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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서의 맥 1 |
구원에 이르는 길
(한국신학연구소)
인간을 말한다
마르 12, 28-34
 
1

나는 그리스도교의 입장에서 인간을 말하도록 되어 있다. 나에게 인간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할 수만 있다면 희랍적 아니면 불교적으로 대답하겠다. 그러나 성서를 통해서는 그러한 물음에 직접적인 대답을 할 수 없다. 인간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그것은 새삼 성서적인 대답을 기다릴 필요가 없이 존재론적인 분석으로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왜 인간은 '무엇이냐?' 라는 질문에 직접 대답할 수 없는가 하면 성서는 인간에 대한 이러한 질문에 대답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자신의 대답과 그것에 따르는 행동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성서는 인간을 설명하지 않고, 오직 인간으로서 결단할 뿐이다. 즉 성서에는 서술(Indikative)과 명령(Imperative)만 있을 뿐 관(觀, Anschaung)은 없다.

성서는 '인간아, 너는 무어냐?'고 묻지 않는다. 있다면 '너는 어디에 있느냐?'고 묻는다. '아담아 네가 어디에 있느냐?' 이 질문은 공간적인 위치를 묻거나 우주론적인 위치를 묻는 게 아니다. 희랍의 인간 이해는 우주론적인 위치를 물어서 얻어진 것이다. 우주는 무어냐? 법 또는 누스(nous)이다. 거기에는 질서가 있다. 그 한 부분으로서의 존재가 있다. 존재 중에는 동물계가 있고 동물계 중에는 척추동물, 그 중에 인간이라는 종족이 있다. 이 종족은 법 또는 누스를 지니고, 그것을 알고 있는 존재다. 그는 그것을 영원한 질서로 안다. 인간은 그 안에 자기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는 영원하다. 인간은 따라서 불멸의 영원한 존재다. 대우주(大宇宙)에 대해서 소우주(小宇宙)이다. 너는 대아(大我) 속의 소아(小我)다. 이제 너는 대아 속에 흡수될 존재라고 설명한다. 이것이 희랍 세계에서의 인간 이해다.

그러나 성서는 그러한 위치를 묻지 않는다. 아니, '너는 어디 있느냐?'는 역사적인 위치를 묻는 것이다. 즉, '너는 어떤 관계에 있느냐?' 하는 물음이다. 이것은 '너는 너 자신과 어떤 관계에 있느냐?' 또는 '너는 나(하느님)와 어떤 관계에 있느냐?' 또는 '너는 네 아우와 어떤 관계에 있느냐?'고 물어도 마찬가지이다. '너는 어디 있느냐?' 이것은 '너는 어떻게 실존하고 있느냐?' 하는 질문이다.

이 질문 밑에 있는 인간은 자신을 무엇으로 계속 가리고 있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이 질문에 인간(아담)은 정면으로 나는 여기 있다고 하지 못하고, 이 질문을 피해서 나뭇잎으로 자기를 가렸다. 그는 자기를 상실했다. 그 상실한 나를 자기 밖의 어떤 것들로서 보장받으려고 한다. 그럼으로써 그는 자기 자신과의 관계가 끊어졌다. 그와 동시에 하느님과 또는 이웃과의 관계가 끊어졌다. 그는 자기 과거에 몰입되어 밖으로부터 오고 있는 것과 관계가 차단되어 버렸다. 이것을 성서는 타락이라고 한다.

