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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병무전집5 |
민중과 성서
(한길사)
2) 의식화된 민중

마태오는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5, 13~14)라는 예수의 말을 고유하게 전승함으로써 세계 안에서의 이스라엘 민중의 위치를 선명하게 천명한다. 세상의 소금이 되며, 빛이 되는 길은 무엇인가? 그것은 예수를 따르는 자들에게 한 예수의 가르침 전체가 이에 해당될 것이다. 그것을 마태오에 고유한 전승과 그 해석에서 집약시켜 주목해보기로 한다.

 

(1) 산상의 설교

산상설교의 청중은 민중이다.71)4, 23~25은 청중을 성격화하는 총괄보도로서 그청중이 바로 큰 무리(ὄχλος πολλοί)임을 전제하고 있다. 7장 28절도 산상수훈의 청중이 저들이었음을 명기한다. 그룬트만(W. Grundmann, op. cit., S. 111, 151)은 이 청중은 바리사이파의 청중과 엄격히 구별하기 위해 '제자들'이라는 말을 첨가했다고 본다. 비록 μαθηται가 함께 있다고 해도 민중이 배제됐다고 볼 수는 없다. 쇼트로프(L. Schottroff, op. cit., S. 152), 루츠(U. Luz, op. cit., S. 190)도 같은 입장이다. 그런데 이에 대한 무수한 글들이 나왔으나 민중의 시각에서 본 글은 본 일이 없다. 이것은 Q자료이다. 그러므로 루가도 '들의 설교'로써 전승하고 있다. 이 둘을 비교하면 마태오가 그것을 많이 확대 해석하였음이 곧 드러난다. 그 설교의 장(場)은 모세가 십계명을 전수받은 시나이 산을 연상케 한다. 그만큼 이 설교는 비중이 큰데, 그것은 바로 새로운 이스라엘인 민중에게 주는 자료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유명한 여덟 가지 축복으로 시작된다. 이것은 축복이면서 선언이며, 동시에 민중의 의식화의 지표이기도 하다.

 

영에 있어서 가난한 자 : 루가에는 그저 "가난한 자"이다. 그런데 마태오가 여기에다가 "영에 있어서"(τφ πνεύματι)를 부가함으로써 그 성격이 달라진다. "영에 있어서 가난한 자"라는 표현은 신약에서는 여기밖에 없다. 그러나 쿰란문서에서는 이같은 표현이 두 번 나온다(1QM 14, 7; 1QH 14, 3). 쿰란집단은 스스로를 그렇게 인식했는데, 그것은 '완전하게 사는 자들'이라는 의미로 사용했다. 산상수훈의 일단락으로 되어 있는 5장 48절에서 "하느님이 완전힌 것처럼 너희도 완전하라"로 끝맺는 것은 쿰란의 이해와 상통하는 것으로 보인다.

루가에 있어서 "가난한 자"는 결핍된 상태로서 무엇을 필요로 하며 남의 도움을 요청할 수밖에 없는 약자의 모습인 데 대하여, 마태오는 "영에 있어서"를 부가시킴으로 이런 소극적인 의미에서 적극적인 성격으로 전환한다. "영에 있어서"의 '영'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가능성이지 종교적 또는 신적인 것이 아니다(26, 41. 27, 50).72)G. Strecker, Die Bergpredigt. Ein exegetischer Kommentar, Göttingen, 1984, S. 33. 가난한 자는 약하고 수동적이고 수혜적인 위치에 있지만, 영에 있어서 가난한 자는 능동적인 의식을 갖고 대처하는 자를 말한다. 즉 주체적 의식으로 윤리화되고 정신화된 민중을 말하는 것이다.73)쇼트로프(L. Schottroff, op. cit., 162ff.)가 듀퐁(J. Dupont), 퍼시(E. Percy) 등의 해석을 비판하면서 "영에 있어서"를 이원론적으로 이해될 소지를 경고하는 것은 옳다. 그러나 그것을 '신마저 찬양'할 수 없는 고난당하는 민중의 상태로 보려는 것은 무리이다. 그러므로 그 다음의 적극적 조항들과 관련을 짓지 못한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루가의 병행구는 "굶주린 자는 복이 있다"라고만 되어 있는데, 마태오는 "의를 위해서"(τὴνδικαίοσυνην)라는 말을 첨부함으로써 역시 위의 경우와 같이 단순히 결핍된 상태로 인해 남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약자가 아니고,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불의에 맞서고 의를 위해 행동하는 적극적인 입장에 선 자로 그 성격을 바꾼다.74)그룬트만(W. Grundmann, op. cit., S. 126~127)은 유다 해석 전통을 정밀하게 밝혔다고 하면서 "'육체적 결핍'을 넘어서면서 동시에 그것을 내포한다"고 한다. 이에 대해서 6절과 10절과 같은 것으로 박해받는 자로 본다. 그외에 마태오에만 실려 있는 다른 축복의 대상들도 슬퍼하는 자를 제의한 나머지는 모두 윤리적이나 사회적으로 위의 것과 유사하게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민중을 말한다.

