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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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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병무전집4 |
예수의 이야기
(한길사)
5) 자신을 철저히 비운(空) 자

너희 중 누구에게 밭을 갈거나 양을 치는 종이 있다고 하자. 그 종이 들에서 돌아왔을 때에 '어서 와서 식탁에 앉으라' 하고 종에게 말할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도리어 그에게 '너는 내 저녁식사를 준비하고 내가 먹고 마시는 동안 허리를 동이고 시중들고 너는 나중에 먹도록 하라'라고 말하지 않겠느냐? 명령한 대로 종이 행했다고 해서 주인이 종에게 고마워하겠느냐?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을 받은 대로 다 행한 후에 '우리는 무익한 종들입니다. 우리는 마땅히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하라(루가 17, 7~10).

예수시대에는 물론 군주제도하에 봉건주의가 자명적인 것으로 일반화되어 있을 때입니다. 봉건제도는 가부장제도와 맞물려 있습니다. 봉건제도는 세상을 다스려나가는 가장 중요한 토대로 신분제를 법으로 뒷받침하고, 그것을 마치 자연법인 것처럼 당연한 것으로 국민을 세뇌해왔습니다.

이런 제도 아래서 가장 높은 자리에는 주인이, 맨 밑바닥에는 '종'이라는 신분이 있었습니다. 종은 어디까지나 '종'이지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왕이나 부농이 '왕'이며 '주인'이지 '사람'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 제도는 남자와 여자의 구별에서도 그대로 적용됐습니다. '남자'는 '사람'인데 대해서 '여자'는 '사람'이 아니라 '여자'였습니다. 그러므로 '아담'이라는 것은 '사람'이라는 말이고, 곧 '남자'를 의미했습니다. 이런 습성은 영어에서도 그대로 반영된 듯합니다. '사람'이라는 'man'은 곧 '남자'를 의미하는데, '여자'라는 말은 사람인 'man' 자체를 쓰지 않고 'wo-'라는 것이 덧붙여졌습니다. 이것은 여자는 사회적 측면에서 보면 종과 디를 바가 없었던 흔적입니다.

팔레스틴에서는 여러 가지 동기에서 종이 된 계층이 많았습니다. 크게는 자기 민족 안에서 가난 때문에 강제로 된 종이 있었고, 외국인으로서 군사적 포로가 되었거나 어떤 정치적 동기로 고향을 잃어버린 종들이 많았습니다. 종의 측면에서 보는 인간역사는 비극 중에서도 가장 비극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나 유다인들에게는 선민사상이 큰 영향을 끼쳐 신분적인 종은 없었습니다. 이 말은 인도의 카스트제도나 한국의 노예제도에서 보는 것과 같이 날 때부터 종으로 타고난 사람은 없었다는 말입니다. 그 대신 가난을 이겨내지 못하고 자기 집안 사람, 즉 자식들을 위시해서 아내까지 종으로 팔아버린 경우가 많았는데 자기 가족만이 아니라 때에 따라서는 자기 자신까지도 종으로 내맡기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이것은 신분상의 종이 아니라 계약상의 종입니다.

그렇게 종이 된 사람은 계약한 대로 의무를 다하면 자동적으로 종의 짐을 벗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해서 된 종에 대해서도 성서의 기본정신은 이것을 고정된 원칙으로 삼으려는 '주인들'의 권리를 박탈함으로써 사람들이 노예신분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는 길을 열어놓았습니다. 안식년제도가 바로 그것입니다. 7년에 한 번씩 오는 안식년에는 부채를 갚지 못해 노예가 된 유다 동족을 조건없이 해방시키도록 제도화됐습니다. 그러므로 외국인 종에 비해서 동족의 종의 값은 훨씬 쌌습니다. 까닭은 외국의 종은 일생을 소유할 수 있으나 저들은 안식년에는 복권해주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동족의 종의 값도 안식년과의 거리에 따라 값의 차이가 있었습니다.

예수는 현실적으로 가장 한 많은 종의 경우를 이 이야기의 소재로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모두가 안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가상적인 문답을 취하고 있는데 그 내용을 이야기로 구성하면 이렇습니다.

한 주인에게 예속된 종이 있었습니다. 종은 하루종일 들에 나가서 밭을 갈거나 김을 매고 또 양을 몰고 다니며 풀을 뜯게 하다가 지친 몸으로 주린 배를 안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여느 주인과 마찬가지로 이 주인은 지쳐 돌아온 종을 보고 배가 고플테니 어서 와서 밥부터 먹으라 하지 않고, 오히려 그 종을 기다렸다는 듯이 그가 돌아오자마자 곧 다음 임무인 주인을 위한 저녁식탁을 준비하게 하고, 그가 먹는 동안 배고픈 종이 어느 구석에서라도 허기부터 채우게 하는 것이 아니라 주인들의 식탁 근처에서 허리에 띠를 두르고 대기하고 있으면서 시중을 들고 봉사하게 했습니다. 오랫동안 담소를 즐기며 주인들이 식사를 끝내면 그 상을 다 치운 다음에야 비로소 그 종에게 먹을 수 있는 시간이 허락됩니다.

