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한 하늘나라는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꾼과 같다. 그가 값진 진주 하나를 발견하면 가서 있는 것을 다 팔아 그것을 산다(마태 13, 45~46).
이 이야기는 앞의 이야기와 쌍둥이 같습니다. 그 길이로 보나 내용으로 보아 별다른 차이를 느낄 수 없습니다. 어떤 장사꾼이 구체적인 목적을 가지고 여행길에 나섰습니다. 앞의 이야기에서는 이름이 무엇인지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밝혀지지 않았지만, 이 이야기에서는 구체적으로 이 사람의 직업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장사꾼! 이 직업 자체가 우리에게 여러 가지 인상을 풍깁니다. 먼저 직업적인 장사꾼이라 하면 어떤 물건을 팔고 사면서 이익을 남기는 것이 그 최대목적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은 보다 많이 가지려는 본능을 가지고 있다고 하지만 장사꾼은 이런 본능을 그대로 직업으로 삼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장사꾼 하면 이윤을 따지고 더 많은 이익을 남기기 위해서 사려는 사람과 교묘하게 흥정을 끌어가고, 온갖 수단을 동원해서 더 많은 이익을 남기려고 하니, 결국 '장사꾼은 자기 부모도 속인다'라는 말까지 나오게 된 것입니다. 이익을 얼마나 남겨야 하는 객관적이고 법적인 기준이 없으니 그의 재량의 폭은 대단히 클 수밖에 없습니다. 이른바 '시장경제'라는 것이 형성되기 이전 시대에는 더욱 그러했습니다.
그런데 이윤만 보이면 어떤 장사도 할 수 있지만, 제대로 장사꾼이 되려면 장사품목을 일정한 물건에 한정시키는 것이 원칙입니다. 상품을 정해서 취급해야 그 상품의 성질을 더 잘 알게 되고 또 그 상품을 구할 수 있는 장소 그리고 어디에, 어떤 사람들이 그 상품을 갖고 있는지도 잘 알게 됩니다. 또한 어떤 물건이 어떤 계층의 기호에 맞는지 잘 살펴 단골도 찾아냅니다.
이 장사꾼은 '보석장사'를 하는 제대로 된 장사꾼 같습니다. 그는 좋은 진주를 찾기 위해 길을 나선 것입니다. '좋은'이라는 형용사의 원문의 뜻은 '아름다운'이라는 뜻으로 번역될 수도 있습니다. 이 이야기에는 문자상으로는 그렇게 강조되어 있지 않지만 가장 아름다운 진주, 가장 좋은 진주를 찾았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목적을 가진 그가 마침내 '값진 진주' 하나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집으로 돌아가서 자기가 가진 것을 다 팔아 그 진주를 산다는 것이 이 이야기의 전부입니다.
여기서 우리를 궁금하게 하는 분명치 않은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앞에 나온 사람은 처음부터 보화를 찾을 목적으로 길을 나선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우연히 보화를 발견했고, 그것이 묻힌 땅을 살 돈을 갖고 있지 않았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장사꾼은 처음부터 가장 좋은 진주를 사기 위해 나선 사람입니다. 그런데 왜 새삼 그것을 발견하자 집으로 돌아가서 자기가 가진 것들을 다 팔아야만 했을까요? 손에 쥔 돈보다 값이 더 비싸기 때문에 그랬을까요? 이런 물음을 던져보는 것은 이 사람이 장사꾼이라는 데 지나치게 매여서 그의 다른 얼굴을 보지 못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여간 이 이야기도 그 시대에도 그랬고 지금도 종교나 윤리적인 자(尺)로 재어볼 때 좀 천하게 보는 장사꾼을 소재로 한 지극히 평범한 이야기입니다.
예수는 이야기의 소재를 대부분 농업에서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농민의 이야기가 많습니다. 반면 장사꾼 이야기는 별로 없습니다. 도시에 드나들기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던 그가 장사꾼을 알았다면 시골의 행상을 만난 경험이 고작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이러한 장사꾼을 눈여겨본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는 보통 사람처럼 통념에 따라 직업을 보고 모든 것을 판단하지 않고, 그의 감추어진 면을 밝혀내는 자상한 이였습니다. 이 이야기에는 장사꾼을 좀 낮게 평가한다거나 어떤 고정관념 같은 것을 조금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일반 사람들처럼 통념에 따라 판단하는 이라면 그 장사꾼은 장삿속으로 진주를 제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 자기가 가진 것을 팔아 그것을 손에 넣었고, 그럴 때에는 분명한 손익계산을 했을 것이라고 전제하고, 결론은 '그리고 그것을 몇 배의 비싼 값으로 팔아서 막대한 이익을 얻었다'라는 것으로 이야기를 마무리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에는 단지 '가진 것을 다 팔아 그것을 산다'라는 말로 끝을 맺습니다. 그러면 예수는 이 이야기로 무엇을 알리려 한 것일까요? 그 장사꾼의 삶의 한 토막에서 예수는 무엇을 보았을까요?