 

온유한 자 : "'온유한 자'는 땅을 차지하리라"는 말은 시편 37장 11절을 인용한 것인데, 시편의 문맥을 전제한 것이라면 악한 자들과는 상반된 자들로서 악의 세력에 대치되는 뜻으로 적극적인 의미를 갖는다. 루츠(U. Luz)는 게히터(P. Gaechter)가 이것을 '수동적 저항'이라고 하고 그레고르(G. Gregor)는 불의와 폭력을 용인하지 않는다고 한 견해를 소개하면서 이것이 우애(Freundlichkeit)를 나타내는 '겸손함'을 뜻한다고 한다.75)U. Luz, op. cit., S. 209. 11장 29절과 21장 5절 등에 있는 이 단어(πραΰς)에는 비폭력 저항의 뜻을 반영되어 있다. 마태오의 현실에서 볼 때, 이 말이 폭력으로 팔레스틴을 포함하여 약한 민족의 땅을 뺏은 로마를 의식한 것임을 전제하면 온유한 자가 땅을 차지할 것이라는 뜻은 마태오가 비폭력적 저항을 말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자비한 자, 마음이 깨끗한 자 : "자바한 자"란 역시 결핍된 상태로 있는 자가 아니라 능동적으로 자신을 필요로 하는 약자에게 베푸는 적극적인 자세를 취한 사람을 의미하며, "마음이 깨끗한 자" 역시 주체적으로 자기를 정화한 자를 말한다. 자비한 자(ἔλεημων)는 루가가 쓰는 자비로운 사람(οἰκτρμων)(6, 36)과는 차이가 있다. 후자는 인간의 감정을 나타내는 데 대해 전자는 행동을 더 강조한다.76)H. Cremer, Biblischtheologisches Wörterbuch des NT Griechisch, 1923, S. 422. 그런데 마태오는 이것을 예외 없이 라삐 유다교를 비판할 때 내세워(9, 1312, 723, 23) 저들의 율법주의적 탄압에 맞서고 있다.

마음이 정결한 자(οἱ καθαοὶ τη καρδια)는 당시 라삐 유다교의 의식적(儀式的) 정결주의의 반제(反題)로 내세운 것이다.77)G. Strecker, op. cit., S. 42; W. Grundmann, op. cit., S. 129. 이것은 시편 24장 3~5절을 배경으로 한 것으로 신비적 환상에 빠지거나 삶을 떠난 내적 정숙상태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의지적 결단과 관련된 것이다. 악에 굴복하지 않고, 강자에게 눌리거나 유혹되어 자기를 포기하지 않고, 주체적 순수성을 갖고 현실을 직시할 수 있는 상태를 말한다.

 

화평케 하는 자 : '화평케 하는 자'(εἰρηνοποιοι)는 평화를 실천하는 자(εἰρηνοποιος, peacemaker)로서, 작게는 개인관계에서부터 크게는 세계평화에 기여하는 자를 말한다. 이미 세계정복에 나선 알렉산더 대왕이 근동의 '희망'에 영향을 받아 지배자의 '신(神)의 아들 됨'과 '평화를 가져오는 자'를 결부시킨 것을 모방하여 로마가 세계를 폭력으로 흡수하면서 로마의 평화(Pax Romana)를 내세웠다.78)W. Grundmann, op. cit., S. 131. 마태오는 이에 대치되는 민중에 의해서 이루어질 참 평화를 의식하면서 이 말을 전승했을 가능성이 크다.

 

의를 위해서 박해를 받는 자 : '의를 위해서 박해를 받는 자'(10절)는 6절의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와 관련되면서 동시에 일보 전진하여 의를 위해서 투쟁에 나선 민중을 나타내고 있다.

이상과 같이 개관해보면 한결같이 마태오의 오클로스 또는 라오스는 마르코복음서의 오클로스와는 달리 적극성을 띤 의식화된 자들로서, 의식적으로 자기를 확립하고 현실에 참여하는 민중으로 그 성격 이 바뀐 것을 볼 수 있다.

 

(2) 의(δικαίοσυνη)로운 자

의로운 자로서의 민중 : 마태오는 이미 축복에서도 '의에 주리고 목마른자'를 내세웠다. 그런데 마태오만이 유달리 '의'를 강조하는데, 산상수훈에만 다섯 차례나 반복된다(5, 61020; 6, 16, 33).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의가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의보다 낫지 못하면 너희는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5, 20).

이것은 바리사이파가 주도하는 지도체제에 의해서 정죄되고 죄인들로 간주되고 있는 민중에게 향한 말로서, 마태오의 민중관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것은 이 민중이 이제는 라삐적 유다교를 능가하며 그 주도권을 뺏어야 한다는 선언일 뿐 아니라, 이것이 바로 궁극적인 새 세계(하느님의 나라)에 참여하는 자의 삶의 열쇠가 된다. 그 다음에 전개되는 실천항목들을 이끌고 가는 열쇠가 바로 이것이다.79)불트만(R. Bultmann, Die Geschichte der synoptischen Tradition, 1967, S. 147)은 5장 20절은 그 다음(21~48절) 문장의 서문이거나 표제로서 마태오에 의한 것이라고 보고 하느님 민중의 전체 삶의 지침을 알게 하는 열쇠라고 한다(W. Grundmann, op. cit., S. 151).

