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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서의 맥 1 |
구원에 이르는 길
(한국신학연구소)
신앙고백과 역사
신명 26, 5-9
 
1. 고백의 성격

고백! 사랑의 고백도 있고 죄의 고백도 있다. 성서를 문학의 유형으로 나눈다면 고백 문학이다. 그것은 하나님께 향한 신앙고백이다. 그런데 성서의 고백은 다음 몇 가지 특징을 갖고 있다.

첫째는 그것은 사랑의 고백처럼 사적(私的)인 것이 아니라 공동체적 고백이라는 것이다. 구약은 이스라엘 민족 공동체적 고백이다. 신앙은 그리스도 공동체적 고백이다. 신명기 26장 5-9절은 바로 민족 공동체적 고백이다. 이것은 계속 전승되어 대대로 고백되어 왔다. 신약은 전반적으로 고백적이라고 했지만, 특히 고백이 결정화된 것으로 최후 만찬에 대한 것. 부활에 대한 것 그리고 필립비서의 그리스도 찬가 등은 두드러진 공동체적 고백문이다. 이것들은 공동체와 더불어 공동체 앞에 공동체를 대표한 고백이다.

둘째는 성서의 고백의 성격이 역사적이라는 점이다. 하느님은 보이지 않으며 만질 수도 없다. 그런 이를 향한 신앙이니 그것은 비역사적이기 쉽다. 즉 "하느님을 믿습니다" 이런 식이다. 그런데 성서는 꼭 역사적 사건과 밀착된 사건을 일으키는 하느님을 고백한다. 역시 대표적인 것이 오늘의 본문이다. 그들의 조상이 본시 떠돌이였다는 것, 미개한 종족으로 애굽에 전입되었다가 점점 큰 종족이 되었다는 것, 그리고 마침내는 애굽의 박해를 받고 착취당하면서 비명을 울리는 노예생활을 했는데, 그들의 비명을 듣고 억센 손으로 그들을 구출해서 이 좋은 땅으로 인도하신 하느님이라는 것이다.

신약의 설교, 즉 고백의 모형이 사도행전에 존재하는데, 가령 사도행전 2장 23절이다: "여러분이 그를 불법한 자들의 손을 빌어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그를 하느님께서 죽음의 고통에서 풀어내어 다시 살리셨습니다."

여기서 '여러분'은 유대 지배층을 말하고, '불법자'는 로마제국이다. 이로써 이 두 세력을 함께 규탄한다. 이들이 야합해서 폭력으로 예수를 죽였다. 그러나 죽음은 최후라는 역사적 현실을 뒤엎고 하느님이 그를 살려 일으켰다고 한다. 이것은 낡은 역사의 종언과 새 역사의 출발에 대한 확신의 선언이요, 고백이다. 이런 전통 위에서 만들어진 이른바 사도신경은 단순히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다고 하지 않고, 그는 인간으로 태어나서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 십자가에 달려 죽으사 … 운운하므로 막연하게 죽었다고 하지 않고 로마제국의 앞잡이 빌라도의 손에 처형됐다고 한다.

2. 오늘의 신앙고백

우리는 신앙고백을 해야 한다. 오늘처럼 회의로 가득차고 또 도덕이나 윤리적 규범이 다 무너지고, 불의가 이른바 테크노크라시를 도구로 쓰며, 마음대로 조종하는 현장에 있기 때문에, 신앙고백을 분명히 하는 것은 자신을 위해서나 또 이 세계를 위해서도 중요하다. 여기서 명확한 고백은 자기입장의 천명이요, 또 세계에 향한 진리의 증언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신앙고백은 또한 역사적이어야 한다. 이것을 개인의 측면에서 그리고 공동체적 측면에서 생각해보자.

