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전집

전집은 OCR 스캔 잡업으로 진행되어 오탈자가 있습니다.
오탈자를 발견하면 다음과 같이 등록해 주시면 관리자가 수정하도록 하겠습니다.
1. 수정 요청을 하려면 로그인이 필요합니다.
2. 본문을 읽는 중에 오탈자가 있는 곳을 발견하면 앞뒤 텍스트와 함께 마우스로 선택합니다.
3. 그 상태에서 [오른쪽 마우스]를 클릭하여 나타나는 창에서 수정 후 [수정요청]을 클릭합니다.
4. 각주의 경우에는 각주 번호를 마우스오버하여 나타난 창을 클릭하면 수정요청 창이 열립니다.

※ 컴퓨터 브라우저에서만 가능합니다.
| 성서의 맥 1 |
구원에 이르는 길
(한국신학연구소)
새로운 인간상
– 아브라함 1
창세 12, 1-9
 
1. 두 인간형

아담은 하느님의 품에서 사는 생활에서 자기식대로 살려고 결국 하느님을 떠나서 제 힘으로 살 길을 선택했는데, 그와 동시에 그런 선택에 대한 모든 것을 책임져야 하는 길에 들어서게 됩니다. 가인도 자기 형제를 때려 죽이면서까지 자기중심적인 삶을 관철하려다가 정처없는 유랑의 길을 떠나야만 했습니다. 아담은 하느님과 경쟁하려고 하다가 유랑의 길로 쫓겨났고, 가인은 형제와 경쟁하려다가 쫓겨났습니다.

이렇게 시작된 역사는 혼란을 일으키고 암초에 걸렸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노아의 홍수로써 심판을 당했습니다. 한편 인류가 노아의 족속으로서 다시 출발하려고 할 때, 하느님은 저들에게 새로운 출발의 초석을 놓았습니다. 그것은 "생육하고 번성하라!"(창세 9, 1)는 새로운 언약이 그것입니다. 이 언약으로 새 출발하는 역사에서 새로운 인간상의 싹이 텄습니다. 그것이 바로 아브라함입니다.

아담이나 가인은 자기를 관철하고 제 힘으로 살려고한 인간형입니다. 제 설계, 제 목표를 갖고 살며, 현대적으로 말하면 생존경쟁 마당에서 나 중심의 세계를 형성하려는 타입입니다. 하느님은 이들을 저주하지 않았습니다. 또 그 길을 되돌이키게 하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하느님은 그저 저들에게 그 길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리며, 그 길 그대로 가게 합니다. 즉 자기 권리를 주장하는 것을 그대로 허락하나 그것에 따르는 의무를 알라는 것 뿐입니다. 이에 대해서 아브라함은 믿음의 사람입니다. 내 설계, 내 목표를 뛰어넘어서 하느님의 설계, 그의 목표에 자기를 내맡기는 타입입니다.

이 두 타입은 다 '산다'는 것은 알 수 없는 미래를 향해서 나아가고 있는 데에 있어서는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는 자기의 미래를 자기 힘으로, 지혜 또는 폭력으로 미래와 지금의 나 사이에 완충지대를 만들어가면서 미래를 정복해 보려는 데 대해서, 다른 하나는 미래에 나를 내맡기면서 미래에 직접 뛰어드는 모험의 타입입니다. 하나는 현재 가지고 있는 것으로 자기를 무장해서 이것을 미래에도 연장해 보려는 데 대해서, 다른 하나는 현재를 완전히 포기함으로써 아주 새 것으로서의 미래와 마주섭니다. 그럼으로써 하나에게는 미래는 새 것이 아니고 현재의 연속 연장이고, 다른 하나에게는 미래는 순수한 새로운 가능성입니다. 또 하나는 나를 형성하고 미래를 내게 적응시키려고 하는데 대해서, 다른 하나는 미래를 엄숙한 현실로 그대로 받아 들임으로써 그것에 알맞는 '나'를 형성하려고 합니다.