이 종은 하루 종일 자기가 맡은 일을 주인의 뜻에 맞게 다하고 돌아왔습니다. 물론 주인도 그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주인이 그의 일을 생략해 주는 경우는 없습니다. 하루 종일 일만했으므로 지치고 허기져 있는 종은 주인들의 식탁에 즐비하게 놓여 있는 음식들을 보며 소리없이 침을 삼켰을지 모르나 내색하지 않고 기민하게 제할 일을 착착 진행했습니다. 그러나 주인은 단 한마디도 그 종에게 칭찬하거나 고맙다는 말을 하지 않았으며, 그런 기색조차 내비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일상생활입니다. 사람으로서 더군다나 굶주린 상태에서 참을 수 없는 모멸감인들 왜 없겠습니까! '너도 사람인 것처럼 나도 사람'이라는 분노도 치솟았겠지요. 그러나 그 종은 그런 내색은 않고 속으로 억울한 마음을 품는 대신 '우리야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종에 불과하지, 이렇게라도 생존할 수 있는 것은 이 주인의 덕분이야, 오늘 하루 일이 비록 고되었다고 해도 으레 할 일을 했을 뿐이 아닌가'라고 자신의 처지를 재확인했습니다. 어쩌면 자신을 타이르는 것인 지도 모르겠습니다. 만약 그랬다면 속에서 치미는 감정을 억누르며 마음의 갈등을 겪고 있었다는 증거입니다.

예수가 종의 세계에 주목한 것은 너무도 당연합니다. 여기의 주격은 주인이지만 사실상의 관심의 대상은 종입니다. 주인의 주인된 행동에 의미를 두지 않고 그에 반응하는 종의 자세에 관심을 모으고 있으며, 이 이야기 전체의 무게를 종의 마지막 말에 싣고 있습니다. 예수가 봉건사회의 모순을 구조적으로 꿰뚫어보고 그 비리를 시정하려고 했는지는 의문입니다. 현대인의 눈으로 보면 봉건제 자체를 거부하는 예수의 태도가 뚜렷하게 드러나지 않았다고 하여 일거에 그를 비판하려는 사람들이 있으나 그것은 시대착오적인 억지입니다. 그러나 주인의 입장에서 보는 것이 아니라 종의 입장에서, 남자의 입장에서가 아니라 여자의 입장에서, 권력으로 군림하는 자의 입장에서가 아니라 억압받는 자의 편에서 모든 것을 보고 문제를 제기하는 그에게는 구조적인 시각은 아니더라도 이 세상 전체를 종말적 시각에서 심판의 대상으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봉건제 자체의 모순을 문제의 핵심으로 보려는 현대인의 진단은 봉건제 자체만 해결되면 인간의 영원한 해방이라도 오는 듯이 과장하지만 예수는 그것으로 궁극적 해방이 온다고는 보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흔히 이상주의자들이 하듯이 바람직한 미래상을 전제하고 오늘의 모순이 빚어낸 구체적인 현장을 무시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봉건제라는 구조 속에서 현대인이 사회과학적으로 보는 눈과는 차원이 다른 중요한 인간상을 보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 종의 자세입니다. 그는 억울하게 착취만 당하는 종의 사회적 고통을 같이 아파하면서도 그것을 넘어서서, 인간의 참모습을 종의 자세에서 발견한 것입니다. 그는 민중들, 병자나 사회에서 소외된 죄인들, 그리고 여인들에게서 사회적 분노를 넘어서서 진정한 인간을 보았기 때문에 저들의 친구가 될 뿐만 아니라 현 체제 안에서 스스로 지도자요 엘리트로 자부하는 '의로운' 사람들보다 앞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고 있다"라는 사실을 경험했듯이, 이 종에게서 원래의 인간, 이제 나타나야 할 인간의 참모습을 본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는 이 이야기에서 무엇을 말하려 했을까요? 그는 봉건제 하의 노예제도를 현실로 인정하고 그에 충실한 전형적인 모델로서의 한 종을 보여줌으로써 종의 도리를 알려주려는 것은 물론 아닐 것입니다. 그랬다면 그는 신분사회를 불변의 체제로 전제하고 종은 자기 위치를 운명처럼 받아들여 순종하라는 의미 이상은 없게 됩니다. 위에서 우리는 그의 여러 이야기에서 그가 그 당시의 관습이나 어떤 사건 등을 소재로 하면서 그 안에 담겨 있는, 남의 눈에 감추어진 것을 파헤쳐내어 듣는 사람을 놀라게 한 것처럼, 일반 사람들은 봉건제 속에서 종은 으레 이렇다는 전제를 안고 기껏해야 그 종에 대해 감상적인 동정이나 하는 데 비해 예수는 땅속 깊숙이 감추어진 인간의 뿌리를 찾아냅니다. 이것은 봉건사회에 대한 시비나 종의 해방론이 아니고 그렇다고 종에게 생존을 위한 지혜를 가르치자는 것도 아닙니다. 이것은 참 인간상의 제시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 종의 독백을 다시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독백은 누가 강요하지 않는 종 자신의 자주적인 자기인식입니다. 주인은 종에게 이런 마음씨를 가지라고 강요하지 않습니다. 또 강요할 수도 없습니다. 따라서 주인은 종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관심을 가질 필요조차 없습니다. 주인에게 중요한 것은 종에게 맡긴 일의 성취이지 그 이상은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이 점은 애정을 가진 사람과의 관계와는 다른 것입니다. 가령, 자식에게는 이런 마음씨를 기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일 자체를 넘어선 애정에 대한 기대입니다. 부모가 강권으로 하라니까 싫으면서도 억지로 해치워버리면 된다는 아들의 행위에 아버지는 만족할 수 없습니다. 어쩌다가 아버지는 그 아들이 자기가 시킨 일을 못했다고 하더라도 아버지를 즐겁게 하기 위해서, 비록 결과는 얻지 못했으나 애를 썼다는 사실을 알면 그것만으로 기뻐할지 모릅니다.