그러면 타락이 아닌 본래의 모습은 어떤 것인가? 그런 설명은 없다. 그 대신 성서는 인간에게 요구하는 것이 있다. 그 요구에서 인간의 참 모습을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성서의 요구를 요약하면 다음의 두 가지로 집약할 수 있겠다. '나를 믿으라'는 것과 '사랑하라'는 말이 그것이다. 인간은 관계적 존재다. 바울로는 이점을 밝혔다. 바울로는 소마(soma)라는 말을 쓴다. 소마는 '몸'으로 번역되어 있다. 우리는 '몸'이라고 하면 인간의 어느 한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즉 영 혹은 정신에 대한 육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렇게 이해하면 바울로의 소마와는 뜻이 다르다. 바울로의 소마라는 말은 사르크스(sarks)라는 말과는 구별된다. 소마란 곧 '나다'. 즉 인간이 소마다. 인간이 소마를 가진 것이 아니라 인간이 곧 몸이다. 그러나 바울로는 인간을 어떠한 경우에서나 몸이라는 말로 적용하는 것은 아니다. 즉, 이 말은 인간을 몸이라고 할 때는 하나의 분명한 측면에서 성격화한다는 말이다. 바울로가 인간을 몸이라고 할 때에는 동물적인 존재로서의 인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존재성, 고유성을 말한다. 이 존재성이란 인간이 자기 자신과 더불어 관계를 가지는 상태를 말한다. 다시 말하면 내가 나의 행위에 대해서 나 자신을 객관화할 수 있거나 또한 나 자신을 어떤 일어나는 사건이나, 당하는 사건의 주체(主體)로서 경험하는 것이다. 즉, 내가 나와 거리를 둘 수 있으며, 그럼으로써 내가 객관화된 나와의 관계를 가지며 그것이 객관화된 것이기 때문에 내 뜻과는 거리가 있는 것 즉 이질적인 것을 경험하며, 그러한 이질적인 것에 내가 어떤 요구를 받고 있으므로 언제나 결단해야 하는 상태에 있음을 말한다. 다른 말로 되풀이 설명하면 자기와의 관계를 가진다는 것은 어떤 것을 자기 자신과 더불어 시작하는 것, 자기를 잃어버릴 수도 있고, 찾을 수도 있는 줄타기를 하는 존재라는 말이다. 이것은 곧 인간은 어떤 완성된 상태가 된 존재가 아니라 모든 구체적인 가능성 속에서 결단을 통해서 하나의 가능성에 자기를 내맡기는 그런 존재성을 갖는다는 것이다.

그러한 예로서 곡예사를 들어보자. 그는 생존자로서는 그저 보통 사람처럼 먹고 움직이면 된다. 그러나 곡예사로서의 존재라면 그는 떨어지면 즉사할 높이의 가느다란 줄 위에 자기를 올려 놓는다. 이것은 그가 죽을 수도, 또는 그 반대로 참 곡예사로서 실존할 수도 있는 가능성에서 줄을 타는 것이다. 그러나 곡예사로서의 존재는 자기를 이 위험한 경지에 자신을 올려 놓음으로써만 실존할 수 있다. 즉 곡예사로서의 그의 존재성은 그 줄을 타고 행위하는 그 때에만 실존한다. 이 곡예사에게 곡예사로서 실존하게 하는 길은 '줄을 타라! 행동하라!'이다. 이 줄을 타게 하기 위해서는 그에게 한마디 더할 게 있다. 그것은 '걱정말고 무서워 말고 타라!'이다.

성서의 신(神)은 원리도 이성도 아니다. 그는 무(無)에서의 창조자라고 한다. 그 말은 그는 이 세상 밖에 있으며, 법칙으로서가 아니라 자유의지로서 인간을 마주서는 이라는 것이다. 성서가 이 하느님을 말하는 것은 오직 그는 인간에게 향한 물음이라는 것과 그의 물음에 대답 또는 그의 요구에 응답할 것을 가르친다. 그런데 희랍의 신관과 비교해서 주목할 것은 '섭리'(pronoia)라는 개념이 없다는 것이다. 섭리라는 개념은 세상의 모든 것은 우연이 없고 전부 질서정연하게 목적을 향해서 이루어진다는 사상이다. 이것으로 인간의 불안을 제거하려 한다. 그러나 성서에서는 이러한 섭리는 모른다. 신학에서 섭리란 개념은 성서에서 온 것이 아니라, 희랍의 영향이다. 아니, 성서의 신은 인간에게 '왜?'라는 질문이 허락되어 있지 않은 미지(未知)의 의지(意志)다. 그렇기 때문에 이 하느님을 알라고 하지 않고, 믿으라고 말한다. 그 까닭은 믿음이 앎의 열쇠라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것은 이런 말이 된다. 이 하느님이라는 '줄을 타라'가 곧 '나를 믿으라'이다.

