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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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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서의 맥 1 |
구원에 이르는 길
(한국신학연구소)
그래도 다시 낙원에로 환원시키지 않았다
창세 3, 1-10, 22-24
 

낙원과 실락원 얘기 중 특히 실락원 이야기는 하느님을 야훼라고 부르는 신앙공동체의 문서로서 인간 문제를 여러 각도로 묻고 그 대답을 찾고 있다. 이 짧은 글에서 그 내용을 다 표현하기란 어렵다. 이 이야기에서 제기된 문제를 대개 다음 몇 가지로 간추려 볼 수 있을 것이다.

첫째는 고난의 문제다. 남자는 왜 밤낮 땀흘려 노동해야 하나? 왜 여자는 생명을 잉태하는 큰 일을 담당하고도 그처럼 고통스러운 해산의 수고를 해야 하나? 이 물음과 관련된 것으로 왜 노동의 터전인 땅은 수없는 잡초와 잡목을 내어 농사하는 일을 어렵게만 하나? 왜 여자는 해산의 수고를 하는데도 남녀에게 그 원인이 되는 정욕(그리움)을 주었나?하는 물음도 따른다.

둘째, 악의 문제다. 왜 원하는 선 대신 악을 행하게 되는가? 하느님은 선이라는데 악은 도대체 어디서 오나? 내가 왜 '있는 그대로의 나'를 그대로 내놓는 것을 부끄러워 하나? 그것은 무엇인가 부끄러운 것을 지닌 증거 아닌가? 내가 의복으로 몸을 가리듯 나를 위장하는 것도 바로 가리려는 행위 아닌가?

셋째, 왜 나는 언제나 안절부절하나? 내게 도사리고 있는 이 불안은 어디서 오는가? 나는 정착을 못하지 않나! 왜 고향을 그리워하면서도 고향에서 도망하고, 하느님의 품을 그리워하면서도 그가 공포의 대상이 되나?

넷째, 왜 너와의 관계에서 언제나 긴장이 있고 충돌이 있나? 나는 홀로 못 산다. 그래서 더불어 살 상대를 찾는다. 그러나 더불어 삶과 더불어 충돌이 된다(결혼을 그렇게 원해서 이루었는데 이렇게 비극의 연속인가?)

다섯째, 왜 사람은 죽어야 하나? 결국 죽음을 향해 가는 게 삶이 아닌가?

이런 질문은 이 창세 이야기에서 끌어낼 수 있지만 여러분이 제기한 문제이기도 하다. 그 밖에도 더 있을 수 있는데 한마디로 종합 하면 '내'가 도대체 무엇인가? 산다는 게 무엇인가? 하는 인간 존재 문제이다. '존재'의 문제이기에, 그 점에서는 다른 생물과 다를 바 없으나 인간의 '존재'가 다른 것은 바로 인간은 이 '존재'를 묻기 때문에 다르다.

당신은 이런 물음을 하고 있고 나름대로 어떤 대답을 갖고 있을 터인데 그 대답을 바로 이 창세 이야기에서 찾자는 것이다. 성서는 어떻게 대답하나? 결론부터 말하면 '관계'에 이상이 생긴 탓이라는 것이다.

1. 깨어진 관계

먼저 실락원 이야기를 더듬어 가며 어떤 관계가 어떻게 금이 갔는지를 보기로 하자.

낙원의 특징은 관계의 조화에 있다고 하겠다. 자연과 인간, 인간과 인간, 그 외 그 모든 것을 감싸는 하느님과 사람의 관계가 글자 그대로 자연스럽게 물흐르듯 흐르는 현실. 모든 것은 다 허락되었다. 허락되었다기보다 거기 아무런 인위적인 노력이 필요 없었다. 그런데 그런 관계가 자연스럽게 되는 데는 하나의 조건이 있었다. 그것은 모든 것이 허락된 그 동산 가운데 '선악과'라는 나무가 있는데 그것만은 손을 대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절대 자유가 낙원의 본질일텐데 그 자유가 있기 위해서는 절대 금기가 지켜져야 한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아담의 동반자인 하와가 이 금기를 거역함과 더불어 낙원은 무너진다.

