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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병무전집6 |
역사와 민중
(한길사)
2. 하나하나의 질문에 대하여

1) 여러분은 서구의 경험들을 고려하면서 민중신학의 결론들에 관하여 회의적인 질문들을 던졌습니다. 사회변혁이 일어날 경우, 민중은 더 이상 고난받는 계층이 아닐 거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러분들의 관점을 문제시합니다. 여러분들은 재세례운동도 민중운동이었으나 결국 유혈적폭력적으로 되었고, 그것은 민중에게는 불행이요, 역사적으로는 부정적인 성격의 사건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렇게 말하는 여러분들은 이 과정을 통하여 민중의 자기의식이 성장하고 독점화된 권력이 상대화된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우리는 이 과정을 잘못된 사태의 전개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불행한 시기들은 더 큰 과정을 통해 앞으로 전진하게 하는 계기이기 때문입니다. 동학봉기와 31운동은 억압되었지만, 이러한 고난은 내적인 과정을 통하여 민중의 힘을 강화시켰습니다. 여러분 둘은 겉으로 드러난 것을 놓고 너무 속단하는 것은 아닙니까? 우리는 우리의 역사속에서 평화를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칼을 주기 위해 왔다는 예수의 말씀을 회상하게 되었습니다. 실로 여러분들의 관점으로부터는 이러한 예수사건마저도 부정적으로 평가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권력과 지배를 성찰하면서 아직 구원받지 못한 세계에서는 권력과 폭력이 불가피하다는 것을 강조하였습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루터를 연상시키는 견해입니다. 우리는 죄의 개념에 대한 여러분들의 성찰을 검토할 때도 그러한 판단을 하였습니다만, 지금 우리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여러분이 회의를 품는 바로 그 자리에서 우리는 민중을 신뢰한다는 것입니다. 폭력만이 질서를 유지할 수 있다는 전제는 민중의 인간다운 자율의 가능성을 무시한 것이라고 우리는 생각합니다. 독재는 언제나 그와 같은 인간학적 전제를 가지고 억압을 정당화해왔습니다. 우리는 여러분들이 폭력의 악성에 대해 너무나도 무비판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서구 역사에서는 그리스도교와 국가 권력이 너무나도 오랫동안 융합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권력과 폭력에 대한 우리의 비판은 서구 신학적인 윤리에는 적합하지 않은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서구 윤리의 여러 개념들이 어디서 유래한 것인가를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윤리가 신학에서 폭넓은 영역을 차지하는 경우는 언제나 종말론적 의식이 쇠퇴하였을 때입니다.

 

2) 여러분들은 네 가지 질문을 구체적으로 제기하였습니다.

—여러분은 지배의 합법성을 문제로 제기하였습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문제 설정 자체에 대해 회의적입니다. 여러분은 '합법성'이라는 개념을 어떻게 이해하고 계십니까? '모든' 지배는 스스로 합법적이라고 주장합니다. 우리는 역사상 '합법적' 지배는 단 하나도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프롤레타리아트의 지배도 합법적인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프롤레타리아트의 지배는 합법적이라고 말들하지만 실제로는 당 엘리트의 지배를 은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서구 민주주의에서도 정치가 경제적, 학문적, 사회적 엘리트들에 의해 주도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이러한 엘리트들은 예외없이 정치과정을 규정 합니다. 민주주의적인 정부는 독재보다는 낫지만, 진정한 민주주의는 고난을 받을 용의가 있는 민중에 의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여기서 투쟁과 고난은 제물을 바친다는 의미로 이해되고 있습니다). 한국은 작고 약하고 여러 차례 정복당한 적이 있는 나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더 강한 정부에 대해 두려움을 느끼고 있습니다. 공자는 전설적인 요순시대를 이상적인 모델로 삼았습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에는 정부가 있는지조차 '감지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후 장자는 더욱 급진적인 관점에서 이 이상적인 정부마저도 비판하였습니다. '감지할 수 없는' 이 정부도 억압적이라는 것입니다. 이 정부도 조작을 통해 억압을 은폐한다는 것이 준엄한 비판의 이유였습니다. 이러한 문화 전통에 속해 있는 우리는 여러분들의 문제 설정을 비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세계가 존속하는 한, 모종의 '질서'는 존재하여야 합니다. 그러나 '질서'는 항상 권력 추구의 핑계거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에 반대합니다. 우리는 어떤 폭력행위에 대해서도 우리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딸들과 아들들인 민중의 자율성에 기대를 걷고 있습니다. 그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입니까하고 여러분들은 물어볼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이러한 물음은 하느님 나라의 질서에 대한 물음과 똑같은 구조로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은 우리의 급진적인 종말론적 입장이 직접적인 정치적 행동을 넘어선 곳에서 어느 만큼 유용하겠는가를 물었습니다. 여러분들의 물음은 역사실증주의와 관련된 것이 아닙니까? 여러분들은 가시적인 것, 증명될 수 있는 것에 너무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우리는 이에 대해 두 가지로 대답하고자 합니다.