2. 미래를 향한 두 형태

어떤 사람이 미지의 세계로 탐험을 떠납니다. 그는 주도면밀하게 계획을 세웁니다. 그는 미지의 세계로 가는데 우선 먼저 그가 가기 전에 선발대를 보냅니다. 그리고 그는 선발대를 기다립니다. 잠시 후 선발대가 돌아옵니다. 이 선발대를 통해서 이제 갈 미지의 세계의 지형을 알고, 물이 어떻게 흐르고, 무슨 초목들과 무슨 짐승들이 있고, 어떤 족속들이 살고 있고, 또 거기까지 며칠이 걸리며, 무엇을 더 준비해야 하는 지를 다 묻고, 그리고 거기에 해당한 것을 준비하고, 그리고 거기를 향해 떠납니다. 그 때 거기는 가 본 일은 없는 곳이지만 이미 미지의 세계는 아닙니다. 그는 벌써 그 곳에 대한 예비 지식을 충분히 얻었습니다. 무엇을 볼 때마다 '이것이 바로 그것이구나!' 합니다. 또는 '이것은 내가 생각했던 것과 다르지 않나!'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또 다른 탐험가는 선발대도 보내지 않고, 또 무엇을 준비하지도 않고 그대로 돌진합니다. 그것은 확실히 모험입니다. 그는 동화 속에 나오는 어떤 미지의 궁전에 발을 옮기듯 전혀 미지의 세계에로 향하는 문을 하나하나 열면서 전혀 새 것에 접합니다. 그에게는 마주 서는 것마다 전혀 미지의 새 세계입니다. 그는 그렇게 전진하면서 두려워도하고, 환희도 올립니다. 그는 손에 든 것이 없습니다. 오직 그는 미지의 세계에서 구할 수 있는 것으로 충족하면서 나아갑니다. 그것은 확실히 모험입니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미래는 순수한 새 세계로 체험됩니다. 아브라함은 바로 후자의 경우와 같습니다.

3. 탈출

너는 너의 본토와 친척과 아비집을 떠나라!(창세 12, 1)

아브라함은 제 고향 그리고 더 좁혀서 자기 혈육의 종족 그리고 아비의 집을 다 버립니다. 이것은 자연적인 관계, 지금까지의 인연된 관계를 일체 다 청산하고 거기서 놓여남을 의미합니다.

이 창세기 기자가 이것을 쓸 때는 지금의 경우와는 다릅니다. 제 고향, 제 혈육 그리고 가정이란 삶의 단위입니다. 그렇게 결속해야 살고, 또 다른 족속과의 관계에서도 그렇게 결속해야 자기 삶을 유지합니다. 그것은 자기 생명을 보호하는 유일한 방위체입니다. 그렇기에 그 공동체에서 내쫓겨난다는 말은 죽음을 의미했습니다. 아브라함은 바로 이 생명의 근거와 같은 이 공동체를 버리고 떠나야 합니다. 여호와가 바로 이것을 명령합니다. 새로운, 정말 글자 그대로 새로운 가능성으로서의 미래를 받아들이려면 일체 지금까지의 자기를 보장한 것에서 놓여나야 된다는 것입니다. 어떤 보장이라도 지니고, 거기 의지하는 한 믿음에로의 출발은 불가능합니다.

불교에서 출가는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과거의 어떤 미련도 끊어야 한다는 진실을 행동으로 실행하는 것입니다. 아들이 출가하는 길이 성공하게 하기 위해 아버지가 집에 불을 질러버렸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것은 아들이 가질지도 모르는 집에 대한 미련을 철저히 끊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이것과 차이는 불교의 경우는 도를 닦기 위함이라는 목표 때문인데 대해서, 아브라함의 경우는 새로운 삶을 위해, 즉 믿음으로써만의 삶을 위해서입니다.

이러한 철저한 요구는 예수에게 있어서도 그랬습니다.

너희가 나를 따르려거든 부모, 친척, 처자, 자기까지도 부인하라(루가 14, 26).

이 말은, 즉 네가 오고 있는 하느님, 미래로서의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려면 자연적인 인연의 줄에서 뛰쳐 나오라는 말입니다. 예수는 이러한 뜻으로 여러가지 말들을 했습니다.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않다(루가 9, 62).

죽은 자는 죽은 자로 장례케 하고 너는 나와 전진하자(루가 9, 60).

믿음은 내 지금까지의 보장을 버리는 것입니다.

4.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창세 12, 1)

아브라함은 이렇게 모험의 길로 떠나면서 자기 계획을 갖고 떠나지 않는다. 그저 떠나라는 소리에 무조건 자기를 맡기고 떠납니다. 이제는 자기운명은 자기 손에서 완전히 놓아주고, 그저 지시하는대로 갈 판입니다. 그는 지시할 이의 청사진도 갖고 있지 않습니다. '지시한 땅'이 아니라 '지시할 땅'입니다. 사실 목적지가 어디인지 본문에는 전혀 명기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는 무엇이 앞에 올지 전혀 모릅니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인도하는 자와 떨어져서는 성립될 수 없는 삶의 길입니다. 만약 계획서가 주어졌다면 그가 마주 선 것은 그 계획서일 것이고, 그러는 한 새로운 가능성은 아닐 것입니다. '언제, 어떻게, 어디로 가느냐?' 알려주지도 않거니와, 묻지도 않고 떠납니다.