개인으로 우리가 바른 신앙고백을 위해서는 내가 어떻게 예수를 믿게 됐나? 내가 처음 믿을 때 어떤 내용의 신앙을 가졌나? 그때는 역사적으로 어떤 상황이었으며 어떤 다른 가능성이 있었나? 내가 내 생애를 통해서 이러저러한 죽음의 고비를 넘는 동안에 신앙이 나에게 무슨 역할을 했나? 오늘 나는 어디서 있나? 오늘의 나와 내가 처음 믿을 때와의 관계는 어떠한가? 이렇게 구체적으로 역사적 존재로서의 나의 생애와 밀착된 경험을 되살려서 오늘의 나의 신앙고백을 해 볼 필요가 있다. 가령 필립비서 3장 4절을 보면 바울은 그런 고백을 한다.

나는 육에 있어서도 신뢰할 만한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는 난 지 팔일 만에 할례를 받았고 이스라엘 민족으로서 벤야민 지파에 태어났고 히브리 사람중에 히브리 사람이며 율법에 있어서는 바리새파 사람이었고 열심에 있어서는 교회를 박해한 자이며 율법의 의에 있어서는 흠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내게 유익하던 것은 똥 같이 내버립니다.

그리고 고린도전서 15장 9절에서는 "나는 사도들 중에 가장 작은 사도며 나는 사도라고 불리울 만한 자격이 없습니다. 그것은 내가 교회를 박해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나는 하느님의 은혜로 지금의 내가 되었습니다"라고 한다. 또 갈라디아서 1장 13절에서는 "내가 전에 유대교 신자였을 때, 나는 하느님의 교회를 무자비하게 박해했고 그것을 아주 없애버리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려고 모태로부터 구별했다"고 고백한다.

3. 나의 사적 고백

나는 주간 내내 집에 연금되어 있으며, 분하고 억울한 생각을 달래면서 '내가 왜 오늘 이런 입장에 있게 됐나?' 하는 생각을 골똘히 했다. 그리고 그런 가운데서 나는 나의 신앙고백을 구체적으로 해 보았다.

나를 주축으로 사고하면 나는 언제나 지각생이요 실패자다. 그러나 나를 객체화하고 보면 내 생애에는 여러 차례 '기적' 같은 것도 있었지만, 동시에 모태로부터 나를 선택했다는 바울의 고백을 할 수밖에 없다. 국민학교 4학년 때 교장을 내쫓으려고 선봉에 섰다가 다른 두 소년과 함께 퇴학을 당했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80리나 먼 곳, 적은 상가(商街)로 갔다. 그 곳에서 처음 교회를 보았다. 낯선 고장에 홀로 간 촌뜨기가 공원 광장에서 낯모르는 소년들과 어울려 공을 차다가 그들에게 적발됐는데, 그들은 한 교회의 소년회원들이었다. 이들이 교회 마당으로 안내했을 때 나는 여기가 무엇을 하는 곳인지 물었고, 그들은 이곳은 예수를 믿는 곳이며, 예수를 믿으면 첩도 안 되고, 술도 마시면 안 된다고 했다. 바로 이 두 조건이 내 아버지에 대한 반항심의 이유였기에 대뜸 입회하기로 결심했다. 그것은 그리스도교의 길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사양길에 들어선 유교적 폐습 속에 몰락되어가는 안씨 집안에서 탈출의 계기를 의미했다. 그 때 나의 운명은 급선회한 셈이다. 내가 만일 어거스틴 같이 고백한다면 그 소년들을 하느님께서 내게 보낸 천사들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아버지와 산 채로 결별하고 한사코 미션계 중학에 입학했다. 이 당시에 간도의 교회의 목사들은 즐겨 자기 민족을 구출한 모세 이야기를 극적으로 얘기했고, 성탄에는 그 내용을 연극으로 상연했다. 에스더의 이야기도 자기 역사의 이야기처럼 말했다. 새벽기도회에 그 삼엄한 일제 탄압 속에서도 "이스라엘을 구할 때가 이때입니까?"로 독립을 희구하는 기도 소리를 들었다. 모르는 동안 그리스도교를 통해 나는 민족의식의 훈련을 받았다. 그래서 여기서 배운 애국가를 외워갔고 한동안 수업시간 한 시간 전에 내 반 교실에 급우들을 오게 해서 이 애국가를 배워주며 함께 부르다가 울어버린 에피소드도 있다. 나는 이러한 것이 저항 정신이라는 것도 몰랐고, 또 누가 일러주지도 않았다. 또 교회의 목사들도 모세의 얘기를 자기들 얘기처럼 반복하면서도 자신들이 독립운동가라는 생각도 한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그렇게 한 것이 한국 그리스도인의 성격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매개가 됐다. 학교 공부는 뒷전으로 하고 야학, 주일학교 그리고 시골에 가서 교회 개척하고, 소년 소녀들을 모아서 그들과 주야로 어울려 살고, 야학을 계속하며 그들에게 소년의 정열을 쏟게 한 것도 나의 길을 앞당겨 보여 준 것이다. 이렇게 더듬어 생각하여 생애를 현장에까지 끌고 오다가 보니, 결국 나는 그의 손에 잡혀 있었고 "나는 나를 잡은 그의 손을 잡으려고 애쓴 것이 나의 생이다"라는 바울의 고백을 그대로 하게 됐다. 하여간 자기를 성찰하면 바울의 말대로 "감히 사도라고 할 수 없다." 나는 성격적으로 결함도 많거니와 결코 용감하지도 못하다. 그러나 난 무서워하지 않는다. 나는 이 민족에게 보냄 받은 자로서 계속 감옥에 들어가더라도 내 갈 길, 내 할 말, 나의 신앙고백을 후퇴시키지는 않으리라. 이런 표현은 바로 나를 역사적으로 성찰하다가 하느님께 기도로 아뢴 신앙고백이다.