그 이야기는 다음과 같이 전개된다. 뱀이 나타나 그 나무의 열매를 만지지도 말고 먹지도 말라는 이유를 따지면서 그건 자유를 구속한 것이라며 너는 절대 자유를 누릴 권리가 있다고 한다. '절대 자유.' 이것은 절대자만이 가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 유혹자는 그 열매를 먹으면 너는 바로 절대 자유할 수 있는 신 자체가 될 수 있다고 하고 사라졌다. 그 뱀이 무엇인지를 많이 생각할 필요는 없다. 잠깐 고개를 든 또 하나의 자기일 수 있다. 그 '나'가 스스로 유아독존이 되고 싶은 유혹에 잠겼는지 모른다. 하여간 그 뱀은 하나의 엉뚱한 '착상'이라는 알을 낳고 영원히 사라졌다.

이렇게 스쳐가듯 한 착상이라는 말이 감각을 통해 부화했다. 이 이야기꾼은 그 열매를 보니 탐스러웠다고 한다. 하여간 그는 그 열매를 따먹었다. 이와 더불어 어린애기 같은 순진성은 없어졌다. 그의 눈이 밝아졌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책임이 안겨지는 순간이었다. 그는 그의 동반자를 끌어들였다. 자기와 같은 숙명 속에 끌어넣으려는 계산에서 나온 지혜다. 물귀신 작전이라고나 할까. 그것은 책임의 분담을 위해서일 수도 있고, 벌써 자기의 실수를 의식했기에 그래도 동반자로 붙잡아 두기 위한 방법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자기 분열의 순간이었다. 그는 갑자기 벌거벗은 것이 부끄러워졌다. 둘이 되어 구경하는 나(主格)와 구경시키는 나(客格)로 나뉘어졌기 때문이리라. 그래서 나뭇잎으로 벗은 몸을 가리고 숲 속에 숨는다. 왜? 왜 부끄러울까? 왜 나로서 정정당당하지 못한가? 왜 하느님을 피해야 할까? 왜 한몸이 네 탓이다, 내 탓이다 책임전가하는 분열이 생길까? 이게 관계의 분열을 말하는 것이다.

하여간 이로써 '문제의 세계'의 문이 활짝 열렸다. 이제부터 연속되는 문제 속에서 계속 고투하며 결단으로 그때그때의 문제에서 벌어지는 슬픔과 책임지는 수고의 길로 들어섰다. 아담(하와)은 신이 될 수 없었다. 그 대신 분열이 왔다. 하나가 둘이 된 채 여자는 아이를 낳아 후손을 잇는 책임을, 아담은 죽는 날까지 가정 전체를 책임 지기 위해 즐거움이어야 할 것이 고통이 된 노동을 책임져야 했다. 그 분열의 역사는 마침내 구체적 결과를 가져 온다. 카인과 아벨은 한몸에서 났으나 이미 깨진 관계인데, 질투로 카인은 그 형제 아벨을 죽인다. 아담은 신이 되겠다고 하다 실락원했는데, 카인은 신을 독점하려는 경쟁을 벌이다가 살인을 했다.

이상은 하나의 신화인가? 그러나 그것은 깊이 그리고 오래 경험한 인간을 말한다. 어린애기 때는 낙원이다. 어머니 품이 곧 낙원이다. 그 품이 바로 자유다. 그는 자기 분열도 없고 책임도 없다. 단 하나 조건은 엄마품을 떠나지 않는 것이다. 소년기가 되면 문제가 생긴다. 어머니가 하지 말라는 금령이 그것이다. 왜 하지 말라는 것인가? 바로 그렇기 때문에 호기심이 더해 간다. 그러다가 한 착상이 생긴다. 내 마음대로 해봤으면! 바로 '하지 말라'는 그것을 해봤으면!! 해보자! 그러면 나는 어른이 된다!