첫째, 하느님의 뜻은 우리를 정의를 위한 투쟁으로 이끕니다. 여기서는 그것의 성공 여부를 생각하지 않습니다.

둘째, 결과는가시적인 것에서만 찾을 수는 없습니다. 또한 우리는 우리가 뿌린 모든 것을 거둘 수도 없습니다. 우리는 누룩과 겨자씨의 비유를 생각합니다. 이것은 단순 소박한 신앙만은 아닙니다. 우리의 역사 속에는 불가시적인 것의 흔적이 있습니다. 유럽에서는 성서의 종말론적인 것이 현저하게 사라져버렸습니다. 우리는 여러분들의 자기비판적인 고백을 인정합니다. 우리는 역사가 권력 찬탈에 대한 투쟁의 장이며, 투쟁의 과정이라는 것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작은 발걸음'의 중요성에 관하여 : 진정 우리는 주어진 것의 공고화가 서구에서 극히 중시되어왔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그리하여 한편으로는 복지의 경제적 연관이, 다른 한편에서는 인간공동체의 파괴가 거의 성찰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3) 여러분들은 민중과 'Volk'를 너무나도 쉽게 동일시하고 있습니다. 저의 몇몇 동료들은 이와 같은 가벼운 동일시에 대해 분노하였습니다. 불트만의 책은 Volk Gottes라는 부제를 갖고 있습니다. 이것은 전적으로 잘못된 것입니다. 우리는 민중을 Volk나 people로 번역한 적이 없습니다. 우리는 의도적으로 민중을 규정하지 않았습니다. 규정을 내리게 되면, 현실은 제한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살아 있는 것은 죽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개념과 현실은 모순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질문은 여러분이 이미 '민중'이 무엇인가를 파악하고 규정 하였음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민중'을 이해하는 데에서 여러분들과 우리들 사이에 커다란 차이가 있습니다.

 

4) '그리스도론적 문제들'에 관하여 : 민중신학을 추진하는 우리들이 대학에서 쫓겨났을 때, 우리는 독일의 수많은 교수들도 나치시대에 추방당했다는 사실을 상기하였습니다. 우리는 고백교회(die Bekennende Kirche)와 바르멘선언(die Barmen Theologische Erklärung)을 생각하였습니다.

또한 우리는 그리스도를 공동체적으로 고백해야 한다는 것을 생각 하였고, 여기서 갈릴래아 공동체가 탄생하였습니다. 저는 갈릴래아 공동체에서 행한 설교들을 모은 책(『주여, 어서 오시옵소서』, 일본어판)의 서문에서 이 과정을 다음과 같이 되돌아본 적이 있습니다.