이와 함께 신약은 변신론(辨神論)을 모른다. 변신론은 네게는 지금 어려운 것 같아도 이러이러하게 잘 되고, 해악은 없는 결과가 나온다. 그러니 '그걸 믿으라!'는 것이다. 즉, 확실한 결과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신약은 '믿으라'고만 하지, 어떤 결과가 온다는 것은 말하지 않는다. 즉 토기장이와 토기의 관계처럼 그는 자기 마음대로 무엇으로나 만들 수 있고, 또 깨뜨릴 수 있다. 즉, 그의 뜻은 추측할 수 없다는 것이다. '줄을 타라', '믿으라' 그러면 '어떻게 믿으라고요?' 하는 질문에 대답이 있다면 그것은 '믿으라', '줄을 타라'일 뿐이다.

예수는 하느님을 가르치지도, 인간을 가르치지도 않았다. 그가 초점적으로 선포한 것은 '하느님 나라'의 도래이며, 그것을 믿으라는 것이다. 하느님의 나라가 무어냐고 묻는다면 하느님의 주권의 세계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청사진은 제시하지 않는다. 단지 분명한 것은 오고 있는 것, 즉 미래다. 과거가 아니다. 미래다. 그 미래는 무엇인지 설명될 수 없다. 미래가 무엇인지 모르면서 그 미래를 향해서 너를 개방하라고 한다. 너는 미래를 향해서 너를 개방해야만 살 수 있다는 것, 즉 그럴 때만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럴 때만 상실된 너를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엑소더스, 즉 탈출이다. 과거에서, 보이는 것에서, 가진 데서 탈출할 때만이 너는 인간일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무서워 말고 네 손에 잡은 것을 놓아라. 그걸 놓으면 산다. 놓으면 산다는 내 말을 믿어라. 믿음으로써 너는 산다는 것이다.

여기서 성서의 인간관이 부각된 셈이다. 그것은 인간이라는 것은 어떤 실체로서 이미 있는가능성을 다듬고 가꾸어서 완성으로 도달하는 그러한 정적(靜的)인 존재가 아니라, 구체적인 역사적 현실 속에서 그때 그때, 그 순간 그 순간 결단을 통해서만 실존으로 존재할 수 있는 동적(動的)인 존재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서에 인격이니, 교육이니, 인간상이니 하는 개념은 없다. 이상을 그리스도교는 종말적인 실존이라고 한다. 종말적인 실존이란 이미 있는 어떤 것에 의해 보장받고 사는 게 아니라, 오고 있는 것을 믿음으로써 사는 존재라는 뜻이다.

2. 죄라는 것

그리스도교에서 죄라고 하는 말 또는 구원이라고 하는 말도 정적인 상태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죄란 과거적인 것, 기성적(旣成的)인 것에서 궁극적인 삶의 보장을 찾음으로써 폐쇄적인 상태를 말하는 것이고, 구원이라는 것은 이 폐쇄적인 데서 개방적인 상태로 가는 것, 그럼으로써 새로운 가능성을 받아들일 수 있는 자유를 지닌 상태를 말한다. 따라서 구원이라고 하면 그것은 '이미' 이루어진 것은 없다. 아니 '이미'는 뒤이어 '아직도 아니'로 간다. 이러한 서술법은 곧 명령법을 내포한다. 이 말은 인간 그것은 도상의 존재라는 말이다.

사랑하라! 이 명령에서 인간의 실존이 어떻게 나타나는가? 그것도 믿으라의 경우와 다를 바 없다. 여기서 사랑하라는 것은 어떤 법칙성에 근거를 둔 윤리의 원칙을 이행하라는 말이 아니다. 또는 내 안에 있는 어떤 잠재력을 발전시켜서 나를 점차적으로 완성하라는 것도 아니다.

'사랑하라!'는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한다. 이 말은 어떤 뜻인가? '네 몸과 같이'라고 하는데, 자신을 향한 사랑은 끝이 없다. 사랑에는 '이만하면 되었다'는 완성 단계는 없다. 나를 완전히 사랑하라는 것은 결코 이상이 아니다. 그 요구를 그대로 발전시키면 상대방을 소멸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라는 것은 우선 이웃에게 너를 개방하라는 말이다. 어떤 요구를 할지도 모르는 이웃에게 나를 개방한다는 것은 나를 송두리째 잃어버릴 수도 있는 모험이다. 그가 무얼 요구할런지, 내가 그런 것을 감당할 수 있는지조차도 모른 채 나를 이웃에게 개방하라는 것은 우리에게 공포에 사로잡히게 하는 그런 명령이다.