성(性)을 느낀다. 탐스럽다. 무엇보다 요구되는 것은 자유다. 결국 성을 따먹는다. 눈이 밝아진다. 가리워져 있던 삶의 비밀이 한꺼번에 시야에 들어온다. 그런데 이상하게 수치스러움이 엄습한다. 그로부터 자기는 단순한 존재가 아니고 여자와 남자가 되며, 그때부터 부끄러움은 더해 가고, 그와 더불어 자기 위장이 시작된다. 이 때는 벌써 엄마품은 낙원이 아니다. 자기 분열과 책임의식이 뒤따른다. 이렇게 인생이라는 역사는 시작된다. 홀로 서야 할 인생의 역사가! 그러나 쉬지 않고 투쟁해야 하는 역사가! 아내가 되고 남편이 되고, 자식을 낳으므로 엄마가 되고 아빠가 되고. 책임과 더불어 문제는 증폭된다.

2. 무엇이 선악과인가?

하느님처럼 눈이 밝아지기 위해, 하느님을 내 것으로 하기 위해 선악과를 따먹었다. 그러나 하느님은 공(公)으로 존재할 때만이 하느님이다. 그러므로 누구의 사유물이 될 수 없다. 그는 어디까지나 公有의 대상이다. 그것은 모든 것 위에, 모든 것을 위해 있을 때 하느님이다. 그런데 아담은 그를 제 것으로 하려고 한 것이다. 이것이 분열의 원인이다. 독점욕은 분열의 원인이다. 자연이든, 성이든 그것은 모두 사유물이어서는 안된다. '공'이 공으로 있을 때만이 낙원이 있다. 거기에 자유가 있고 조화가 있으며, 사랑과 평화가 있다.

그러나 '공'이 있다는 것은 인간은 제한적 존재로 창조됐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제한이 없으면 자유는 문란이 되고 또 인간이란 존재는 증발한다. 그리고 구체적인 것을 인식할 수 없다. 그러므로 자주적일 수도 없다. 인간은 천사도 악마도 아니다. 그러므로 무한한 선도 무한한 악도 아니다. 언제나 두 가능성 사이에서 선택함으로 자기를 찾도록 만들어졌다.

아담이 '공'을 사유화함으로 인간의 긴 역사는 시작됐다. 아담과 하와가 분열된 결과 카인이 아벨을 죽이는 살인이 일어나고, 그후 인간의 역사는 결국 살육의 역사를 전개했다. 그 살육의 이유는 하나 같이 '공'을 사유하겠다는 욕구 때문이다. 개인으로 보면 질투/ 증오/ 살인, 그것이 집단화되면 약탈/ 전쟁이 된다. 그래서 인간 역사는 바로 전쟁의 역사이기도 하다. 지금도 이런 역사는 계속된다. 전쟁의 비극은 영원히 없어져야 한다고 모두 공감하면서도, 전쟁이 얼마나 처참한 비극인지 알면서도, 어느 누구도 전쟁을 막지 못했다. 아니 그것은 언제든지 그것으로 인해 얻을 것이 생기는 이익집단에 의해 찬성/지지되어 왔다. 사유화를 권리로 전제하는 한 이것은 막을 수 없는 현상이다.

도대체 네 땅이 어디 있느냐? 누가 그어 준 네 소유의 영역이냐? 결국 뺐은 것이지! 우리들은 백인들이 아메리카 대륙을 점유하던 약탈과정을 통해 가장 대표적 표본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저들이 원주민을 어떻게 학살했나! 그리고 백인 사이에 얼마나 치열한 전쟁을 계속했나. 그리고 부자가 된 계층은 권총잡이들을 고용해서 어디고 점유하고 마음대로 경계선을 치고 말뚝을 박기만 하면 자기 것이 되지 않았나? 그런 것이 이런저런 과정을 거쳐 국가임을 선포하고, 하나하나 보다 약한 집단을 잠식해서 큰 나라를 이루고, 그 다음 단계로 식민지 전쟁을 펴서 세계의 재산을 빼앗아 들여 부국이 되지 않았나! 그리고 국경을 만들고 그것을 지키기 위해 살인무기 제조의 선구가 되지 않았나! 이렇게 성장한 것이 대국이며 그것이 한마디로 폭력에 의한 독점 집단이다. 바로 그것을 지키기 위해 세계에서 가장 엄중한 국경을 만든 것이다. 오늘의 국가라는 영역을 형성하는 국경이란 바로 공을 사유화한 가시철망이다. 그것은 결국 하느님의 것, 그의 금기를 거슬러 제 것으로 삼은 것이다.