마태오는 예수가 세례를 세례자 요한에게서 받는 이유도 하느님이 의롭게 여기는 일을 이루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그는 이와 더불어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6, 33)고 함으로써 예수의 행로의 목표와 민중의 과제를 일치시키고 있다.

또한 마태오는 유다 종교지도층을 비판하면서 저들이 세례자 요한 이 '의의 길'을 보여주고 제시한 것을 거부했고, 오히려 '세리와 창기'들은 그것을 수용했기에(21, 32) 세리와 창기들이 저들의 기득권을 뺏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고 있다고 선언한다(21, 31). 그런데 바로 이 세리와 창기들이 지도층에 속하는 바리사이파들에 의해서 죄인들로 정죄받은 상징적인 민중이다. 그런데 이 민중이 "저들보다 먼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고 있다"는 예수의 선언을 내세운 것은 바리사이적 시각에서 보면 가히 혁명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축복이야기에 이어 새로 단락을 열고 마태오는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5, 13), "너희는 세상의 빛"(5, 14)이라는 대(大)선언을 전승하고 율법해석의 주도권을 내세우는데 그 열쇠는 바로 라삐들보다 나은 '의'의 실천이다(5, 20). 마르코나 루가에는 소금에 관한 이야기는 있으나 '너희가 세상의 소금'이라는 이야기는 없으며, '너희가 빛'이라는 말은 마태오에 고유한 것이다. 이것은 암흑 속에서 고통받는 민중의 현실에서 볼 때, 너무도 역설적인 선언으로 들린다. 그러나 이것으로 그는 바로 그 시대의 부패상과 절망을 폭로함과 동시에 민중의 세계사적 위치를 대담하게 내세우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율법의 열쇠를 '의'에 둔 마태오는(5, 20) 율법의 유효성을 강조한 다음, 저 유명한 속칭 여섯 가지 반제를 내세운다. 이 여섯 가지 주제들을 보면서 문자적으로 율법에 반하느냐 아니냐를 다루는 것은 부차적인 문제이다. 중요한 것은 율법에 대해서 수동적으로 무조건 복종하는 자세에서 벗어나 능동적으로 재해석하며, 주체적으로 그 본래의 뜻을 성취하는 '의'를 실천하는 데 있다. 마태오는 이렇게 율법에 대한 형식적이고 맹목적인 복종이 아니라 그것의 철저화를 강조함으로써, 마침내 라삐 유다교 밑에서 굴종하는 민중의 자세와 대조시키고, 한걸음 더 나아가서 자기 확립을 향해 달리는 민중상을 제시하고 있다.

그 다음 6장 이하에 이어지는 유다교의 3대 경건의 덕목에 대해서도 마태오는 먼저 '의'의 실천(6, 1)으로 시작한다.80)한국어판 새번역은 '의' 대신에 '구제', 공동번역은 '선행'으로 번역되었고, 개역만이 정확히 번역되었다. 그리고 그 철저화를 주장함으로써 관습적 굴종에서 벗어난 주체적 실천의 길을 제시한다.

 

(3) 최후의 심판의 비유(25, 31~46)

이것도 마태오만이 전하는 고유한 전승이다. 이 이야기의 주제는 두말할 것도 없이 민중이다. 심판의 기준이 바로 민중을 어떻게 대했느냐에 있는 것이 이 점을 명시한다. 주린 자, 목마른 자, 집 없이 떠도는 나그네, 헐벗은 자, 병든 자 그리고 감옥에 갇힌 자 등은 모두 마르코의 오클로스와 같은 성격의 사람들이다. 그런데 나열된 민중의 성격들은 반드시 이 본문에서만 나오는 독특한 것이 아니라 이미 유다교에서도 시혜의 대상으로 자주 사용되는 가난하고, 눌린 자를 일컫는 관용적인 표현이다. 그러나 감옥에 갇힌 자는 유다교에서도 그리고 신약의 다른 곳에서도 볼 수 없는 고유한 것이다.81)J. Jeremias, Die Gleichnisse Jesu, 1958, S. 174. 이것은 특히 이미 박해를 받고 있는 그리스도교인들, 그중에서도 유다계 그리스도교인들의 현장을 나타낸 것으로 보인다.

유다계 그리스도교인들은 유다인이면서 그리스도교인이라는 이중적인 이유 때문에 더욱 극심한 박해를 받아왔다. 그러므로 감옥에 갇힌 자는 다른 기층 민중과는 달리 더 처참한 경우에 놓인 자들이기는 하지만 의식화되고, 그것을 행동화한 사람들임을 말한다.