만일 이 종의 독백을 그 종의 주인이 요구한 것이라고 이해하면 그런 마음씀 자체도 수동적이므로 주인에게 복종한다는 의미 이상은 없습니다.

예수가 이 이야기를 한 다음 듣는 자에게 이 종과 같이 되기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물론 듣는 자들이 종이 되라는 뜻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종에 대한 주인의 당연한 권리행사를 정당화하고 그에 순종하라고 했을 까닭도 없습니다. 예수가 대한 수많은 민중 가운데 종의 출신은 많았으나 자신과 저들의 관계를 주인과 종의 관계로 언급한 경우는 단 한 번도 없습니다. 단지 그가 종이라는 뜻으로 이야기할 때는 하느님과의 관계에서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비록 그 자신 이 자기를 종이라고 말하지는 않았으나 하느님과의 관계에서는 청중에게 기대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절대복종하는 종의 자세를 취했습니다. '내 뜻대로가 아니고 당신 뜻대로만 하십시오' 하는 종의 자세 말입니다.

그러나 이런 입장을 하느님과의 관계에만 국한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세상에 온 목적을 "섬김을 받으려고 온 것이 아니라 섬기려고 왔다"(마르 10, 45)라고 합니다. 섬긴다는 원뜻은 우리말로 '수종든다'라고도 번역되는데 종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지만 종이 하는 일과 차이가 없습니다. "너희 중에 위대해지고자 하는 사람은 남을 섬기는 사람이 되고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마태 20, 26~27)라고 하는 데서도 남을 섬기는 자(servant)와 종(slave)을 꼭 같은 뜻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런 전제에서 요한은 예수의 겸허함을 상징적으로 나타내어 예수가 마지막에 제자들의 발을 물로 씻어주고 자기 몸에 둘렀던 수건으로 그 발을 닦아주었다(요한 13, 5)고 했습니다. 이렇게 발을 씻겨주는 것이나 종이 주인을 섬길 때, 특히 식사 때 수건을 띠처럼 두르는 것은 종이 주인을 대하는 전형적인 행위입니다. 그리고 예수는 제자들에게 "너희도 이같이 행하라"고 당부합니다.

이 말은 봉건제하에서 숙명적인 신분으로서 종이 되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예수 자신은 물론 종의 신분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사랑이 그로 하여금 종이 되게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세상 사람을 섬기러 왔다"라는 말은 바로 '사랑한다'라는 고백으로 대치시킬 수 있습니다. 사랑은 아무리 봉건제하에서 절대권을 가진 왕이라도 명령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사랑은 오직 주체적으로만 가능합니다. 사랑은 봉건제를 넘어서고 체제 안의 절대 권을 쥔 사람도 관여할 수 없는 고유영역에 속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은 주체자가 된다는 사실입니다. 종은 주인의 발만 씻는 것이 아니라 그 이상의 것도 다 할 수 있으나 그에게 사랑을 강요할 수는 없습니다. 반복해서 말합니다. 비록 종의 입장에 있어도 사랑할 수 있을 때만큼은 주체자가 됩니다.

