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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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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병무전집4 |
예수의 이야기
(한길사)
4. 집요한 투쟁(간구)
1) 참는 데도 한계가 있다

예수께서 무리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자기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었는데 그 나무에서 열매를 얻을까 하고 와보니 열매가 하나도 없었다. 그래서 포도원지기에게 말했다. '보라, 내가 무화과나무의 열매를 얻을까 하여 삼 년 동안이나 와보았는데 열매가 하나도 없다. 이 나무를 찍어버려라. 무엇 때문에 땅까지 못쓰게 두겠느냐?' 그러니까 포도원지기가 대답했다. '주인이여, 그 나무를 금년 한 해만 그냥 두십시오. 그 동안에 내가 그 둘레를 파고 거름을 주겠습니다. 그래서 다음 철에 열매를 맺으면 좋고 열매를 못 맺으면 찍어버리십시오'"(루가 13, 6~9).

이 이야기는 포도원이 그 현장입니다. 소재는 포도원을 가꾸는 일꾼이거나 포도나무 자체가 아니라 포도원에 심은 무화과나무로 되어 있습니다. 팔레스틴에는 일반적으로 포도원에는 포도나무만 심는 것이 아니라 포도 재배에 알맞은 나무를 함께 심는데, 그것은 포도 나무를 받쳐주는 데 이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무화과나무도 유다 사람들이 즐겨 먹는 열매를 맺습니다. 무화과나무는 비교적 아무 데나 심어도 잘 자라기 때문에 곡식이 잘 안 되는 박토에도 심습니다. 그 대신 이 나무는 다른 나무보다 땅의 영양분을 많이 빨아들입니다. 그래서 자주 땅을 바꾸어 심어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무화과나무는 포도나무가 빨아들여야 할 땅의 양분까지 뺏어버릴 수 있기 때문에 일정한 거리를 두고 심어야 합니다.

무화과나무는 성장속도가 빨라 만 3년만 되면 열매를 따먹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포도원에 심은 무화과나무는 3년이 다 지났는 데도 열매를 맺지 않았습니다. 주인은 그로부터 또 3년 동안이나 그 나무가 열매를 맺을까 하여 지켜보았으나 여전히 허탕이었습니다. 주인은 마침내 화가 났습니다. 더 이상 그 나무에게서 열매를 기다리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판단이 섰습니다. 보통 나무는 열매가 없어도 다른 데 쓸 수 있지만 열매나무가 열매를 맺지 못한다면 그대로 놔둘 아무런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이 무화과나무는 땅의 양분을 많이 빨아들이므로 땅까지 못쓰게 만드니까 그대로 내버려두면 그만큼 손해가 될 뿐입나다. 3년을 기다리던 주인은 마침내 그가 고용하고 있는 포도원지기에게 이렇게 지시했습니다.

보라, 내가 무화과나무의 열매를 얻을까 하여 삼 년 동안이나 와 보았는데 열매가 하나도 없다. 이 나무를 찍어버려라. 무엇 때문에 땅까지 못쓰게 두겠느냐?(루가 13, 7)

일반적으로 열매가 맺는 3년을 기다리던 그는 열매가 맺지 않자 또다시 3년 동안이나 그 나무에 열매가 맺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오랫동안 기다리던 그가 마침내 그 나무를 찍어버리라는 것은 그 나무가 더 이상 열매 맺을 가능성이 없다는 결론입니다. 즉 희망이 없다는 것입니다.