이것은 마치 등산가와 안내자의 관계처럼 보입니다. 높은 산에 오르려는 등산가에게는 반드시 좋은 안내자가 있어야만 합니다. 그 안내인이 "내가 곧 길이요! 나만 따라 오시오!"라고 하고 등산인은 그 안내인이 걸어가는 길을 되밟아가면서 산에 오릅니다. 이렇게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으로 들어섭니다. 가나안 족속은 포악하기로 유명했습니다. 그 곳이 정착지인가 했더니 거기도 아닙니다. 그 길을 통과해서 세겜 땅 모레의 상수리나무 있는 곳에 이릅니다. 이 곳은 이방종교의 거점이면서 순례지로 유명한 곳이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지시대로 고향과 친족을 떠난 그는 졸지에 이방인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구약성서는 아브라함을 '나그네'라고 반복합니다. 이방족속 속에, 이방종교의 한복판에 그는 그 길을 가야 합니다.

신앙의 길은 확실히 나그네의 길입니다. 이 역사 속에서 살면서, 이 역사에 속하지 않으며, 이 역사와 함께 흐르면서, 이 역사와 마주 서 있습니다. 그래서 신약에서도 그리스도인을 '나그네'로 표현합니다. 이 땅에 사나 이 땅이 본향이 아닙니다. 이 말은 이 땅에 내 삶의 거점을 두고 거기서 보장을 구하지 않고, 삶의 거점은 다른 데 두고 산다는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의 길에서는 불안이 제거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 이방종교의 한복판에서, 나그네의 길에서 제단을 쌓습니다. 성서는 여호와가 자기를 보여준 곳마다 거기 제단을 쌓았다고 합니다(창세 12, 8). 딴 말로 하면 내맡겨진 삶의 한 흔적을 표시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와 비교하면 종교적인 행위로써 교회를 건설하고 교리를 만들고 하는 것과 상통하는 것입니다. 교회란 제 본향에 세워진 하느님의 전(殿)이 아니라 바로 이방에 세워진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 제단에 머물러서 거기서 어떤 보장을 받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또 떠납니다. 제단은 여호와 자신은 아닙니다. 그가 그 자리에 머물러 있으면 여호와는 제2선에 물러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거기를 옮겨 베델과 아이 사이로 떠납니다. 여기도 순례지로 유명한데, 거기서 또 제단을 쌓고 그리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또 다시 동쪽인 네겝 땅으로 떠납니다(창세 12, 9).

5. 지시할 땅으로 가라!

예수도 하느님의 나라를 지시했습니다. 그리고 '가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말이 막연해서 유다인은 묻습니다. 언제, 어떻게? 그러나 예수는 하느님의 나라의 청사진을 제공하지 않습니다. 하느님 나라에 대한 아무런 묘사도 없습니다. 그 나라는 볼 수 있게, 즉 내 손에 잡히게 오는 게 아니라 언제, 또 어떻게 오는 게 아니라고 합니다. 이것은 딴 말로 하면 '오직 믿어라!'는 말입니다. 그때 그때 '지시하는 대로 하라! 오직 직접적인 하느님의 뜻에만 복종하라!'는 말인 것입니다. 그것은 참 믿음의 사람이 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막연히 그의 미래를 믿은 게 아닙니다. 그는 이 여호와의 약속을 믿습니다. 그의 미래는 아담이나 가인의 그것과는 다릅니다. 가인은 무턱대고 피해서 가는 길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약속을 믿고 가는 길입니다. 그것은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크게 하며 너는 복 자체가 되리라… 모든 족속이 너로 인해 복을 받으리라"(창세 12, 1-3)는 그 약속입니다. 이 축복은 아브라함에게만 다섯 번 반복되며 그 후 이삭, 야곱에게도 줄곧 반복됩니다.

약속을 믿고 갑니다. 그러나 그 약속이 어떻게 이루어질지는 전혀 막연합다. 세겜에 이르러서 '여기'인가 했더니 그 땅을 그 자손에게 준다고 하지 그에게 직접 준다고 하지 않습니다. 자손에게 준다는 데 그의 아내는 해산을 못합니다. 그러다 한 아이를 낳았는데 여호와는 그를 잡아서 제물로 바치라고 합니다. 이 약속은 그의 눈에서는 불가능하게 보이기 때문에 믿는 길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구속사의 시작입니다. 하느님의 구속은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역사로 믿는 것이 구속사적 믿음입니다. 불가능을 가능케 하기 때문에 전혀 새로운 가능성입니다. 가능성의 실현이 아닙니다. 그러면 새 것이 아닙니다. 불가능을 가능케 합니다. 그래서 새 것입니다.