1975년 11명의 교수들이 대학으로부터 쫓겨났다. 그들 가운데 8명은 그리스도인들이었고, 4명은 신학자들이었다. 그 당시 우리는 1933년 이후 대학으로부터 추방당한 풀 틸리히, K. L. 슈미트, K. 바르트, F. 슐츠를 생각하였다. 우리는 이 사건들이 개개인들에게만 관련된 것이 아니라, 한국 그리스도교 전체와 관련된 것임을 깨달았다. 우리는 독일의 역사를 회상하면서 바르멘선언과 고백교회를 기억하였다. 우리는 이와 성격이 유사한 갈릴래아 공동체를 세웠다. 이 이름은 우리가 민중과 함께 울고, 민중과 더불어 기쁨을 나누는 예수처럼 행동하면서 신앙을 고백해야 한다는 것을 상징하기 위한 것이다. 선교는 투쟁행위와 현실 속에서 실현되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처지에서 독일 고백교회의 영향을 받았다. 그렇지만 이와 동시에 우리는 고백교회의 나약성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취했다. 나치정권은 반유태인주의와 국수주의를 명확히 하였지만, 바르멘선언은 이에 대해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다. 이것은 도피적인 행위의 표현이고 무책임한 일이었다. 아무리 좋게 이해 해도 그것은 잘못된 일이었다. 바르멘선언은 '오직 그리스도만'을 핵심적인 것으로 강조하였다. 우리는 거기서 긍정적인 요소를 본다. 왜냐하면 이 '오직'이라는 말의 의미는 반독재를 분명히 한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오직 그리스도만'이라는 말이 민중을 배제하고 민중에게 등을 돌리는 것이라면, 그 말은 '오직 교회만'으로 될 것이며, 따라서 잘못된 것이다! 교회는 자기 자신을 목적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 오히려 교회는 가난한 사람들과 억눌린 사람들과 함께하는 그리스도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오직 그리스도만'은 우리의 고백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 고백이 추상적인 것으로 남아 있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갈릴래아 민중과 스스로를 일치시킨 예수의 행태를 우리의 것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하느님의 말씀은 행동과 행위에 의해 보충되어야 한다. 이 행위는 민중과 더불어 하는 행위이다…….

그 당시 우리는 민중에 대한 연대를 적극적으로 표시하였으며, 그 때문에 감옥에 가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축복으로 가득 찬 경험이었으며, 우리는 몸으로 민중의 일부로 존재하였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우리가 그리스도사건 바깥에서 하느님의 자기 증언을 수용하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역사를 계시의 두 번째 공간으로 보고 있지 않은가 하는 질문을 던졌습니다. 여러분은 바르멘선언을 배경으로 삼아 우리의 입장을 이해하려고 하면서도 그렇게 묻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계시를 어떻게 이해하는가 반문하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하느님의 자기 증언을 역사적인 사건들과 결합시키는 것을 의문시하였습니다. 여러분은 여기에 예수사건을 포함하고 있습니까? 만일 그렇지 않다면, 여러분은 역사적인 예수사건만이 하느님의 계시를 표시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까? 역사 그 자체는 우리들에게 결코 제2의 계시의 원천이 아닙니다. 그러나 역사가 없으면 계시도 없습니다. 바르멘선언은 예수 그리스도를 하느님의 유일한 말씀이라고 증언합니다. 우리는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하느님의 사건으로 봅니다. 이 사건(event)은 역사 안에서 일어났으며 역사를 통해 계속됩니다.

우리는 서구 신학이 그리스도교적인 것을 유일무이한 것으로 보이게 하기 위하여 '유일회성'(ephhapax)을 강조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 그리스도사건은 역사의 특정한 시기에 고착될 것이고, 지나간 것에 매여버리고 말 것입니다. 우리는 역사 그 자체가 계시인 것은 아니지만 사건으로서의 그리스도는 끊임없이 역사 속에서 계시된다고 생각합니다. 예수사건은 우리들에게 핵심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역사 '안에서'이루어지는 계시의 척도요 규준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우리는 히틀러의 폭력행위 및 인종차별정책과 민중의 해방역사를 동일한 차원에 놓아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역사에서 해방전통과 억압세력들을 구별합니다. 성서의 증언에 따르면, 하느님의 뜻은 해방운동에서 계시됩니다. 하느님은 그리스도 바깥에 그리고 그리스도 이전에 존재하였고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생각이냐고 여러분들은 묻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바깥의 그리고 그리스도 이전의 하느님이 아무것도 아니라면, 하느님은 예수사건에 족쇄로 묶여 있는 것이 아닙니까?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구약과 신약성서는 구원의 진동, 구원의 흐름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구원의지는 그 무엇에 의해서도 제약되지 않습니다.

서구 신학에서는 바울로의 아레오파고 연설에 나타나는, 알지 못하는 하느님이라는 표상(사도 17, 23)이 거침돌이 되는 경우가 왕왕 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교는 잘못된 방식으로 절대화되곤 하였습니다. 이와 동시에 세계와 세상 만물의 주(主)인 하느님은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그리스도 '바깥'에 그리고 그리스도 '이전'에 하느님이 없다고 한다면, 이러한 경향은 계속될 것입니다. 만일 그리스도사건이 2천 년 전의 사건으로 고정되고 만다면, 죽음과 십자가가 끝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현존하고 활동하는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는 역사 속에서 오늘 우리와 더불어 어떻게 존재하십니까? '바로 이것을' 우리는 묻습니다. 우리는 설교의 선포가 계시와 계시의 현재화를 위한 유일한 장소가 되는 하느님의 말씀의 신학에 대해 힘을 다하여 반대합니다.