가능성이 없는 것은 살아 있어도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사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가능성이라고 하겠습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은 가능성이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지금은 미숙하다는 말도 되겠으나 그가 발전하여 기대 이상의 사람이 되고 어쩌면 깜짝 놀랄 만큼 쓸모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괄목상대(刮目相對)라는 말이 있습니다. 가령 아이 때 만난 사람을 몇십 년 후 다시 만났을 때 너무도 달라져서 저 사람이 정말 그 사람인가 싶어 자기 눈을 의심하여 정확히 보려고 눈을 비비고 그를 똑바로 쳐다본다는 말입니다. 달라졌다는 것은 사람 됨이나 학식이나, 나아가서는 사회적 지위가 그렇게 깊고 높아졌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어릴 때에는 촉망되는 하나의 가능성에 불과했는데, 지금은 그 가능성이 실현되어 구체적 열매를 맺은 것을 보고 새삼 놀랐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어릴 때에는 아주 잘못될 소지가 많아 보인 사람이 절망하지 않고 노력하면 달라질 수 있을 것이라는가능성에 기대를 가졌다가 성인이 되어 만났더니, 전혀 달라지지 않고 오히려 그때보다 더 나빠져서 돌이킬 수 없는 사람으로 비쳤다면 그는 '잘될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는 둥, '쓰레기통에서 장미가 피겠는가'라는 둥 단번에 그에게서 머리를 돌려버리고 맙니다. 그를 사람으로서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에게 더 이상 어떤 가능성도 보지 않습니다. 이것은 비록 그에게서 목숨을 앗아버린 것이 아니더라도 속마음으로는 사형선고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이 포도원 주인이 무화과나무를 잘라버리라는 것은 바로 사람에게 절망하여 사형선고를 내리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이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는 절망을 딛고 또 한 번 그것에 기대를 걸어봅니다. 그것은 포도나무지기의 간청에서 연유합니다. 지시대로 그 나무를 찍어내야 할 그는 "주인이여, 그 나무를 금년 한 해만 그냥 두십시오. 그 동안에 내가 그 둘레를 파고 거름을 주겠습니다. 그래서 다음 철에 열매를 맺으면 좋고 열매를 못 맺으면 찍어버리십시오"라고 말합니다. 주인은 절망했기 때문에 제거해버리기로 결심했으나 이 같은 간청이 아직도 미련을 버리지 못 한 주인의 마음에 힘을 준 것입니다. 그는 속으로는 '특별한 방법을 쓰더라도 그것이 열매를 맺는다면 얼마나 좋으랴!'라는 바람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포도원지기의 간청에 못이기는 듯하면서 다시 한 번 희망을 가져보기로하고, 무화과지기의 제안대로 둘레를 파고 거름을 듬뿜 주고 한 해를 더 기다리기로 한 것입니다.

과일나무가 열매를 맺으면 그 열매를 따서 먹고 열매를 맺지 않으면 경제적 조건 등을 고려해서 그 나무를 잘라버리고 새것을 심거나 다른 나무로 대치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그런데 예수는 3년이 지났는데도 열매를 맺지 못한 무화과나무를 보면서 그 나무의 운명을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저대로 두면 저 나무는 결국 주인의 분노를 사서 잘리고 말 텐데, '나무를 응시하며 이런 생각을 하던 그는 관심을 사람들에게 옮겼을 것입니다.

그는 제자들이 "잘못한 것을 몇 번이나 용서할 수 있느냐?"라며 "일곱 번까지 용서하면 됩니까?" 하고 물으니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끝까지 용서하라는 말로서 결국 사람에게 절대로 절망하지 말고 언제나 가능성으로 대하라는 뜻이 되겠습니다.

그러나 이와 정반대의 모습도 여기저기 전해지고 있습니다. 우선 예루살렘으로 향하던 예수 일행이 배가 고팠을 때 발견한 무화과나무가 열매를 맺지 못한 것을 보고 예수가 저주해서 그대로 말라죽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것은 그가 가려는 예루살렘을 위시한 도시들에 대한 그 시대의 분노의 극치를 상징한 것입니다. 그는 고라신, 베싸이다 등의 도시들에 대해서 저주와 같은 분노를 터뜨립니다. 그 도시들에 대해서 "심판날에는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라는 절망적인 선언을 합니다. 마지막에 나오는 예루살렘 성전에 대한 저주도 마찬가지입니다. 성전을 보고 "하느님께 버림을 받을 것이다"라고 선언합니다. 이것은 사형선고와 같은 것입니다.