그런데 이 이야기에 대해서 논란이 있다.82)J. Jeremias, loc. cit. 먼저 이 비유는 마태오의 맥락에서 볼 때도 너무도 돌출된 이질적인 것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사실상 마태오는 어느 복음서보다도 교회 질서나 교회원의 생활 원칙을 강조하는 데 엄격했다(18, 15~17 참조). 그는 토라를 위시한 후기 유다교의 전통마저도 비록 새롭게 해석하나 여전히 새로운 공동체에 유효한 것으로 강조했다. 그리고 그리스도교의 선생들을 '라삐'라는 명칭으로 부르기까지 한 유일한 사람이고, 또 실제로 그의 해석방법이 라삐적이라고 하는 것은 이미 위에서 지적한 대로이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이미 당시에 줄거리가 형성된 그리스도교 교리(케리그마)를 전수받아 이것을 유다교에 접맥하고, 그들의 유산이나 관습으로 그리스도교의 교리를 납득시키려고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러나 이 심판기준에는 교회의 규율이나 교리, 그중에도 의인론(義認論) 범주에 들어가는 요소는 전혀 없다.83)R. Bultmann(op. cit., S. 154)은 그런 뜻에서 이 이야기는 그리스도교인과 비그리스도교인의 구별이 있기 전에 착상되었을 것이라고 한다.

둘째로, 이 심판자가 불투명하다는 것이 문제다. 처음에는 그를 '인자'라고 한다. 그런데 다음에는 '임금'이라고 하고, 같은 절에서 "내 아버지의 축복을 받은 사람들아!"라고 하여 심판자가 '신의 아들'이라는 뜻을 반영한다. 그런가 하면 심판자가 '나'라는 것으로 거듭 그 위치를 대신하기도 하고, 심판받는 자의 입을 통해서 '주'라고 표현되어 있으며, 마지막으로 '임금'이라는 말을 반복하는 것으로 끝낸다.

심판자는 원래 '메시아'였던 것이 마태오에 의해 '인자'로 대치됐다는 것이 정설이다.84)W. Grundmann, op. cit., S. 525~526: E. Schweitzer, op. cit., S. 310f. 그런데 유다교 전통에서는 천사들을 들러리로 삼은 인자라는 상(像)은 전혀 없으며85)Str-Bill, op. cit., S. 973. 또 '메시아'를 임금이라 호칭한 것도 그에게 부합되지 않는다. 유다 전통에는 인자를 임금으로 부른 것도 낯설다.86)F. Hahn, Christologische Hoheitstitel, 1963. S. 187. 그러므로 이것은 적어도 유다 관습을 따른 것이 아닌 특이한 그리스도교적 입장을 반영했음에 틀림없다.

연구가들은 이 심판자는 결국 '그리스도'라는 견해에 도달한다. 그리고 심판자가 자신과 일치시키는 대상을 보아 예수와 관련짓고 있다고 본다.87)R. Bultmann, op. cit., S. 130; J. Jeremias, op. cit., S. 173. 그런데 마태오가 그처럼 심판자를 다양하게 상징함으로써 그 상징적 칭호를 바꾸는 것은 상징적 칭호 자체를 중요시하지 않음을 불행하게도 인식하지 못한다. 이 이야기의 열쇠는 바로 그 심판자가 어떤 위치에 자신을 세웠느냐 하는 물음에서 얻어진다.

셋째의 문제는 심판의 대상은 '모든 민족들'(πάντα τὰ ἔθνη)인데, '지극히 보잘것없는 사람에게', '가장 작은 자'(ἐλάχιστος)(4045절)를 어떻게 이해하느냐 하는 것이다. 사람들 중에는 그 앞에 있는 '나의 형제'라는 단서에 의해 그들을 바로 마태오가 속한 공동체로 보려고도 하고, 좀 넓게는 유다 그리스도교인이라고 보며, 일부는 예수 직후의 이른바 유랑 설교자(Wanderprediger)일 것88)정양모 역주, 『마태오복음』, 220면.이라고 한다. '세계'를 '모든 민족들'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마태오적이다.89)마태 24, 924, 14; 28, 19 참조. 또 '작은 자(μίκρος) 가운데 하나'라는 표현을 마태오는 상용구처럼 사용한다.90)마태 10, 42; 18, 618, 1018, 14. 그중 10장 42절에서는 "예수의 제자"라는 전제가 있고, 18장 6절에는 "나를 믿는 자"라는 전제가 있다. 그러나 뒤이은 18장 10절과 14절에는 그런 전제 없이 그저 "작은 자"라고만 하는데, 25장 40절에는 "나의 형제"라는 단서가 붙고 45절에는 그 단서가 없다. 그러나 40절에는 그것이 없는 사본들도 있다.91)E. Schweitzer, op. cit., S. 311.