우리는 고난이 성서의 주요 모티프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출애굽에서 시작됩니다. 고난당하는 민중이 역사적으로 해방된다는 것입니다. 이 점은 신약성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갈릴래아에서 예수의 현실의 투쟁장소를 그의 선교장소로 선택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그는 예루살렘에서 살해당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가 이 사건의 중심이라는 케리그마는 이 점에서 옳습니다. 우리는 부활신앙이 구원을 일으키는 출애굽 하느님에 대한 신앙고백이라고 생각합니다. 복음서들, 특히 마르코복음서는 지나간 고난만을 증언하지 않고, 오늘의 인간 가운데서 고난당하는 그리스도를 말하고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에게 극히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은 예수의 고난에 대한(무신론적인) 서술입니다. 마태오복음 25장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는 히브리서 13장 12~14절도 자주 인용합니다. 우리는 바울로의 십자가의 신학도 이런 의미에서 해석되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바울로는 고난 가운데서 현존의 그리스도를 고백합니다. 사도의 고난은 그를 그의 주와 닮은 꼴로 만들었고, 그의 주와 일치하게 하였던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서남동이 김지하가 만들어낸 인물인 장일담을 실제로 그리스도로 보았는가, 또는 그리스도와 이 인물이 어떤 관계에 있는가하는 질문을 던졌습니다. 우리는 여러분이 그리스도를 '페르조나'(persona)로만 보고 있고, 그를 과거에 고정시키고 있지 않은가 하고 반문합니다. 장일담은 '페르조나'로서의 그리스도와 동일시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사건은 이 사건을 통해 계속 활동을 펼쳐 나가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그리스도의 모방'을 시도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일일 것이며, '제자직'이 필요불가결한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그러나 아이러니컬하게도 '제자직'을 강조하면, 우리는 인간과 그 자신의 공로를 특별히 부각시킬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이해에 따르면, 예수와 예수사건은 우리 시대의 사건들에서 계속 주도권을 갖고 있습니다. 모방은 우리의 활동들을 포괄하고 있으며, 그 모방에서는 그리스도 자신이 계속 주도권을 쥐고 있습니다.

 

5) 끝으로 죄의 문제에 대해 말씀드려보겠습니다. 여러분들은 민중이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고, 민중이 무죄하다고 보는 것이 우리의 견해인가라고 물었습니다. 우리에게는 이러한 문제 설정에서 주객도 식이 다시 나타나는 것처럼 보입니다. 구원자와 구원을 받아야 할 자, 구원의 주체로서의 하느님과 구원의 대상으로서의 인간이 그것입니다. 이 도식은 우리들마저도 오랫동안 배후에서 규정하여왔습니다. 그러나 구원사건은 포괄적이며, 따라서 이와 같이 능동성과 수동 성의 분리를 허용하지 않습니다. 구원에 이른다는 것은 수동적인 과정이 아닙니다. 인간의 노력과 은총의 선물은 분리된 것으로 볼 수 없습니다. 은총이 핵심이고 종교적으로 중요하지만, 인간의 노력이 이와 분리된 것은 아닙니다. 양자는 하나이고, 동일한 것이 각기 다른 언어로 표현된 것입니다.

진정 민중은 해방의 잠재력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는 도덕적윤리저 관점에서 민중을 '무죄' 하다고 간주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미화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민중의 일상적인 부패상을 알고 있습니다. 비천한 민중은 도덕적윤리적으로 다른 사람들보다 더 악할 때가 많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놀라운 경험을 하였습니다. 그것도 되풀이해서 말입니다. 민중에게서 자기초월과 같은 무엇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 그것입니다. 이렇게 말할 때, 우리가 무엇보다 먼저 생각하는 것은 민중의 '발빠름', 곧 민중 이타성에 젖지 않고 고난받을 용의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사건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이 사건을 주객도식을 가지고 분석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들은 '죄'라는 말이 일차적으로 지배자들의 언어가 아니라 성서의 언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성서의 언어를 현대의 언어로 번역할 것을 요구하는 신학자들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성서의 개념들과 성서의 메시지는 사회과학적인 측면에서 해석될 수 있고 또 그래야 한다고 봅니다. 우리가 이해하는 한, 예언자들은 가진 자들과 지배자들의 죄와 불법행위를 공격하였습니다. 민중 억압과 민중 착취가 바로 죄입니다. 이러한 착취가 바로 'exousia', 곧 권력의 반신적 오용입니다. 이처럼 다른 사람들에게 참람하게 지배를 행사하는 것이 바로 죄입니다.