6. 결론

우리가 사람인 한 아담적인 욕구가 있습니다. 눈이 밝아지고 싶습니다. 내가 기준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서 악과 선을 구별할 수 있습니다. 그래야 내일을 위한 설계를 할 수 있습니다. 내일을 위한 설계없이 나는 살 수 없습니다. 나는 경제질서, 자연법칙 안에서 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패배자입니다.

그러나 반면에 우리는 언제나 아주 새 것을 찾아 줄곧 안달합니다. 내게 주어진 가능성은 뻔합니다. 그래서 어떤 새로운 가능성을 줄곧 찾습니다. 그러나 내가 지금 이 시대에 아브라함같은 믿음으로만 살 수 있을까? 없다면? 그럼 아담과 같이 내가 내 눈이 밝아 내 설계 밑에서 내 힘으로 내 가능성 안에서만 살 수 있을까?

그러나 그렇게 아브라함의 삶은 불가능하다고 포기하는 순간 나는 누에가 둥지를 틀고 죽어버리 듯 이 현실에 갇혀서 질식하고 말 것입니다. 내 계획 속에서 하나하나 내일을 영위하는 것이 확실한 것 같으나 거기에 구원은 없습니다. 구원이란 참 삶의 구현이라는 말입니다. 지금의 나는 가진 것의 노예일 따름입니다.

나는 내 가진 일체에서 놓여나고 싶은가? 내가 내 가진 것에 노예가 되지 않고 주인이 되고 싶은가? 그 길은 믿음에서만 가능합니다. 믿음이란 하느님의 미래, 그가 주는 가능성을 믿는 것입니다. 현대철학의 시발자인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계보에 선 자는 "나는 믿는다. 고로 내가 있다"고 확신합니다.


| 성서의 맥 1 |
구원에 이르는 길
(한국신학연구소)
List of Articles
표지
 
제1부 절망 속의 희망
실락원 (창세 2-3장)
종주권과 민중의 투쟁 (창세 4, 1-16)
카인의 후예 (창세 4, 1-26)
아브라함과 종주권 (창세 16, 3-12)
종주권에 도전한 민중 야곱 (창세 25, 19-24)
야곱의 후예와 종주권 (창세 37, 1-11)
탈-향(脫-向)의 인간사 (창세 12, 1.7)
절망 속의 희망 (창세 22, 1-13)
   
제2부 지성소
바벨탑 (창세 11, 1-9)
의인 열 사람만 있어도 (창세 18, 22-33)
지성소(至聖所) (출애 3, 5)
나는 나다 (출애 3, 13-15)
탈향(脫向)의 기수 (출애 3, 7-10)
지평선 너머 (신명 32, 48-52)
   
제3부 최후의 소원
역사의 행렬 (신명 32, 48-52)
고대 이스라엘 종족 동맹 (사사 5, 1-8)
신앙고백과 역사 (신명 26, 5-9)
최후의 소원 (판관 16, 28-31)
믿음의 조상 (히브 11, 17-19)
히브리적 비극 (욥기, 23, 1-9)
민족사적 고백 (신명 26, 5-9)
   
제4부 남은자의 믿음
다윗 왕권의 죄 (삼상 8, 4-18)
불의의 온상 (삼상 12, 7-14)
절대 권력은 절대 악이다 (열상 11, 1-13)
바알 세력과의 투쟁 (열상 18, 17-24)
바알 (열상 19, 18)
남은 칠천 명 (19, 7-18)
민중의 손으로 통일되는 날 (아모 9, 11-15)
겨울은 가고 (에제 37장)
에제키엘이 무등산에서 절규한다 (에제 24, 6-8)
포로에서의 탈출 (이사 66, 1-8)
위정자와의 대결 (이사 7, 10-14)
   
제5부 새로운 존재
일상성과 비일상성 (루가 10, 38-42)
그래도 다시 낙원에로 환원시키지 않았다 (창세 3, 1-10)
새로운 인간상 (창세 12, 1-9)
믿음의 조상 (창세 22, 17-18)
두 사이 에 손을 얹을 판결자 (욥기 9, 25-35)
하느님으로부터의 도피 (시편 139편)
하느님의 웃음 (시편 2편)
잠과 신앙 (시편 127편)
교회란 무엇인가 (로마 8, 9-30)
인간을 말한다 (마르 12, 28-34)
존재 근거 (시편 42편)
우주의 품으로 (시편 8,3 이하)
   
판권
Board Pagination Prev 1 Next
/ 1
위로
텍스트를 수정한 후 아래 [수정요청] 버튼을 클릭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