예수는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를 보며 마지막 심판에 견디어낼 수 없을 인간세계의 운명을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직도 절망을 유보합니다. 어떤 구원의 가능성에 대한 일말의 기대를 버리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는 하느님께 일 년만 더 말미를 달라고 간구하는 자신을 이렇게 노출했을 수 있습니다.

포도원지기는 한 해만 기다려주면 "그 둘레를 파고 거름을 주겠습니다"라고 하면서 그래도 "다음 철에 열매를 못 맺으면 찍어버리 십시오"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끝납니다. 여기서 주인이 그의 뜻을 따랐는지 물을 필요는 없습니다. 그것은 그 주인의 생각이니까요. 원래 무화과나무에 거름까지 주는 경우는 별로 없다고 합니다. 구약을 위시해서 어느 유다 문헌에도 무화과나무에 거름을 주었다는 이야기는 없습니다. 무화과나무에 거름을 주고 노동력을 투입한다면 채산이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주인의 또 한 번의 인내와 기다림은 채산을 넘어선 것입니다.

이 이야기가 포도원지기의 간청으로 그치고 그후의 결과가 어떻게 됐는지를 말하지 않는 것은 예수의 이야기의 특징이기도 합니다. 땅에 숨은 보화 이야기나 진주를 찾은 이야기에서 그랬던 것과 같이 이 이야기도 그 다음의 결과를 말하지 않는데, 이것이 예컨대 열매를 맺고 안 맺는 것이 '미래'라고 하면 그 초점을 '미래'에 대한 관심에서 '현재'로 옮겨오는 예수의 특이한 화법(話法)입니다.

이것으로 그는 바로 이 시기가 어떤 때인지 그 성격을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행실 또는 작태로 보아 이미 제거되었어야 할 것인데, 그 집행을 일 년간 유예받은 것과 꼭 같은 상태에 있다는 것입니다. 마치 도끼를 나무뿌리에 놓고 있는 것과 같은 상황입니다. 글자 그대로 마지막 기회입니다. 이해에 열매를 맺지 못하면 그 도끼를 들어 나무를 자를 것입니다. 그때는 이미 늦은 때입니다. 참는 데도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는 이 이야기를 통해서 임박한 심판 앞에 선 사람들에게 마지막 경고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존재의 본래 모습이기도 합니다. 산다는 것은 언젠가 찍힐 도끼를 곁에 놓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사람이란 언제든지 죽을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꼭 어느 나이가 돼야 죽는다는 법은 없습니다. 늙어서도 죽지만 어떤 불의의 병으로 죽을 수도 있고, 예기치 못한 사고를 당해 죽을 수도 있습니다. 요새는 전쟁중에 죽는 사람들보다 차에 치여 죽는 사람이 더 많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러니 사람은 3년이 이미 지나고 또 3년이 더 지난 무화과나무와 같은 존재입니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이미 찍혀버렸어야 할 운명이 일 년 더 연장된 잉여의 인생도 많습니다.

끝으로 한 가지 덧붙여 언급할 것이 있습니다. 이 이야기에 나오는 "포도원 주인은 하느님이고, 포도원지기는 예수다"라는 설교를 교회에서 자주 듣습니다. '예수는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중재자'라는 교리를 전제하기 때문에 이런 풀이를 하는 것으로 압니다. 이 풀이대로 하면 하느님은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서 인류에게 종말을 선언하려고 하는데, 예수가 사람 편에 서서 간청하여 '일 년'이라는 유예기간을 얻었다는 뜻이 됩니다. 유예기간은 바로 구원의 때 또는 메시아(시대)라고 합니다. 그리고 지금이 바로 그때이므로 이 기회에 철저한 회개와 사람으로서 할 일을 충실히 함으로써 종말 때에 멸망을 피해야 한다고 설교합니다.