물론 우리는 '다른' 죄들, 곧 윤리적, 법적, 제의적 측면의 죄들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죄들'에 대한 판결은 지배적인 가치 체계를 출발점으로 삼고 있습니다. 이러한 가치체계와 죄의 개념은 현상의 유지를 뒷받침합니다. 다윗왕조에서 우리는 이와 같은 사태 발전을 볼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본래적인 뜻은 뒤집어 해석되었고, 지배자들을 영광스럽게 하는 법률적 수단으로 오용되었습니다. 교회사도 그렇게 볼 수 있습니다. 교회는 그 자신을 가치추구의 목표로 삼을 때가 왕왕 있었습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원죄의 교리가 천착 되고 세련화되었습니다. 이것은 질서신학에 근거한 교회안정의 관점에 이바지하였습니다. 하느님의 이름이 이 경우 잘못 사용되었습니다. 따라서 '죄'를 말할 때, 우리는 반드시 '아래에 있는' 희생자들을 보아야 할 것입니다.

누가 이러한 죄 개념의 희생자들인가? 이것은 결정적으로 중요한 질문이며, 죄 개념 그 자체보다 더 중요합니다. 이 점에서 예수와 바울로는 우리의 입장을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예수는 민중의 죄를 묻거나 질책한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그것을 그토록 부각시켰는데도 말입니다. 오히려 예수는 지배자들이 죄가 무엇인가를 규정하려고 한다고 날카롭게 비판하였습니다. 예수는 의도적으로 율법의 체계를 붕괴시켰고, 바로 이 때문에 살해당하였습니다.

우리는 바울로의 관점으로부터도 죄의 개념을 반성해야 합니다. 그에 따르면, 율법이 없으면 죄를 지을 기회도 없다고 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바울로의 죄 이해를 지배자들의 죄신학에 대한 공격으로 파악합니다. 바울로에 따르면, 죄는—율법 그 자체가 종말에 이르렀으므로—끝장을 내어야 할 무엇입니다. 물론 우리는 바울로가 죄와 율법의 연관을 강조하였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한' 사람이 죄를 저지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죄 아래 있게 되었다고 바울로는 말합니다. 그러나 바울로의 논증은 구원을 그 대상으로하고 있습니다. 그의 사고는 전혀 죄에 고착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지배자들이나 민중은 모두 이러한 구원을 필요로 합니다.

 

6) 교회론에 관하여 : 여러분들은 그리스도가 교회에 특별한 과제를 맡겨주었음을 강조하면서도, 하느님은 단지 교회에서만 활동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러분들이 생각하는 교회가 '어떤' 교회인가를 반문하고자 합니다. 마태오의 말―나의 뜻에 따라 사는 사람이 나의 형제요 자매이다―은 여러분의 생각을 뒷받침하고 있습니다만, 그럴 경우 교회는 반드시 하느님의 뜻을 성취해야 한다는 것에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들이 인용한 성서구절들에서 예수는 사실상 그의 제자들에게 말을 건네고 있습니다. 그러나 마르코의 병행구절들에서는 다르게 되어 있습니다. 거기서 예수는 이 말을 가지고 '오클로스'를 향해 말하고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았을 때, '하느님의 백성'과 민중의 구별이 유지될 수 없는 것으로 증명된 것이겠습니까? 우리는 여러분들에게 묻습니다. 여러분은 교회의 우선적인 지위를 주장하고자 하는 것은 아닙니까?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은 과연 누구입니까? 그들은 무조건 세례를 받고 예배에 참석하고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사람들입니까? 그런 이들에게는 안정이, 그것도 제의종교적 안정이 관심사가 될 경우가 왕왕 있지 않습니까? 예수는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인이라고 자처하지 않고 교회에 매이지도 않은 채 정의를 위한 투쟁에 헌 신하는 사람들을 일단 염두에 둔 것이 아닙니까? 우리는 그 어떤 외적인 표준들이 이 문제와 관련하여 판단을 내릴 수 있도록한다고 믿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백성'은 외부로부터 분석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보이는 교회와 보이지 않는 교회의 구별은 옳은 것이라 하겠습니다.

