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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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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병무전집4 |
예수의 이야기
(한길사)
6. 하느님 나라에 관한 이야기
1) 제 손으로 심은 씨가 어떻게 자라는지 알지 못하는 농부

예수께서 또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이와 같다. 어떤 사람이 땅에 씨를 뿌려놓고 밤에 자고 낮에 깨고 하는 동안에 그 씨가 싹이 나고 자라지만 어떻게 되는지 알지 못한다.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게 하는데 처음에는 싹이 돋고 다음에는 이삭이 나오고 또 그 다음에는 이삭에 알찬 낟알이 맺힌다. 열매가 익으면 곧 낫을 댄다. 추수 때가 왔기 때문이다"(마르 4, 26~29).

겨울이 가고 봄이 오면 잠든 듯, 죽은 듯 잠잠하던 초목이 눈을 뜨고 다시 활동을 하기 위해 기지개를 켭니다. 비록 눈에 보이지 않아도 대지가 꿈틀거리며 생명의 기운으로 세상을 가득 차게 합니다.

이때를 맞추어 농부들은 작년에도 재작년에도 그러했듯이, 아니 조상 때부터 해오던 버릇대로 밭을 갈아 헤치고 거기에 씨를 심습니다. 농부들은 이른바 춘궁기에 먹을 것이 없어서 나무껍질을 벗겨 먹는 한이 있어도 작년 가을 추수 때에 골라둔 제일 좋은 씨를 꺼내 갈아 헤친 땅에 몽땅 털어 심습니다.

농부는 곡식 종류에 따라서는 밭고랑을 내고, 손으로 파헤쳐 심고, 흙을 덮어주기도 합니다만 어떤 것은 자루 같은 데에 그냥 담아 메고 갈아 헤친 땅 위를 걸어가며 휘휘 뿌려줍니다. 그리고 그것을 가볍게 밟아줍니다.

이렇게 소중하게 간직했던 씨를 대지에 버리다시피 내맡기는 농부의 마음 한켠에는 어떤 불안이 깃들여 있을 수도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그것은 '모험'입니다. 굶주린 식구들이 몇 끼니라도 배불리 먹을 수 있는 것을 몽땅 버리다시피 밭에 뿌리는 농부의 행위는 그 땅을 철저히 믿지 않고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니 씨 뿌리는 일 자체가 '믿음'의 출발이라 하겠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너무나 당연한 행위라고 생각해 버리거나 오랜 경험이 있으니 믿는 것 아니냐며 보아 넘기기 쉽지만 작년, 재작년에도 씨알을 심으면 싹이 났다고 해서 금년에도 반드시 그러리라는 보장이 어디 있습니까? 그것은 분명히 '모험'입니다.

그렇게 뿌린 씨를 짐승이나 새들이 와서 다 파먹거나 쪼아먹을 수도 있고 날씨가 궂어서 다시 추워지거나 또 때에 맞춰서 비가 내려주지 않는다면 그 씨알은 그대로 땅속에서 썩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농부가 그렇다고 해서 씨 뿌리기를 주저하거나 혹은 씨를 뿌리면서도 그 씨알에서 싹이 나고 자라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은 전혀하지 않습니다. 농부는 이것저것 재보고 그 결과에 따라서 모험을 하는 것이 아니라 무조건 신뢰하고 무엇엔가 내맡기는 자세로 씨를 뿌립니다.

씨를 뿌린 농부는 잠에서 깨어나면 이른 새벽부터 자기가 뿌린 씨알을 살피려고 밭으로 나갑니다. 밭에 거름도 주고, 물고랑도 만들고, 무엇인가 밟고 지나간 흔적이 있으면 다시 그 땅을 고르고 흙을 덮어주곤 합니다. 그러나 그 이상 농부가 할 일은 없습니다. 그로서는 이제 모든 것을 맡기고 기다리는 수밖에 없습니다. 이슬을 기다리고, 잔잔한 봄비를 기다리고 그리고 거센 바람이 불어와 땅을 말려 버리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농부는 이렇게 몇 날 며칠을 하루갈이 밭으로 나가 사람처럼 싹이 나기를 고대할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아침 여느 때와 같이 밭으로 간 농부의 눈에 여기저기 파릇파릇 솟아난 싹이 보였습니다. 그 때 농부의 마음은 농사를 지어보지 않은 사람이면 모를 것입니다. 그 환희를 씨 뿌린 그 말고 누가 알겠습니까!