3. 사람아! 네가 어디 있느냐?

이것은 금기를 어기고 숨은 사람(아담)에게 묻는 질문이다. 물론 이것이 공간적 장소를 묻는 것은 아니다. 네가 너와 어떤 관계에 있느냐, 너가 나와 어떤 관계에 있느냐라는 물음이다. 사람은 "내 벌거벗은 것이 부끄럽고 또 당신이 두려워 숨었습니다"고 대답한다. "누가 그런 것을 알려주더냐?" 하는 되물음에 아담은 하와에게, 하와는 뱀에게 책임을 전가한다.

아담이 지금 어디 있나? 자기가 자기에게 부끄러운 상태며, 나와 너와의 균열이 생기고, 하느님과의 관계가 공포의 대상이 되고, 짐승과의 관계가 원수처럼 되었다. 실은 하느님의 그 다음의 조치로써 아담은 하와에게 해산의 고통을 주는 원인이 되고, 하와는 아담에게 노동이 고역이 되는 멍에를 씌우게 되고, 의지하고 살아야 할 대지와의 관계도 변질되어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나게 하여 경작해서 살아야 하는 네게 고통을 주는 원수 같은 관계가 될 것이며, 마침내 너는 죽음에 이르는 존재가 되리라고 한다.

"아담아 지금 네가 어디 있느냐?" 이것은 사람에게 계속 물어 오는 질문이다. 지금 우리는 어디 있나? 나는 나에게 어떤 관계가 있나? 가장 가깝다는 너와 네 남편 또 너와 네 아내와의 관계는 어떠하냐? 너희 자식들 사이는 어떠하냐? 너와 자연과의 관계는 어떠하냐? 이 질문에 우리는 무슨 대답을 할까? 처음 아담은 그 질문의 주체 앞에서 공포를 안았고, 자신이 벌거벗은 것을 부끄러워도 했지만, 지금 너는 그런 아담도 아니지 않느냐?

오늘의 너는 그런 질문을 듣지 않기 위해 적국의 전파를 방해하듯 전파 방해를 하고, 레이다 장치를 하듯 구조적인 장치를 해서 오늘 소리 듣는 귀를 막아 버리고 있지 않나? 인간과의 관계는 단 몇 분 만에 전체를 죽여 버릴 수 있는 무기를 만들어 서로 죽이고 협박하며 그것을 가장 중요한 수출품으로 하고 있지 않나? 지금 한쪽으로는 군비축소의 추파를 던지며 협상을 하면서, 살인무기 만드는 연구소, 제작소는 계속 보다 더 빠르고 보다 더 파괴력이 있어 잘 팔릴 무기제조 경쟁을 계속하고 있지 않나?

자연과의 관계는 정복 대상으로 삼고 파괴하다가 이제는 적대관계를 넘어서 자연과 인간이 함께 망해 버릴 수 있는 위기에까지 몰려와 있지 않나! 그런데도 날로 생산경쟁과 소비성만 늘려서 그런 운명을 재촉하고 있지 않나? 이 마당에 어떻게 이 물음에 대답할까! 더불어 살자는 절실한 절규로 인위적 혁명을 시도했으나 그것마저 일단 실패한 모습으로 노출되고 이기주의에 최대한 편승하여 '보다 더' '보다 많이' 독점하겠다는 체제가 점점 기승을 부리는 판이 지금의 아담 네가 있는 현장이 아니냐?

4. 그래도 다시 낙원에로 환원시키지 않았다

하느님은 창조자라는 신앙을 바탕에 깐 이 이야기꾼은 그러나 그 하느님이 아담의 의식을 다시 무로 돌리어 아무 일 없는 듯이 원상복구를 시도하지 않았다. 그것은 이미 잠이 깼으면 눈을 떠야 하고, 눈을 떴으면 일어나야 하며, 내디딘 길을 가야 한다는 뜻인가? 그는 대지가 아담에 의해서 저주받을 것이며, 뱀은 짐승 중에 가장 저주받은 존재가 될 것을 선언했어도, 아담이나 하와에게 저주하지는 않는다. 하기는 낙원 그대로 있었거나 복구했더라면 이런 이야기도 없었을 것이며 이런 문제제기도 없었으리라.