우리는 대화를 나누려는 여러분의 용의와 우리의 신학적 사유를 이해하려는 여러분의 노력에 대해 존경심을 표현하면서 우리의 이야기를 마치고자 합니다. 여러분들은 '한'과 같은 고난을 경험한 적이 없기 때문에 이를(집단적 고난의 표현으로서) 이해하기가 어렵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로서는 두 차례의 대전을 거친 이후에도 여러분들이 어떻게 집단적 고난의 경험을 가진 적이 없다고 말할 수 있는지 참으로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그 당시 유럽 전체가 참혹한 고통을 당하지 않았습니까? 유태인들은 집단적으로 고난을 당하지 않았습니까? 그것은 집단적인 독일의 이름으로 일어난 것이 아닙니까? 어떻게 이 모든 일이 여러분들의 신학에서 도외시될 수 있습니까?

성서는 모든 신학의 원천입니다. 거기서는 집단적인 고난이 주요 주제입니다. 이러한 집단적인 고난을 경험하지 않고 어떻게 성서의 기본주제를 이해할 수 있습니까? 진정 우리는 너무도 오랫동안 예수 사건을 개인주의적으로 협소하게 이해하여왔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민중의 투쟁장소에 서게 될 때, 우리는 출애굽의 역사와 예수사건에 대한 약속의 성취를 위시하여 성서를 새롭게 이해하게 됩니다. 말하자면 이 모든 것이 집단적인 것과 관련된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여러분들이 처한 상황에서 전면에 부각되는 것은 고난이 아니라 복지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고난당하는 하느님을 과연 증언할 수 있을까요? 거기서는 체념이 어른거리지 않습니까? 신학하는 것의 가능성과 관련된 체념 말입니다. 여러분들이 계속 신학을 한다면, 그것은 복지와 현상유지를 뒷안침하는 것이어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들은 유럽의 상황으로부터 다른 상황들에서 형성된 신학들을 이해하기가 거의 불가능하다는 의견을 표명하였습니다. 만일 그렇다면 그것은 비극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럴 경우 우리는 예수와 바울로를 이해할 수 없을 것이고, 에큐메니컬운동은 불가능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러분들이 체념하지 않으리라고 확산합니다. 우리는 대화와 이해의 가능성을 믿습니다. 우리는 문화적, 정치적, 경제적 장벽들을 극복할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오순절은 이를 보여주는 표정이며, 이 사건은 우리와 우리의 노력을 통해 지금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사건을 계속 밀고 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에게 진심으로 인사를 전하며 우리의 답변이 오랫동안 지체된 데 대하여 다시 한 번 양해를 구하는 바입니다.

 

여러분의 안병무

 

■ 『신학사상』 제6집(1990년)에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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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병무전집6 |
역사와 민중
(한길사)
List of Articles
표지
역사의 담지자
   
제1부 민중의실체
   
민족ᆞ민중ᆞ·교회
    1. 민중이 없었던 역사
    2. 그리스도교회는 무엇을 했는가
    3. 한국 그리스도교의 기본자세
민중과 더불어 I
    1. 가치의 붕괴
    2. 가치의 기준
    3. 이웃이 누구인가
    4. 민중과 예수
    5. 예수와 어린이
    6. 혼동의 현장
풀과 씨알과 돌
    1. 민의 두 얼굴
    2. '기적'을 일으키는 민중
    3. 소리를 지르는 돌이 되는 민중
민중언어와 그리스도교
    1. 민중언어
    2. 한국 혼의 전승자
    3. 서구 문화와 성서언어
    4. 한국 교회와 민중언어
민중의 힘
    1. 성서 안의 민중운동의 맥
    2. 민중운동의 태
    3. 민중운동의 태동
고난하는 한국의 민중 : 독일 신학계에 하는 말
    1. 독일 신학의 피할 수 없는 함정
    2. 육의 자기초월
    3. 반(反) 두 나라설
    4. 비그리스도인들과의 연대
   
