 이제는 … 이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옵니다"라고 한다.

정말 첫 크리스마스는 이러한 사실을 갖다 주었던가, 처음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이러한 평화와 자유의 노래를 부를 수 있는 처지에 있었던가?

아니! 저들의 성탄의 시는 과거의 크리스마스를 추억하고 있지 않다. 저들은 아직의 불의와 부정, 절망적 상황에서 고투하고 있었다. 그러나 저들은 결코 절망 속에 주저앉지 않고 계속 미래를 향해 달리고 있었다. 저들은 십자가의 절망 속에서도 부활의 삶을 투시했다. 그 눈은 비천한 데서 난 어린아기 예수에게서 내일의 희망을 투시할 수 있게 했다.

그렇기에 이 성탄의 시는 과거의 크리스마스를 추억한 것이 아니라 이제 올 미래의 크리스마스를 기다리는 신앙의 노래이다. 그러기에 참 성탄축하는 과거를 기념하는 것이어서는 의미가 없다. 그것은 이제 올 미래의 크리스마스를 앞당겨하는 축제이어야 한다.


| 성서의 맥 2 |
우리와 함께 하는 예수
(한국신학연구소)
List of Articles
표지
 
제1부 메시아를 기다리며
때 (시편 39, 5-13)
진통하는 역사 (로마 8, 18-27)
밤이 오면 (로마 13 , 11-14)
아침을 기다리며 (로마 13, 11-14)
밤과 새벽의 분계선 (로마 13, 11-14)
당신의 나라가 임하소서 (루가 11, 2)
내가 속히 오리라 (묵시 22, 12-13)
마라나타 (묵시 22, 10-20)
성탄절에 보내는 글 (요한 1, 14)
미래의 크리스마스 (루가 2, 1-38)
 
제2부 넓은 문과 좁은 문
해방자 예수 (루가 4, 18-19)
우리는 모두 사찰당하고 있다 (마르 3, 1-6, 22)
"악마!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마르 5, 1-15)
분단의 극복 (요한 4, 21-23)
다 팔아 보화를 산다 (마태 13,44-46)
평화와 칼 (마태 10, 34-39)
좁은 문 넓은 문 (마태 7,13-14)
우리에게 일용할 배고픔을! (루가 11, 3)
기도의 사건화 (루가 18, 1-8)
인간봉화(人間峰火) (마르 8, 31-38)
"십자가를 지고"의 뜻 (마르 8, 34-38)
신의 침묵은 심판이다 (로마 1, 18-32)
복음의 전진 (필립 1, 12-18)
사건의 신학 (고후 11, 23-33)
 
제3부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
오늘의 그리스도 (마르 15, 27-37)
오늘을 사는 청년 예수 (마르 2, 15-17)
그리스도 (마르 8, 27-33)
우리를 지키시고 구해 주시는 이 (고후 1, 8-11)
새로운 존재 (요한 3, 1-12)
이제 다 끝났다 (요한 19, 28-34)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마태 6, 32-33)
예수 그리스도一세상의 생명 (로마 8, 18-28)
문 두드리는 소리 (묵시 3, 14-22)
어떤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인가? (고전 6,1-11)
권위와 행동 (루가 20, 8)
현존의 그리스도 (히브 13, 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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