여러분은 각기 자기 고유의 길을 걸어왔다. 이제 자기의 생을 성찰하면서 진정한 신앙고백을 만들고 그것을 외워보자. 그리고 그 앞에 자신을 고발하고, 또 이 땅의 불의와 싸울 자세를 갖추어야 한다.

자신에게 진실하라! 그럼 이기주의로 위장한 자신을 그대로 용서하지 않으리라.

4. 오늘의 공동체적 고백

신앙고백은 공동체적이며 역사적이어야 한다고 했다. 우리는 교회라는 공동체의 일원이다. 그러나 우리는 동시에 이 수난의 민족공동체의 일원이다. 일제 시대에서부터 1965년까지 민족공동체의 일원임을 포기하다시피 한 것이 한국 교회의 걸음이다. 그래서 이 민족에게서 소외되었고, 이 민족 안에 있으면서 교회는 유기적 관계에 서지 못하고 군살덩이같이 한데 붙어 있으나 통하지 않는 이질체와 같았다.

그러나 65년 한일 국교정상화를 이 정부가 강행할 때 전 교회적으로 일어나서 역시 민족의 일원으로 민족의 운명을 걱정하는 교회의 모습을 처음 보였고, 70년대에 접어들면서 민족을 일부 독점계급 형성으로 분열시키며, 이 체제를 영구화하려는 데 분노하여 일어서기 시작한 것이다.

일제의 침략과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인 것은 직접적인 함수 관계가 있다. 조선 시대에 쇠잔한 왕국이 일제에 짓밟혀도 꿈틀거리지도 못할 때, 그리스도교의 전파는 글자 그대로 복음이어서 그리로 몰려 들되, 특히 민중들이 중추를 이룬 것은 그들의 속에 사무친 모든 울분과 또 주인이면서 주인되어 보지 못한 자기 조국에 대한 어떤 집념이 큰 작용을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일제 50년간에 한국의 그리스도교는 자라왔으며 나라를 위해 많은 피의 제물을 바쳐왔다.