제2부 민중, 역사의 주체
   
민중신학은 무엇인가
    1. 민중신학의 주제들
    2. 질문과 대답—성서해석의 시각
    3. 민중신학의 축
민중적 신앙고백
    1. 우리의 현장
    2. 우리 교회사적 반성
    3. 현재와 미래의 과제
민중과 교회
    1. 민중신학과 교회론
    2. 고린토교회의 문제
    3. 교회 밖의 문제와 바울로의 케리그마
    4. 교회론이 없는 마르코복음
    5. 루가의 교회론
    6. 맺는 말
새 역사의 주인
    1. 역사의 담지자
        1) 예수의 경우
        2) 가난한 자의 공동체(바울로)
        3) 야고보의 경우
    2. '가난한 자'가 주인 되는 때
    3. 맺는 말
민중이 주도하는 민족통일
    1. 분단상태의 성격
    2. 민족통일을 위한 움직임
    3. 민족통일운동의 거점
    4. 통일문제 해결의 성서적 거점
예수와 민중
    1. 케리그마의 그리스도와 역사의 예수
    2. 예수와 민중
    3. 그리스도론의 핵심으로서의 예수의 고난
예수와 해방
    1. 머리말
    2. 예수시대의 민족해방의 노력들
    3. 예수의 해방운동
        1) 병에서의 해방
        2) 체제에서 해방
        3) 증오, 복수에서의 해방
    4. 결론(마리아 찬가)
   
제3부 민중운동과 민중신학
   
민중사전 속의 그리스도
    1. 충격
    2. 신학적 문제 정리
    3. 민중사건 속의 그리스도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느님의 어린양
    1. 속죄양
    2. 세진이의 부활을 경험한 어머니
    3. 예수와 석가의 만남
    4. 보라, 이 사람을
민중과 더불어 II
    1. 거울이 유죄?
    2. 허상과 실상
    3. 논어를 읽으며
    4. 역사적 시점
    5. 민중과 더불어
민중사와 교회사
    1. 그리스도교회로 몰려든 자들의 사회적 성분
    2. 교회는 저들에게 무엇을 주었는가
    3. 그리스도교와 사회주의
    4. 성서에서 본 한국 교회사
민중운동과 민중신학
    1. 민중운동에서 민중신학으로
    2. 민중신학의 눈으로 본 성서
        1) 민중신학 이전의 신학
        2) 구약은 민중해방의 사건이다
        3) 예수의 민중이야기—'우리'
    3. 한국 역사 속에서 민중신학의 과제
    4. 민중운동의 그리스도적 의미
   
제4부 민중과 민족
   
옳은 백성 옳은 민족
    1. 민심이 곧 천심
    2. 잘난 백성 못난 백성
    3. 산 백성으로 서는 길
우리에게 일용할 배고픔을!
    1. 배고픔
    2. 그날 그날 먹을 양식을!
    3. 우리에게 그날 그날의 배고픔을 주소서
민중은 '환생'한 예수
    1. 예수는 '영웅'이 아닙니다
    2. 왜 마르코는 '만나자'는 약속만 남기고 붓울 놓는가
    3. 민중으로 환생한 예수?
    4. 오늘도 이어지는 '환생' 사건
민중적 민족주의 : 한완상 『민중과 지식인』 서평
    1. 개복(開腹)된 병상
    2. 민중은 누구인가
    3. 민중에게 의한 민족 세우기
   
제5부 민중과 예복
   
민중과 예복
    1. 객이 주인 되는 이야기
    2. 폭력으로 기득권 수호
    3. 수호자에 대한 심판
한국적 그리스도인상의 모색
    1. 문제 제기
    2. '한국적'이란 어떤 것인가
    3. '한국적'인 것과 그리스도교
    4. 한국 문화와 그리스도교 유산의 합류
    5. 근대화의 모순과 민족통일의 과제 앞에서
    6. 한국적 그리스도상의 맹아
민족문제와 민중신학
    1. 민족문제에 눈을 뜰 때까지
    2. 오늘의 민족문제를 보면서
    3. 민중적 민족
    4. 민중의 강인한 생명력, 민중은 생명의 근원이다
    5. 민족적인 것에 대한 예수의 태도—선 자리에 대한 강한 책임의식
    6. 민족문제를 어떤 원칙에서 풀어나가야 하나
    7. 민주에 대한 영원
탈서구신학과 민중신학 : 독일신학자들과의 논쟁
    1. 여러분들이 제기한 질문의 전반적인 구조
    2. 하나하나의 질문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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