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러한 배경 속에서 예수운동은 과연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예수운동은 마르코복음 1장 14절의 "세례자 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래아로 가셔서"과 15절의 "때가 찼고…… 회개하라"에서 시작된다. 여기서는 14절의 의미가 중요하게 부각되며, 14절에 의해 15절이 의미있게 된다. 즉 세례자 요한이 잡힐 때 예수는 공생애를 시작했다.
로마의 앞잡이였던 헤로데왕은 죽을 때 자신의 영토를 갈릴래아, 유다, 요르단의 3개의 분봉령으로나눴는데, 갈릴래아의 분봉왕 안티파스에 의해 세례자 요한이 체포되었다. 그리고 안티파스는 소요와 민중봉기가 무서워 세례자 요한을 체포, 제거해버렸다. 사두가이파와 바리사이파는 예수를 제거하겠다는 의도를 가지기 시작했을 때이다. 한편 세례자 요한의 하느님 나라운동에 참가했던 예수가이제는 자신의 활동시기임을 알고 세례자 요한을 체포한 안티파스가 있는 곳, 갈릴래아로 갔다는 사실은 매우 의미심장한 사건이다. 다시 한번 갈릴래아 지역의 특성을 살펴보자.
갈릴래아는 유다에서는 멸시의 대상, 이방인의 땅, 암 하 아레츠 중심지였고, 그곳은 고대 이스라엘의 후예들이 살던 곳이다. 이 시기 이스라엘은 도ᆞ농의 격차가 극심했으며 땅의 소유자는 대개 예루살렘에 있는 부재지주였다. 그럼 헤로데 안티파스가 있는 갈릴래아로 예수가 향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그것은 곧 죽음을 각오하고 민중을 찾아갔다는 뜻이다. 따라서 예수의 운동은 민중운동으로 출발한다. 예수는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선포하였는데, 이것은 묵시문학적 차원을 넘어선 것으로 민중이 예부터 염원하던 것이며, 그러기에 갈릴래아의 민중은 예수의 메시지를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고대 이스라엘의 특징은 군주들이 농노와 탈출한 합비루 등과 함께 민중 공동체를 형성하고 하느님의 주권만을 인정하였던 것인데, 예수가 하느님 나라를 생각할 때는 그 어떤 낙원을 생각한 것이 아니라 고대 이스라엘의 민중공동체를 그리고 있었던 것이다.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 하느님 나라가 너희 것이다"(루가 6, 20)라는 들의 설교는 바로 민중이 염원하던 나라를 말한 것이다. 또 이런 관점에서 주기도문을 살펴보면, "…… 아버지의 나라가 임하옵소서.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 옵소서.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을 주옵소서"(가난한 자들의 기도)인데, 이것도 가난한 자들의 나라가 오게 해 달라는 기도이다.
아무 소속도 없이 버림받은 민중(오클로스)과 함께 예수는 살았다. 복음서에 나오는 병 치유 이야기를 살펴보자. 이것은 누가 누구를 고친다는 것이 아니다. 민중운동적 개념에서 보면 절대 예수가 혼자 병을 고친 것이 아니다. 대부분이 병자, 그의 친구, 가족들이 먼저 간청하고, 병 치유의 사건은 예수, 병자, 친구, 가족, 민중, 제자 모두가 있는 현장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그래서 예수도 "네 믿음이 너를 낫게 하였다" "네가 너를 낫게 하였다"고 하는 것이다.
결국 예수와 민중은 '우리'라는 개념 속에 통일되어 있다. 예수의 제자 규합에서도 이러한 점은 명백히 드러난다. 예수의 제자 선정은 전략적 성격을 띠며, 상당히 다양한 민중을 규합한다. 어부와 젤롯당원 그리고 세리까지도 제자로 삼는다.
이들은 체제에 대해 도전하면서, 당한 자 편에서 모든 것을 본다. 우선 예수는 그들에게 우위를 두고서, 다음에 율법에 대한 이해를 새롭게 정리한다. 한편 예수와 그의 제자들은 젤롯당원처럼 입성도 안했고 에쎄네파처럼 은둔하지도 않았다. 단지 그들은 갈릴래아 민중과 더불어 살았고, 그들(갈릴래아 민중)을 정죄한 사람들과 싸웠다.