비록 분단 상태로라도 그렇게 그리워하던 내 나라를 도로 찾았는데 어떻게 이 나라를 어떤 불의한 집단에게 내맡길 수 있는가! 어떻게 이 민족의 구성원으로 주체가 되어야 할 우리 민중이 객체가 되어 이리 끌리고 저리 끌려야만 하며, 이 민족의 운명을 좌우하는 집권자 선출에 국민으로서의 우리는 강 건너 불구경하듯 멀리 바라다만 보아야 하는 처지에까지 이르렀나? 나라의 운명을 위해 바른 말 한마디, 한 장의 글을 썼다고 5년, 10년 죄수로 때려 가두는 법을 법이라고 하는, 그래서 수많은 청년 학생들이 투옥된 것을 위해서 기도하고 석방하라는 기도회는 원수시하는 이런 현장을 외면하고 우리에게 신앙 고백이 어떻게 가능한가? 아니, 우리의 신앙고백은 이 민족의 역사와 밀착된 하느님의 역사에 대한 것이어야 한다. 이 말은 우리는 이 민족과 더불어 운명을 같이 하도록 보냄을 받았다는 것이다.


| 성서의 맥 1 |
구원에 이르는 길
(한국신학연구소)
List of Articles
표지
 
제1부 절망 속의 희망
실락원 (창세 2-3장)
종주권과 민중의 투쟁 (창세 4, 1-16)
카인의 후예 (창세 4, 1-26)
아브라함과 종주권 (창세 16, 3-12)
종주권에 도전한 민중 야곱 (창세 25, 19-24)
야곱의 후예와 종주권 (창세 37, 1-11)
탈-향(脫-向)의 인간사 (창세 12, 1.7)
절망 속의 희망 (창세 22, 1-13)
   
제2부 지성소
바벨탑 (창세 11, 1-9)
의인 열 사람만 있어도 (창세 18, 22-33)
지성소(至聖所) (출애 3, 5)
나는 나다 (출애 3, 13-15)
탈향(脫向)의 기수 (출애 3, 7-10)
지평선 너머 (신명 32, 48-52)
   
제3부 최후의 소원
역사의 행렬 (신명 32, 48-52)
고대 이스라엘 종족 동맹 (사사 5, 1-8)
신앙고백과 역사 (신명 26, 5-9)
최후의 소원 (판관 16, 28-31)
믿음의 조상 (히브 11, 17-19)
히브리적 비극 (욥기, 23, 1-9)
민족사적 고백 (신명 26, 5-9)
   
제4부 남은자의 믿음
다윗 왕권의 죄 (삼상 8, 4-18)
불의의 온상 (삼상 12, 7-14)
절대 권력은 절대 악이다 (열상 11, 1-13)
바알 세력과의 투쟁 (열상 18, 17-24)
바알 (열상 19, 18)
남은 칠천 명 (19, 7-18)
민중의 손으로 통일되는 날 (아모 9, 11-15)
겨울은 가고 (에제 37장)
에제키엘이 무등산에서 절규한다 (에제 24, 6-8)
포로에서의 탈출 (이사 66, 1-8)
위정자와의 대결 (이사 7, 10-14)
   
제5부 새로운 존재
일상성과 비일상성 (루가 10, 38-42)
그래도 다시 낙원에로 환원시키지 않았다 (창세 3, 1-10)
새로운 인간상 (창세 12, 1-9)
믿음의 조상 (창세 22, 17-18)
두 사이 에 손을 얹을 판결자 (욥기 9, 25-35)
하느님으로부터의 도피 (시편 139편)
하느님의 웃음 (시편 2편)
잠과 신앙 (시편 127편)
교회란 무엇인가 (로마 8, 9-30)
인간을 말한다 (마르 12, 28-34)
존재 근거 (시편 42편)
우주의 품으로 (시편 8,3 이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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