위에서 말한 대로 이 이야기의 초점은 심판자 자신에 대한 해명이다. 이 심판자는 이름이 무엇이든지 간에 심판의 기준을 고난당하는 민중을 중심으로하고, 심판자는 바로 수난자와 자신을 동일시한다는 것이 핵심이다.92)H. Braun, Spätgud, häret, u, früchristlicher Radikalismus II, 1957, S. 94. 그런데 이와 유사한 것이 유다 문헌에도 있기 때문에 중요시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유다 문헌에 가장 흡사한 것은 "나의 아이들아! 너희가 가난한 자들에게 먹을 것을 주었다면 나는 마치 너희가 나에게 먹을 것을 준 것처럼 간주하리라"(Midr. Tann, 신명기 15장 9절에 관해서)인데, 이 이야기에는 심판자와 민중 사이에 '마치'라는 어휘가 들어갈 틈이 없다.93)슈바이처(E. Schweitzer, op. cit., S. 311)는 이 이야기는 '마치'를 넘어선다고 한다.

그중 축복받은 사람들은 민중에게 행한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다. 이것은 주객적(主客的) 행위가 아닌 그 민중과 자신들의 일치성을 잘 나타낸다. 이와 반대로 저주받은 자들은 그런 사실을 알았더라면 그렇게 실천했을 것이라고 장담한다. 그것은 바로 저들이 민중에게 그와 같은 실천을 했다고 해도 그 행위는 대가를 전제한 행위로 '마치'를 삽입한 행위일 수밖에 없다.

슈바이처(E. Schweitzer)는 이 심판자가 그리스도일 것이라는 결론을 내리면서도 다음 두 가지 사실을 의도적으로- 지적한다. 하나는 예수가 가난한 자들과 자신을 동일시했다고 볼 수 없다는 것이고, 둘째는 심판자로서의 그리스도가 비록 수난당하는 자들과 자신을 일치시켰다고 해도 그 민중에게 흡수되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심판 자와 피심판자의 위치는 확고하게 구별되어야 한다는 점이다.94)E. Schweitzer, op. cit., S. 312. 이것은 전통적인 그리스도론의 수호자로 자처하는 서구 신학자의 전형적인 입장이라 하겠다.

여기서 예수가 민중과 자신을 동일시한 점이 바로 그의 삶의 핵심인 것은 새삼 거론할 필요가 없다. 이러한 마르코적인 예수의 상(像)은 마태오에도 그대로 전승되고 있다. 다음으로 지적할 것은 이 이야기에서'이 심판자가 어떤 위상을 가졌느냐'가 아니라 '그 심판자가 자신을 어떻게 인식했느냐'가 중요하다는 점이다. 즉 심판자는 수난당하는 자와 자신을 일치시키는 자라는 것이다. 바로 위에서 언급한 슈바이처는 이 이야기는 본질상 19장 28절과 완전히 일치한다고 한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구절은 다음과 같다.

"새 세상에서 인자가 영광스러운 자기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따른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심판할 것이다."

그가 지적한 이 구절은 그가 의도한 바와는 달리 중요한 다른 내용을 시사한다. 그것은 인자가 홀로 심판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따른 너희, 즉 제자들이 함께 심판한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Q자료이다. 그런데 이와 병행구인 루가에 "너희는 내가 시련을 겪는 동안 함께 당해왔으니 이제 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왕권을 너희에게 준다. 너희는 내 나라, 내 식탁에서 먹고 마시며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의 심판관으로 보좌에 앉을 것이다"(22, 28~30)라고 되어 있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세계 심판을 전제하므로 12지파 심판과는 판도가 다르다. 세계 심판의 대상에서 유다인이 제외될 수는 없다. 따라서 마태오가 말하는 '민족'은 맹목적 민족주의가 아니라 민중에 의해 가려져야 할 민족이다.

여기서 루가가 마태오와 다른 점은 인자와 더불어 그를 따르는 자들이 심판자의 자리에 앉는 것이 아니라 그를 따르는 자신들이 심판권을 이양받는다는 것이며, 그 이유는 인자와 더불어 수난을 당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것을 25장의 이야기에 적용시키면 슈바이처의 강조점과는 정반대의 실상이 해명될 것이다.

심판자는 수난자와 자기를 일치시키고 있다. 그것은 주객도식에서의 주체가 객체를 인정한다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수난자 속에 자신을 흡수시켰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 심판자는 수난당한 자와 자신을 일치시킨 자들에게 자신을 일치시킴으로써 축복받은 피고인과 하나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럼으로써 마태오는 박해를 받음으로 그리스도의 민중의 동일성을 새롭게 인식한 그리스도 공동체가 바로 심판자의 위치에 있다는 인식을 수난을 당한 예수 안에서 밝히고 있는 것이다.95)이같은 결론에 당황하는 독자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고린토전서 6장 1~11절을 보라. 바울로는 그리스도교인이라는 자부심을 극대화하여 세계를 심판할 권한만 부여되는 것이 아니라 천사까지도 심판할 권한을 부여받았다고 한다.