낟알 알갱이들이 신비한 마술처럼 대지 위에 파릇파릇한 풀로 되살아 돋아나는 것을 한번 상상해보십시오. 꿈틀거리는 생명의 신비함에 가슴이 벅찰 것입니다. 그의 기다림은 이제 이렇게 현실이 됐습니다. 매일같이 밭에서 싹이 자라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싹이 났으니 으레 자란다는 보장은 결코 없습니다. 싹이 나오자마자 시들어버리는 경우도 얼마든지 있으니까요. 그렇기에 농부는 낟알이 새싹으로 자라남을 자명하게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싹이 나고 자라지만 어떻게 되는지 알지 못한다"라고 했습니다.

이 농부는 생명의 신비 앞에 황홀할 따름입니다. 그는 이 신비함 앞에 벅찬 감격을 안으로만 새길 따름이고, 과학을 하는 사람들처럼 그 이유를 분석하거나 법칙을 찾아내고 하는 따위의 일은 필요도 없거니와 엄두도 내지 않습니다. 만약 그랬더라면 신비함은 자취를 감추고 말았겠지요.

처음에는 싹이 돋고 다음에는 이삭이 나오고 또 그 다음에는 알찬 낟알이 맺힌다, 이것이 곡식이 성장하는 순서입니다. 이 순서는 누구나 아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무엇이 싹이 나오게 하고 열매를 맺게 할까요? 이 이야기에서는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게 하는데"라고 합니다. 농부도 아닙니다. 씨알 자체가 지닌 그 무엇도 아닙니다. 아니, '땅이 그렇게 한다'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누구의 생각일까요? 이 이야기를 하는 예수의 생각일까요? 아니면 씨를 뿌리고 기다리며 돌보던 농부의 심정을 대변한 것일까요? 나는 농부의 심정을 대신 말 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일 이 농부가 '내가 밭을 갈고 거름을 주고 씨를 뿌려 싹이 나면 그것을 북돋워주고, 그리고 잡초들을 뽑아주고 해서 마침내 열매를 맺은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내 노력의 결과이다'라고 생각한다면, 그 순간 그는 생명의 신비를 결코 다시는 체험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농부는 '이것은 내가 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땅 스스로가 한 일이다'라고 생각함으로써 생명의 신비를 그대로 가슴에 지니고 있기에 이 감사와 감격의 마음은 낟알을 먹을 때에 개나 돼지같이 위(胃)를 채운다는 동물적 포만감에 머물지 않고 그보다 차원 높은 생명에 대한 존엄성, 밥에 대한 소중함으로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다시 말해 바로 자신이 뿌린 씨알은 단순히 '한 알의 낟알'이 아니라 '한 생명의 사건'이라는 감격이기에 위를 채우는 데 그치지 않고, 기적을 경험하게 합니다. 여기에서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었다'라는 것은 '내가 한 일이 아니다'라는 뜻으로 받아들이면 바르게 이해한 것이지만, 그렇지 않고 자라나는 법칙을 따진다면 이치에 맞지 않은 이야기입니다. 왜냐하면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게 한 것이 아니라 적시에 비가 오고 해가 비춰서 땅이 제 구실을 할 수 있게 해서 열매를 맺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예수가 말한 이야기의 전부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이 이야기를 하는 예수의 시선을 생각하게 됩니다. 예수 집안의 가업은 '목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목수는 목수 일만 한다거나 혹은 그때의 수공업자는 지금으로 말하면 중산층이었을 것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으나 그것은 밑바닥 사회를 경험해 보지 않고 사회계층을 두부모처럼 뚝뚝 잘라서 규정해 버리는 사람들의 편견입니다. 가난한 층의 목수는 목수 일만으로 밥을 먹고 살 수 없기 때문에 늘 굶주리거나 아니면 다른 일을 곁들여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그러므로 그가 목수였다고 해서 농사를 지어본 경험이 없다고 전제할 수는 없습니다. 어쩌면 그 자신의 경험을 이렇게 이야기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그 동리의 농부들의 생활을 구경만 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경험까지도 구석구석 공감했을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생명의 신비를 농부의 일상적인 삶에서 새삼 경험하고 관찰한 이가 아니면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에서 사람들은 엉뚱한 질문을 하고, 대답을 찾고 있습니다. 가령 '농부는 누구냐?', '씨알은 무엇이냐?', '누가 자라게 하느냐?', '추수한다는 것은 무슨 뜻이냐?' 이런 질문을 하고 그 대답으로서는 '농부는 하느님이다', '씨알은 복음이다'라고 하는가 하면 '자라나게 하는 것은 하느님이다', '열매를 맺는 것은 종말을 뜻한다'라는 등의 교리적인 지식을 이 단순한 이야기에서 찾아내려고 하거나 교리에 이 이야기를 맞추려고 애를 씁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 어디에도 '하느님'이란 말은 없으며, '복음'이란 말도 없습니다. 물론 '종말'과 관련된 어구도 한마디도 없습니다. 이것은 흔히 보는 일상적인 이야기일 뿐입니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이렇게 단순한 이야기를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계속 교리에 얽매여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걸까요?