이 이야기꾼도 이미 저질러진 근원을 물은 것이요, 그가 말하는 그 하느님도 이미 시작된 인간 역사이니 그 다음의 가야 할 길을 가라고 했음이 틀림없다. 전과 달라진 것은 이제는 인간의 역사, 인간이 책임지는 역사가 시작되는 것이다. 이미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으니 그 앞에 어떤 어려움이 오더라도 그 길을 뚫고 가야 한다. 수 없이 곤두박질하면서도, 계속 시행착오를 해도 어느 길이 옳은지 자기의 희생을 통한 실험으로 안식해야 하고, 그때그때 잃음과 동시에 얻는 결단을 통해서 앞으로 나가야 한다.

그 길에서 어떤 고비를 넘으면 교만해져서 신마저 잊어버리기도 하고, 기진맥진하여 신을 원망도 해보고 하소연도 해보겠지. 그러나 어느 때 그는 마침내, 나의 하느님! 하고 탕자가 아버지에게 돌아오듯 돌아올 수도 있겠지. 지구를 몰아가 지구와 더불어 영영 심연에 빠져 사라지고 새로운 생물이 우주에 나타나 새 역사를 시작하게 되든지!?


| 성서의 맥 1 |
구원에 이르는 길
(한국신학연구소)
List of Articles
표지
 
제1부 절망 속의 희망
실락원 (창세 2-3장)
종주권과 민중의 투쟁 (창세 4, 1-16)
카인의 후예 (창세 4, 1-26)
아브라함과 종주권 (창세 16, 3-12)
종주권에 도전한 민중 야곱 (창세 25, 19-24)
야곱의 후예와 종주권 (창세 37, 1-11)
탈-향(脫-向)의 인간사 (창세 12, 1.7)
절망 속의 희망 (창세 22, 1-13)
   
제2부 지성소
바벨탑 (창세 11, 1-9)
의인 열 사람만 있어도 (창세 18, 22-33)
지성소(至聖所) (출애 3, 5)
나는 나다 (출애 3, 13-15)
탈향(脫向)의 기수 (출애 3, 7-10)
지평선 너머 (신명 32, 48-52)
   
제3부 최후의 소원
역사의 행렬 (신명 32, 48-52)
고대 이스라엘 종족 동맹 (사사 5, 1-8)
신앙고백과 역사 (신명 26, 5-9)
최후의 소원 (판관 16, 28-31)
믿음의 조상 (히브 11, 17-19)
히브리적 비극 (욥기, 23, 1-9)
민족사적 고백 (신명 26, 5-9)
   
제4부 남은자의 믿음
다윗 왕권의 죄 (삼상 8, 4-18)
불의의 온상 (삼상 12, 7-14)
절대 권력은 절대 악이다 (열상 11, 1-13)
바알 세력과의 투쟁 (열상 18, 17-24)
바알 (열상 19, 18)
남은 칠천 명 (19, 7-18)
민중의 손으로 통일되는 날 (아모 9, 11-15)
겨울은 가고 (에제 37장)
에제키엘이 무등산에서 절규한다 (에제 24, 6-8)
포로에서의 탈출 (이사 66, 1-8)
위정자와의 대결 (이사 7, 10-14)
   
제5부 새로운 존재
일상성과 비일상성 (루가 10, 38-42)
그래도 다시 낙원에로 환원시키지 않았다 (창세 3, 1-10)
새로운 인간상 (창세 12, 1-9)
믿음의 조상 (창세 22, 17-18)
두 사이 에 손을 얹을 판결자 (욥기 9, 25-35)
하느님으로부터의 도피 (시편 139편)
하느님의 웃음 (시편 2편)
잠과 신앙 (시편 127편)
교회란 무엇인가 (로마 8, 9-30)
인간을 말한다 (마르 12, 28-34)
존재 근거 (시편 42편)
우주의 품으로 (시편 8,3 이하)
   
판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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