그러한 예수가 예루살렘으로 간다는 것은 또 무엇인가? 예루살렘으로 간 것은 여타 운동권(젤롯당, 에쎄네파, 세례자 요한파)처럼 미리 계획되어 있었다. 예루살렘으로 갈 때에 예수가 앞장서서 갔는 데, 그 결연한 행동에 제자들은 깜짝 놀랐다(마르 10, 32 참조). 그리고 그는 자기의 수난을 예고하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예루살렘에 갈 때 갈릴래아 사람들과 함께 갔다는 기록이 더러 있다. 그리고 그 중에는 갈릴래아 여자들도 같이 따라 올라갔다. 그 의미는 앞의 이야기를 종합해보면 충분히 이해가 될 줄로 안다.
예수는 왜 예루살렘에 올라갔나?
타락의 도시 예루살렘, 갈릴래아 민중을 착취하는 도시, 야훼를 감금한 예루살렘성전, 다윗왕조의 지배이데올로기를 유지해오던 곳, 예수는 이곳 예루살렘을 숙청하려고 했던 것이다. 이것도 여타의 세력과 동일한 목적이다. 그러나 이제 숙청방법에서 차이가 난다.
숙청과정에서 예수는 결코 폭력을 행사하지 않은 것 같다. 그것은 아마 전략적인 의미가 있는 듯하다. 이것이 바로 여타 집단과의 차이점이다.
왜 하필 해방절에 입성하셨나?
예수는 해방을 겨냥한다. 성전과 유다 세력과 온갖 부패로부터의 해방이다. 예수가 많은 인파가 몰릴 때 예루살렘에 갔다는 것은 민중 봉기를 일으킬 의도가 있었던 듯하나 이를 뒷받침할 자료는 빈약하다. 그러나 예수가 '유다인의 왕'이란 죄명으로 잡혀 십자가형을 받은 것이 이러한 가능성을 반영한다. 그것은 명백한 정치범이다. 그러나 예수의 죽음으로 민중운동은 끝나지 않았다. 오히려 예수의 민중 운동은 십자가처형 그 이후부터 본격화된다.
예수가 죽임당한 후 베드로를 중심으로 한 지도층은 일단의 붕괴를 겪게 된다. 그후에 지도층은 여자들로 바뀌어진다. 그것은 막달라 마리아를 비롯한 3인이었다. 이 여인들이 예수 죽음의 목격자로서 "그러나 그는 죽지 않았다. 우리는 그것을 확신한다"고 증거하였던 사람들이다. 그 여인들이 목격자로서 증언하지 않았다면 아마도 그리스도교는 없었을 것이다. 그 여인들이 증인이었다. 이 여인들은 그 죽임의 현장, 즉 암흑의 현장, 신 부재의 현장을 증언한다. "너무도 비참하게 죽었다. 신도 돕지 않았다. 너희들은 모두 배반했다. 그는 철저하게 버림받고 죽었다." 그리고 그 여인들은 끝끝내 증인이고자했다. "그러나 그는 죽지 않았다"고.
무심코 한 조그만 일이 훗날 세상을 바꿔놓았다. 이것은 복음(케리그마)이 아니다. 그저 못살고 무식한 민중의 목격담이었다. 케리그마는 그것을 "사흘 뒤에 살아나 갈릴래아로 가셨다"로 전하고 있으나, 그런 케리그마보다는 민중의 목격담이 민중운동의 동력이 되었다.
박종철군의 죽음이 있을 때 우리는 제자들처럼 다 도망가버리지 않았나? 우리는 그의 죽음을 앞에 두고 역사의 산 소망을 증언할 수 있을까?
이 여인들의 증언에 갈릴래아 사람들이 힘을 얻은 사건이 바로 오순절사건이다. 바리사이파운동과 달리 예수운동은 로마제국과 정면 충돌은 없었으나 오로지 십자가만을 잡고 전진해갔다. 십자가는 로마제국이 예수를 죽였다고 하는 구체적인 표현이다. 결국 이 예수운동의 물결은 로마를 굴복시키고 세계로 번졌다. 그리고 이 운동의 주체는, 죽은 자의 현장을 목격했고, 그 죽임당한 자가 죽지 않았다고 증언했던 바로 그 갈릴래아 민중이었다.
예수의 민중운동은 예수의 죽임당함에서 시작된 것이다.
■ 「교회와 세계」, 1987년 7월. 원제는 '신구약에 나타난 민중의 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