'사랑하라!' 그것은 '이웃에 너를 개방하라, 내맡겨라'이다. 왜 그런가? 그럴 때만 너는 너로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랑함으로써 내가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사랑함으로써만 실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사랑에는 정지(靜止)가 없다. 이만하면 됐다가 없다. 이웃에게 나를 개방함으로써 나는 순간 순간 그의 요구 앞에 결단함으로써 나를 폐쇄함으로 자기를 잃을 수도 있고, 나를 살릴 수도 있다. 사랑한다는 것은 순간적으로 가능하다. 그러나 그것으로 정좌(定座)하게 하지 않는다. 사랑은 하면 할수록 사랑할 수 없는, 하지 못한 나를 발견하게 한다. 여기서 이미, 그러나 아직 아니의 인간 실존이 나타난다.

그러나 진정한 사랑에는 보장이 없다. 이것도 내맡기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내맡길 때만 나는 나를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 이런 사랑이 가능한가? 이러한 사랑의 명령을 이룰 수 있는가? 결국 이 명령에 예민하면 할수록 사랑해야 살 수 있는 나와 더불어 사랑할 수 없는 나에 부딪치는 것이 아닌가? 여기서 '누가 나를 이 사망의 몸에서 구원해줄까?' 하는 바울의 비명이 온다. 즉, 인간은 구원받아야 할 존재라는 것이다.


| 성서의 맥 1 |
구원에 이르는 길
(한국신학연구소)
List of Articles
표지
 
제1부 절망 속의 희망
실락원 (창세 2-3장)
종주권과 민중의 투쟁 (창세 4, 1-16)
카인의 후예 (창세 4, 1-26)
아브라함과 종주권 (창세 16, 3-12)
종주권에 도전한 민중 야곱 (창세 25, 19-24)
야곱의 후예와 종주권 (창세 37, 1-11)
탈-향(脫-向)의 인간사 (창세 12, 1.7)
절망 속의 희망 (창세 22, 1-13)
   
제2부 지성소
바벨탑 (창세 11, 1-9)
의인 열 사람만 있어도 (창세 18, 22-33)
지성소(至聖所) (출애 3, 5)
나는 나다 (출애 3, 13-15)
탈향(脫向)의 기수 (출애 3, 7-10)
지평선 너머 (신명 32, 48-52)
   
제3부 최후의 소원
역사의 행렬 (신명 32, 48-52)
고대 이스라엘 종족 동맹 (사사 5, 1-8)
신앙고백과 역사 (신명 26, 5-9)
최후의 소원 (판관 16, 28-31)
믿음의 조상 (히브 11, 17-19)
히브리적 비극 (욥기, 23, 1-9)
민족사적 고백 (신명 26, 5-9)
   
제4부 남은자의 믿음
다윗 왕권의 죄 (삼상 8, 4-18)
불의의 온상 (삼상 12, 7-14)
절대 권력은 절대 악이다 (열상 11, 1-13)
바알 세력과의 투쟁 (열상 18, 17-24)
바알 (열상 19, 18)
남은 칠천 명 (19, 7-18)
민중의 손으로 통일되는 날 (아모 9, 11-15)
겨울은 가고 (에제 37장)
에제키엘이 무등산에서 절규한다 (에제 24, 6-8)
포로에서의 탈출 (이사 66, 1-8)
위정자와의 대결 (이사 7, 10-14)
   
제5부 새로운 존재
일상성과 비일상성 (루가 10, 38-42)
그래도 다시 낙원에로 환원시키지 않았다 (창세 3, 1-10)
새로운 인간상 (창세 12, 1-9)
믿음의 조상 (창세 22, 17-18)
두 사이 에 손을 얹을 판결자 (욥기 9, 25-35)
하느님으로부터의 도피 (시편 139편)
하느님의 웃음 (시편 2편)
잠과 신앙 (시편 127편)
교회란 무엇인가 (로마 8, 9-30)
인간을 말한다 (마르 12, 28-34)
존재 근거 (시편 42편)
우주의 품으로 (시편 8,3 이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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