이 종의 이야기에 나오는 것처럼 그가 관습대로 하루 종일 일에 시달려 파김치가 됐어도 집에 돌아와서 주인을 섬기는 의무를 다해야 하는 것까지는 강요받은 의무입니다. 그러나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nothing)', '나는 내 할 일을 다했을 뿐이다(nothing)', 그러므로 일체의 공로심에서 해방되고 자기 마음을 철저히 비운 '공'(空)의 경지는 사랑만이 가져다줄 수 있는 삶의 자세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하면 할수록 수고했다는 공로심 따위는 물론이고, 자기가 한 일을 전혀 기억조차 하지 않게 되기 때문에 권리의식은 고사하고 사랑을 다하지 못했다는 죄의식만 갖습니다.

그렇다면 예수가 이렇게 종을 예로 들어 사람의 참모습을 보여주고 그렇게 되기를 바란 것은 결국 사랑함으로써 주체적이 되라는 뜻으로 받아들일 때에만 이 이야기의 핵심에 접근할 수 있을 것입니다.


| 안병무전집4 |
예수의 이야기
(한길사)
List of Articles
표지
예수는 논하지 않았다
   
제1부 민중의 언어, 이야기
   
1. 성서라는 책의 성격
2. 성서의 서술양식
    1) 구약성서
    2) 신약성서
    3) 민중언어
   
제2부 예수의 이야기(비유)
   
1. 만성병에 걸린 세대
    1)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2) 이 때를 모르는 세대
    3) 악마가 악마라는 죄목으로 박해하는 세상
    4) 어둠에서 썩어가는 세대
2. 잃어버린 자를 찾아서
    1) 목동과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
    2) 잃은 돈 찾은 여인
    3) 돌아온 아들의 아버지
3. 가치의 전도
    1) 누가 ‘그’의 이웃이냐?
    2) 오! 하느님!
    3) 부자의 돈과 과부의 돈
    4) 말만 하는 자와 실천하는 자
    5) 자신을 철저히 비운(空) 자
4. 집요한 투쟁(간구)
    1) 참는 데도 한계가 있다
    2) 닫힌 문
    3) 빚진 자의 엉뚱한 마무리
    4) 한 과부의 투쟁
    5) 친구를 위한 투쟁
5. 심판
    1) 공존의 때와 심판의 때
    2) 그물 안에 든 고기
    3) 심판과 맡은 분깃
    4) 심판과 대비
    5) 너무도 어리석은 부자
    6) 한 부자와 거지
    7) 뜻밖의 심판의 기준
    8) 심판은 바로 관용의 한계
    9) 이미 문이 영원히 닫혔을 때
6. 하느님 나라에 관한 이야기
    1) 제 손으로 심은 씨가 어떻게 자라는지 알지 못하는 농
    2) 겨자씨 이야기
    3) 조용한 혁명(누룩의 이야기)
    4) 그만이 아는 숨겨진 보화
    5) 한 장사꾼의 모험
    6) 해방의 기쁨
    7) 밥상공동체
    8) 손익계산이 없는 세계
    9) 절망과 희망(씨 뿌리는 농부)
   
제3부 성서해석권은 민중에게
   
1. 한 책에 대한 두 가지 이름
2. 성서의 열쇠는 주머니 속에
3. 성서의 전승을 위한 노력들
4. 종교개혁시대와 성서해석
5. 다시 빼앗긴 성서해석의 권리
6. 성서해석권을 되찾으려는 평신도운동
7. 성서의 전승모체
8. 신약성서 성립
    1) 민중과 '지도층'의 상충
    2) 마르코복음의 성립
9. 제 것을 지키지 못하는 주인
   
제4부 역사의 예수
   
1. 역사의 예수
    1) 역사의 예수 추구
    2) 자료
2. 예수의 시대상
    1) 정치적 상황
    2) 유다 사회상
3. 공생애의 출발
    1) 세례자 요한
    2) 세례자 요한이 잡힌 후
    3) 갈릴래아로
4. 갈릴래아의 예수
    1) 민중과 더불어
    2) 제자 선택
    3) 예수의 시선이 머문 대상
    4) 자유를 위한 투쟁
    5) 하느님 나라의 선포
5. 예루살렘의 예수
    1) 예루살렘
    2) 예루살렘행
    3) 예루살렘 입성
    4) 죽음의 전야
    5) 심문과 처형
6. 그는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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