그런데 밀밭에 뜻하지 않게 나은 가라지의 비유도 형식면에서 놀랍게도 이 이야기와 같습니다. 거기에 주인이 있고 그 중간에 종이 있습니다. 이 종은 바로 밭의 곡식과 주인 사이에서 그의 이견을 말할 수 있으니 역시 중재자의 위치에 있는 셈입니다. 그런데 그 종과 주인의 입장은 이 이야기와 정반대입니다. 그 종은 가라지를 당장 뽑아버리자고 제의합니다. 이 중재자(종)는 심판, 즉 분노를 앞당기자는 입장에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 주인은 오히려 추수할 때까지 참고 기다리라고 합니다. 물론 그 기다리는 이유는 무화과나무의 경우와는 다릅니다. 그러나 기다린 끝에 종말적인 심판이 올 것이라는 전제는 둘 다 같이 가지고 있습니다. 하여간 위에서 예를 든 설교에서처럼 중간에 선 사람을 '예수'라고 고정시켜버리면 엉뚱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 안병무전집4 |
예수의 이야기
(한길사)
List of Articles
표지
예수는 논하지 않았다
   
제1부 민중의 언어, 이야기
   
1. 성서라는 책의 성격
2. 성서의 서술양식
    1) 구약성서
    2) 신약성서
    3) 민중언어
   
제2부 예수의 이야기(비유)
   
1. 만성병에 걸린 세대
    1)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2) 이 때를 모르는 세대
    3) 악마가 악마라는 죄목으로 박해하는 세상
    4) 어둠에서 썩어가는 세대
2. 잃어버린 자를 찾아서
    1) 목동과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
    2) 잃은 돈 찾은 여인
    3) 돌아온 아들의 아버지
3. 가치의 전도
    1) 누가 ‘그’의 이웃이냐?
    2) 오! 하느님!
    3) 부자의 돈과 과부의 돈
    4) 말만 하는 자와 실천하는 자
    5) 자신을 철저히 비운(空) 자
4. 집요한 투쟁(간구)
    1) 참는 데도 한계가 있다
    2) 닫힌 문
    3) 빚진 자의 엉뚱한 마무리
    4) 한 과부의 투쟁
    5) 친구를 위한 투쟁
5. 심판
    1) 공존의 때와 심판의 때
    2) 그물 안에 든 고기
    3) 심판과 맡은 분깃
    4) 심판과 대비
    5) 너무도 어리석은 부자
    6) 한 부자와 거지
    7) 뜻밖의 심판의 기준
    8) 심판은 바로 관용의 한계
    9) 이미 문이 영원히 닫혔을 때
6. 하느님 나라에 관한 이야기
    1) 제 손으로 심은 씨가 어떻게 자라는지 알지 못하는 농
    2) 겨자씨 이야기
    3) 조용한 혁명(누룩의 이야기)
    4) 그만이 아는 숨겨진 보화
    5) 한 장사꾼의 모험
    6) 해방의 기쁨
    7) 밥상공동체
    8) 손익계산이 없는 세계
    9) 절망과 희망(씨 뿌리는 농부)
   
제3부 성서해석권은 민중에게
   
1. 한 책에 대한 두 가지 이름
2. 성서의 열쇠는 주머니 속에
3. 성서의 전승을 위한 노력들
4. 종교개혁시대와 성서해석
5. 다시 빼앗긴 성서해석의 권리
6. 성서해석권을 되찾으려는 평신도운동
7. 성서의 전승모체
8. 신약성서 성립
    1) 민중과 '지도층'의 상충
    2) 마르코복음의 성립
9. 제 것을 지키지 못하는 주인
   
제4부 역사의 예수
   
1. 역사의 예수
    1) 역사의 예수 추구
    2) 자료
2. 예수의 시대상
    1) 정치적 상황
    2) 유다 사회상
3. 공생애의 출발
    1) 세례자 요한
    2) 세례자 요한이 잡힌 후
    3) 갈릴래아로
4. 갈릴래아의 예수
    1) 민중과 더불어
    2) 제자 선택
    3) 예수의 시선이 머문 대상
    4) 자유를 위한 투쟁
    5) 하느님 나라의 선포
5. 예루살렘의 예수
    1) 예루살렘
    2) 예루살렘행
    3) 예루살렘 입성
    4) 죽음의 전야
    5) 심문과 처형
6. 그는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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