 

(4) 전권을 받은 민중

공관복음서에서 '에클레시아'라는 말이 마태오복음서에서만 두 번 사용된다(16, 1818, 17). 원래 '에클레시아'는 희랍 아테네를 위시한 폴리스에서 열린 시민단체의 정치적 집회를 의미한다. 70인역(LXX)에서는 히브리어의 카할(qahal)을 '에클레시아'로 번역하고 있는데, 그것은 이스라엘민의 집회를 뜻하는 것96)신명 4, 109, 1018, 16; 시편 22, 2225, 40107, 32.으로 둘 다 초대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사용하는 교회라는 뜻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 '에클레시아'를 그리스도교의 몸으로 정의한 것은 바울로이다. 이러한 정의는 마태오에서는 볼 수 없다. 그 대신 마태오는 그리스도교 공동체로서의 교회에 특이한 권한을 부여하고 있다.

너는 베드로다. 내가 내 교회를 이 반석 위에 세울 터인데 죽음의 권세가 그것을 이기지 못하리로다. 내가 네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16, 18~19).

일반에게 알려진 대로 마태오는 마르코 8장 27~30절까지를 전승하여 16장 13~28절에 수용하고 있다. 마르코에는 베드로의 그리스도 고백에 대해서 예수는 긍정도, 부정도 않은 채 수난 예고를 한다. 그리고 곧바로 이 수난 예고에 대해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한 베드로가 이 예고에 반대하고 나섰다가 "사탄아, 물러가라!"는 준엄한 책망을 듣는다. 그런데 마태오는 이 베드로의 고백과 예수의 수난 예고 사이에 바로 이같은 고유한 선언을 삽입한다. 이것이 바로 그 다음에 나오는 베드로에 대한 준엄한 책망과 상충된다는 사실을 모를 까닭이 없는 마태오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같은 선언을 삽입한 것은, 이 말을 통하여 그의 주장을 관철하려는 마태오의 강한 의지를 반영하는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이 삽입구 자체를 예수에게 돌릴 수 없다는 것은 이미 정론이 되어 있다. 그렇다면 이것은 마태오의 시대적 의식이 크게 반영된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마태오는 베드로의 그리스도 고백에서부터 수정을 가한다. 마르코는 예수를 단순히 '그리스도'라고 고백하였는데 마태오는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이십니다"라는 말을 첨가한다. '그리스도'가 '기름 부었다'는 의미를 지닌 '메시아'의 번역이고 보면, 그것은 왕이나 대사제에게도 적용되는 것으로 상대적인 의미밖에 없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것에 불안을 느낀 마태오는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말을 첨가함으로써 그의 절대성을 강조하려고 한다. 이 고백에 대해서 마태오는 베드로에게 최대한의 축복을 하는데, 이것도 마태오의 삽입문구이다. 이로써 그는 베드로의 그리스도 고백을 견고하게 하며, 동시에 그 고백을 한 베드로의 위상을 극대화한다. 그런 다음 이 선언이 이어진다. 이 선언에 따르면 교회는 예수를 그리스도요,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한 베드로 위에 세울 것이라는 것이다97)베드로란 아람어 Kepha(바위)의 희랍어역이며 Petros와 Petra는 동의어로 '바위'라는 뜻이다..

그런데 처음에는 역시 아랍 이름인 '시몬 바요나'라고 부르고 새 이름으로 πέτρος(게파)라고 고쳐 부름으로써 그에게 바중을 두는 듯하나, 17절의 축복의 말에서처럼 혈육으로 된 인간 베드로 개인에게 비중을 둔 것이 아니라 견고의 상징인 바위라는 뜻에 비중을 두려고 한다.98)J. Schniewind, op. cit., S. 186. 이 베드로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줌으로써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라고 한다.

이것은 전권(全權) 부여의 선언이다. 베드로는 그러나 가톨릭이 주장하듯이 한 개인이 아니다. 그것은 18장 15~20절에서도 잘 드러난다. 거기에서 또 한 번 '에클레시아'가 언급되고 16장 18절과 같은 내용의 선언이 있는데, 그 대상은 집단개념인 '너희'로 되어 있다. 이것은 곧 그리스도교 공동체이다. 예수를 그리스도요, 하느님의 아들로 고백하는 이 공동체에게 세계 문제에 대한 전권이 부여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면 당시 교회의 사회적 구성원을 생각해보자. 베드로를 상징으로 내세운 그 교회는 어떤 사람들이 모이는 곳인가? 마태오의 현장에서 보면, 그것은 길 잃은 양과 같이 민중화된 이스라엘인이다. 그 구성원이 그 시대의 밑바닥 사람들일 뿐만 아니라 그 공동체 자체의 사회적 위상(status)도 하잘것없는 것이었다. 그것은 말하자면 민중의 교회이다. 이 공동체는 로마제국이라는 커다란 틀 안에서는 물론, 바이사이파가 중심이 되어 재건되고 있는 라삐 유다교의 눈에도 초라한 것이었다. 그런데 마태오는 바로 이러한 지극히 작은 것이 하느님으로부터 전권을 부여받았다는 것이다.