이 이야기 첫머리에 중요한 단서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하느님 나라는 이와 같다"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 이야기의 목적입니다. 예수는 이것으로 '하느님 나라'의 성격의 한 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지금까지 성서를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학자들은 하느님 나라의 내용을 설명한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분명히 이 이야기는 '하느님 나라론(論)'을 펴거나 하느님 나라의 청사진을 보인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한 가지 사실만은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즉 계산할 수 없는 난관을 헤치고 생명은 마침내 대지를 뚫고 나와 온갖 방해를 물리치고 하늘(비, 해)과 땅의 도움에 힘입어 마침내 열매를 맺기 위해 자라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바로 그 농부가 대지를 갈아 헤치고 비료를 주고 씨알을 뿌리듯이, 그 도래에 참여하나 그 씨알이 어떻게 자라는지 알지 못하듯이 우리 역사 속에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게 생명의 신비처럼 조용히 퍼져나가고 있다'라는 것을 알리려는 것입니다.


| 안병무전집4 |
예수의 이야기
(한길사)
List of Articles
표지
예수는 논하지 않았다
   
제1부 민중의 언어, 이야기
   
1. 성서라는 책의 성격
2. 성서의 서술양식
    1) 구약성서
    2) 신약성서
    3) 민중언어
   
제2부 예수의 이야기(비유)
   
1. 만성병에 걸린 세대
    1)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2) 이 때를 모르는 세대
    3) 악마가 악마라는 죄목으로 박해하는 세상
    4) 어둠에서 썩어가는 세대
2. 잃어버린 자를 찾아서
    1) 목동과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
    2) 잃은 돈 찾은 여인
    3) 돌아온 아들의 아버지
3. 가치의 전도
    1) 누가 ‘그’의 이웃이냐?
    2) 오! 하느님!
    3) 부자의 돈과 과부의 돈
    4) 말만 하는 자와 실천하는 자
    5) 자신을 철저히 비운(空) 자
4. 집요한 투쟁(간구)
    1) 참는 데도 한계가 있다
    2) 닫힌 문
    3) 빚진 자의 엉뚱한 마무리
    4) 한 과부의 투쟁
    5) 친구를 위한 투쟁
5. 심판
    1) 공존의 때와 심판의 때
    2) 그물 안에 든 고기
    3) 심판과 맡은 분깃
    4) 심판과 대비
    5) 너무도 어리석은 부자
    6) 한 부자와 거지
    7) 뜻밖의 심판의 기준
    8) 심판은 바로 관용의 한계
    9) 이미 문이 영원히 닫혔을 때
6. 하느님 나라에 관한 이야기
    1) 제 손으로 심은 씨가 어떻게 자라는지 알지 못하는 농
    2) 겨자씨 이야기
    3) 조용한 혁명(누룩의 이야기)
    4) 그만이 아는 숨겨진 보화
    5) 한 장사꾼의 모험
    6) 해방의 기쁨
    7) 밥상공동체
    8) 손익계산이 없는 세계
    9) 절망과 희망(씨 뿌리는 농부)
   
제3부 성서해석권은 민중에게
   
1. 한 책에 대한 두 가지 이름
2. 성서의 열쇠는 주머니 속에
3. 성서의 전승을 위한 노력들
4. 종교개혁시대와 성서해석
5. 다시 빼앗긴 성서해석의 권리
6. 성서해석권을 되찾으려는 평신도운동
7. 성서의 전승모체
8. 신약성서 성립
    1) 민중과 '지도층'의 상충
    2) 마르코복음의 성립
9. 제 것을 지키지 못하는 주인
   
제4부 역사의 예수
   
1. 역사의 예수
    1) 역사의 예수 추구
    2) 자료
2. 예수의 시대상
    1) 정치적 상황
    2) 유다 사회상
3. 공생애의 출발
    1) 세례자 요한
    2) 세례자 요한이 잡힌 후
    3) 갈릴래아로
4. 갈릴래아의 예수
    1) 민중과 더불어
    2) 제자 선택
    3) 예수의 시선이 머문 대상
    4) 자유를 위한 투쟁
    5) 하느님 나라의 선포
5. 예루살렘의 예수
    1) 예루살렘
    2) 예루살렘행
    3) 예루살렘 입성
    4) 죽음의 전야
    5) 심문과 처형
6. 그는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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