그는 이 이야기로써 또다시 하느님 나라의 성격을 나타내려고 합니다. 앞의 이야기에서는 '하느님의 나라는 밭에 묻힌 보물과 같다'라고 했는데, 이 이야기에서는 '그 장사꾼이 찾는 좋은 진주가 하느님 나라와 같다'라는 뜻처럼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보물 자체를 '하느님 나라'라고 하지 않고, 앞의 이야기에서 보물과 그것을 발견한 사람 사이의 '사건'을 하느님의 나라에 비유했듯이 이 이야기에서도 장사꾼 자체가 아니고 진주를 발견함으로써 일어난 '사건'을 하느님 나라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그 사건이란 무엇일까요?
그가 가진 것을 다 팔았다면 보통 사람에게도 그렇지만 더욱이나 계산이 빠른 장사꾼에게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는 생각할 수 없는 행동입니다. 장사꾼의 목적은 팔고 사면서 거기서 나온 이윤으로 먹고 입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장사꾼은 때로는 큰 이익을 볼 만한 기회를 만나서 모험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험을 통하여 그의 삶의 목적이나 생활의 내용이 물량적으로 좀 더 많아질 수는 있으나, 그렇다고 질적인 변화를 가져오지는 않습니다. 그는 여전히 팔고 사고 또다시 파는 순환의 바퀴에서는 벗어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만일 그 귀중한 진주를 발견한 것이 장삿속에서 나온 기쁨이고 가진 것을 다 파는 것이 역시 투기적인 행위라면, 그것이 어떤 새로운 가능성을 주는 일은 못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느님 나라란 사람들이 주권을 행사하는 세계의 어느 나라보다 조금은 더 나을지 몰라도 질적으로 다른 것일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가 가진 것을 모두 판다는 것은 하느님 나라의 성격을 드러내는데 별 도움이 못 됩니다.
그가 가진 것 전체를 팔아서 진주를 자기 손에 넣는 것만으로는 여전히 '홀로의 삶'을 넘어서지 못합니다. 그것을 팔아서 큰 이윤을 남긴다고 해도 여전히 그는 '홀로의 삶'이고, 그런 삶에서는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한 삶의 변화는 경험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 이야기에는 앞의 이야기에서와 같이 '기뻐하며'라는 표현은 빠져 있지만, 시간적으로 얼마나 오래됐든 꼭 찾겠다는 염원을 이루었으니까 그에게는 헤아릴 수 없는 큰 기쁨이었을 것입니다. 그 기쁨은 장사꾼의 일상성을 깨는 것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진정한 기쁨이 됐을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장사로 그날 그날의 생활을 유지해 왔으나 아무런 보람을 느끼지 못해오던 그가 '마침내 참된 보람을 찾아나섰다'라는 상징이 바로 '진주'라고 생각해볼 수도 있지 않을까요?
참된 보람이란 홀로 사는 사람에게는 있을 수 없습니다. 의식주를 해결하기 위해 그날 그날 수고하지만 보람은 오지 않습니다. 참된 보람은 '나와 너의 관계'에서 생기는 것입니다. 나 홀로 동물적인 생활을 성공적으로 해결했다고 보람을 느끼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을 위한 수고 자체만 결과로 남습니다. 그것은 한(恨)이 될지언정 보람은 되지 않습니다. '홀로'를 위한 고생은 억울함과 한을 남기지만 사랑하는 이를 위해서하는 수고는 그것이 사랑하는 이에게 큰 기쁨이 된 것을 발견할 때 보람으로 변합니다. 가장 원형적인 경우는 엄마에게 자식이 가장 큰 보람이겠고, 옛날 같으면 충성스러운 백성에게 임금일 수도 있으며, 어떤 사람에게는 친구일 수도 있고 애인일 수도 있습니다. 결국 사랑이 있을 때 모든 수고가 보람으로 변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장사꾼이 만일 지극히 사랑하는 이, 목숨을 다 바쳐도 또는 가진 것을 다 팔아서 바쳐도 아깝지 않을 사랑하는 이를 품은 사람이라고 가정하면 그가 가진 것을 다 팔아 산 물질은 하나의 진주 자체가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이 가장 기뻐하고 또 그에게 절대 필요한 것의 상징일 것입니다. 결국 그 진주는 사랑입니다. 그 사랑은 장사꾼의 계산 속에 한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아니라 계산의 그물을 찢고 거기 매인 그를 해방시켜 새 땅, 새 하늘에 참여하게 하는 힘이 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그의 보람이며, 하느님 나라의 경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