이같은 당당한 선언을 마태오가 해야만 했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유다교와의 대결을 의식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유다 라삐들에게 있어서 '풀고 매는 일'은 구체적으로 율법의 해석권을 독점하여 사람들을 의인 또는 죄인으로 규정하고 민족공동체에 수용하거나 파문하는 권한이다.99)S. LegasseP. L. Poittevin, op. cit., p. 105. 그런데 마태오는 예수를 따르는 자로서의 새 공동체가 율법을 새롭게 해석할 권한을 행사함으로써 해석권의 인계자로 자처했으며, 유다교의 율법을 풀고 매는 권한을 인정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저들의 정죄권을 거부함으로써 민중 편에 섰다. 따라서 유다교에 남겨진 유일한 활동무대인 회당을 "그들의 회당" 또는 "너희 회당"100)마태 4, 239, 3510, 1712, 913, 54.이라고 단정하고 이스라엘민 전체에 군림하려는 독점욕을 거부함으로써 유다 라삐들의 사적 기관으로 그 위상을 축소시키며, 그 회당은 바로 위선자의 소굴이며,101)6장 2, 5절과 23장에서 연속적으로 반영되고 있다. 불의한 박해자의 본거지로 규정한다(10, 1723, 34). 나아가서 그들은 그들의 영향권에 들어온 민(民)을 선도하는 것이 아니라 오염시킴으로써 마침내 악한 게헨나의 자식으로 만들어버린다(23, 15)고 규정한다.

 

(5) 민족의 담을 넘어 세계로 보내지는 민중

마태오의 마지막 단락인 28장 16~29절은 이 민중에게 주는 지상 명령이다. 이 선언의 현장은 갈릴래아에서 민중에게 처음 선언을 하던 바로 그 산이다. 이 지상명령을 받는 대상은 자기가 설 땅을 잃고 박해를 받고 있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스라엘민이다. 그것은 19절에 "너희 모든 민족들을(πάτα τὰ ἔθνη)"이란 말로써 최후심판의 경우와 같이 저들이 유다계의 그리스도인임을 전제한다. 또 그 산을 갈릴래아에 있는 산임을 명기하여 '열한 제자'의 민중성을 밝힌다.102)마르 13, 20; 마태 24, 1410, 1810, 25.

부활한 예수는 그들에게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았다"는 말을 전제하는데, 그것은 베드로의 위에 세운 민중의 공동체에게 주어진 권한과 같은 맥락에 선 말이다. 이런 전권을 가진 예수가 그 민중에게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으라고 한다. 이것은 민족이라는 한계를 철폐하라는 말과는 다르다.103)마태 8장 11절(루가 13, 28~29)은 Q자료로서 하늘나라의 중심이 이스라엘의 선조인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임을 분명히 한다. 그리고 이스라엘민도 심판의 대상이 되며 그 나라는 세계인에게 개방될 것이라고 한다. 이것은 민중적 민족으로서 다른 민족들을 제자로 삼기 위해서 세계로 뻗어나가라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주역의식(主役意識)을 극명화한 것이다. 제자로 삼는 길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예수가 명한 것을 가르쳐서 지키게 하는 일이다.

여기에서 부활한 예수는 전권을 가진 이로 등장하며 그 전권을 저 민중에게 이양한다. 그런 뜻에서 제자들은 부활한 그 예수에게 유일한 신에게 하듯 그 앞에 엎드려 절을 한다. 그리고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는데, 그 가르침의 내용은 예수가 명한 것이라고 한다. 그러면 세례를 주는 것도 오직 예수의. 이름으로 주라고 해야 당연할 터인데 도, '하느님'과 '성령'을 동원한다. 이런 표현은 이미 처음 교회에서 정식화되었으므로104)고전 12, 4~6; 고후 13, 13; 요한 14, 16~17; 요일 5, 5~6 등등. 자명적으로 그것을 인용했을 수도 있으나, 라삐 유다교를 의식하면서 '나자렛파 '혹은 '예수파'라는 제한적 규정을 깨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하느님과 성령을 첨가하여 그 명령의 절대성을 강조하려고 했을 수도 있다.

끝으로 예수가 바로 이 민중적 민족공동체와 세상 끝날까지 항상 함께하겠다고 약속하는 것으로 이 복음서는 끝맺는다. 이 약속은 예수의 탄생설화에서이사야 7장 14절을 인용하여 그 아기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는 것으로 시작되는 것과 맞물린다. 임마누엘은 '하느님아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뜻이다. 어린 아기 예수의 탄생설화가 이스라엘의 민족주의를 강하게 풍기면서 미가 5장 2절의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될 것이다"를 인용하는 것으로 끝을 삼는 것처럼 마태오는 민족주의를 여전히 고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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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병무전집5 |
민중과 성서
(한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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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
예수의 민중사건 : 『민중과 성서』를 내면서
   
제1부 복음서와 민중
   
예수와 민중 : 마르코복음을 중심으로
    1. 전제
    2. 마르코복음 안의 오클로스
    3. 마르코복음에 나타난 오클로스의 성격
        1) 오클로스의 성격
        2) 오클로스에 대한 예수의 행태
        3) 종합
    4. 예수를 따른 자들
    5. 마르코복음 안에 있는 어록
    6. 오클로스의 언어학적 의미
        1) 라오스와 오클로스
        2) 오클로스와 암 하 아레츠
    7. 종합
마르코복음에서 본 역사의 주체
    1. 전제
    2. 마르코의 삶의 자리
    3. 마르코의 민중신학의 기조
        1) 세례자 요한이 잡힌 후(14a절)
        2) 갈릴래아로 가다
        3) 하느님 나라의 도래 선포
    4. 민중의 행태
예수사건의 전승 모체
    1. 문제 제기
    2. 케리그마의 성격
        1) 고린토전서 15장 3~8절
        2) 필립비서 2장 6~11절
        3) 사도행전에 나타난 케리그마
    3. 민중언어의 성격
    4. 수난사
    5. 예수의 행태 일반
        1) 기적 이야기와 예수의 행태
        2) 아포프테그마와 예수의 행태
        3) 로기온(Logion, 어록)과 예수의 행태
    6. 결론
가난한 자 : 루가의 민중 이해
    1. 가난한 자
        1) 통계적 고찰
        2) 루가의 특수자료
        3) 예수의 탄생설화와 나자렛 선언
        4) 마르코와 Q자료
    2. 루가복음서의 청중
    3. 결론
마태오의 민중적 민족주의
    1. 문제 제기
        1) 마태오의 신학적 주제에 대한 논의들
        2) 문제 제기
    2. 마태오가 처한 현실
        1) 마태오와 그의 시기
        2) 민족적 와해 위기
    3. 마태오의 현실인식
        1) 이스라엘 : 길 잃은 양들
        2) 길 잃은 양이 놓여 있는 현실
    4. 민족동일성 재확립
        1) 뿌리 찾기
        2) 바리사이파가 주도하는 라삐 유다교와의 대결
    5. 마태오의 민중 이해
        1) 언어적 성격
        2) 의식화된 민중
    6. 맺는 말
민중신학의 성서적 근거 : 마르코복음을 중심으로
    1. 예수사건의 재발견
    2. 마르코복음과 민중
    3. 민중은 수단이 아니다
    4. 민중은 객체일 수 없다
    5. 십자가는 민중수난의 극치다
민중신학의 어제와 오늘
    1. 독재와 대항하므로
    2. 민중을 만나므로
    3. 민중과 더불어
   
제2부 민중운동사
   
민중사건과 언어사건
    1. 성서에서 본 말의 성격
        1) 그 말의 현장은 어떤 것이었나
        2) 예수의 경우
        3) 예수사건에 관한 전승
        4) 오순절의 말 사건
    2. 무엇으로 말하는 것인가
    3. 해야 할 말은 무엇인가
    4. 우리가 해야 할 말
미래는 가난한 자의 것 : 루가 6장 20~26절
    1. 축복과 저주
    2. 가난한 자와 부요한 자
    3. ‘지금’과 ‘장차’
    4. 우리의 선택
나라가 임하옵소서
    1. 예수의 기도
    2. 그의 기도를 전달받은 자들
    3. 하느님의 나라
고향 잃은 민중
    1. 피난민
    2. 성서에서 본 피난민문제
    3. 게르(GER) 문제 해결의 시도
    4. 이방인에 대한 관용의 한계
    5. 당면한 과제
        1 ) 새로운 인식을 위한 운동
        2) 실천에 대한 몇 가지 제언
이스라엘 민중사
    1. 머리말
    2. 출애굽
    3. 고대 이스라엘 종족동맹
    4. 민중을 배반하고 세워진 왕권
    5. 분단시대의 고난
    6. 민중운동의 여러 계열
    7. 예수의 민중운동
    8. 맺는 말
   
제3부 민중과 체제
   
민중사실의 증언
    1. 민중신학의 전제들
    2. 민중사실의 증언
고난과 고백
    1. 수난자와의 일치
    2. 마르코의 민중
    3. 수난사와 고난
    4. 더불어의 고난
    5. 맺는 말
갈릴래아 민중에 항복한 바울로
    1. 바울로의 위치
    2. 사울은 어떤 사람인가
    3. 그리스도교 박해
    4. 예수를 만남
    5. 전향
    6. 맺는 말
소명(召命)
    1. 바울로의 소명
    2. 사도 됨과 소명
    3. 이방인에게로
바울로와 역사의 예수 I
    1. 머리말
    2. 예수에 대한 바울로의 말
    3. 예수냐 바울로냐
    4. 왜 예수가 아니고 케리그마인가
선택받은 민중: 고린토전서 1장 26~31절
    1. 고린토교회 구성원의 사회계층
    2. 공동체원의 가치 판단 기준
    3. 민중을 보는 눈
    4. 택함을 받은 민중
   
제4부 예수의 희망
   
하늘도 땅도 공(公)이다
    1. 낙원 이야기
    2. 아담一인간
    3. 실락원은 공을 사유화함으로
갈릴래아에서 만나자: 마르코 16장 1~8절
    1. 제3의 자리
    2. 갈릴래아
    3. 갈릴래아에서 만나자
예수의 희망
    1. 새 세계에의 희망
    2. 희망과 세계혁명
    3. 바른 인간공동체의 희망
    4. 맺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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