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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병무전집4 |
예수의 이야기
(한길사)
4. 종교개혁시대와 성서해석

이미 중세기에 이와 같은 종교적 강권에 저항하여 개혁운동을 꾀한 여러 선각자들이 있었는데, 그것이 마침내 루터와 칼뱅을 통해서 정면으로 로마 가톨릭교회에 대항하여 그리스도교 개혁에 불을 붙이게 되었습니다. 그중에 우리의 관심사는 역시 성서해석의 문제입니다.

루터는 어거스틴을 숭상하는 수도사였습니다. 젊은 루터에게 기존 교회에 대한 회의를 가져다준 여러 가지 사건들이 있었으나 그중에 두 가지만 예를 드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하나는 이른바 면죄부(免罪符) 판매사건입니다. 로마교회는 지금의 베드로성당을 건축하기 위하여 세계교회에서 모금을 했는데 능률적인 모금방법으로 교회가 발행하는 면죄부를 많이 사면 사는 것만큼 사죄(赦罪)가 보장된다고 선전하면서 기금을 모았습니다. 이것은 예수의 십자가의 속죄사상을 돈으로 파는 행위였습니다. 젊은 수도사 루터에게는 이것이 예수의 십자가사건을 극도로 모독하는, 교회 타락의 극치로 보였던 것입니다.

또 하나는 그가 로마를 방문했을 때, 높은 데 세워진 교회로 오르는 계단에 장사진을 이룬 사람들이 무릎을 꿇고 그 많은 계단을 무릎으로 딛고 울라가는 것을 봤습니다. 젊은 루터도 이 대열에서 무릎을 꿇고 오르다가 근본적인 회의를 품게 됐습니다. 성서의 어디에서 이 같은 금욕, 나아가서는 자기학대가 구원의 대가라고 가르쳤는가? 그것은 한마디로 전혀 성서와 상관없는 행위를 강요하여 신도들을 짐승처럼 길들이는 장면이었습니다.

이와 비슷한 여러 가지 문제를 직시한 그는 무명의 수도사로 95개조의 항의문을 써서 한 교회의 문에 붙임으로써 기존 교회에 선전포고를 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가 그렇게 타락하고 제멋대로 신도를 다루는 것은 결국 성서를 왜곡한 결과라는 것을 인식한 그는 마침내 성서를 민중이 쓰는 독일어로 번역한 뒤 인쇄하여 모든 교회에 나누어주었습니다. 나서 죽을 때까지 그리스도인으로 길들여졌으나 그리스도교의 모체인 성서를 탈취당한 민중에게 루터는 그 성서를 다시 되돌려주고자했습니다. 교권이 자기들의 필요에 따라 부분적으로 알려준 토막난 성서지식만을 갖고 있던 저들에게 마침내 그 성서 전체를 자기 가슴에 안게 되었다는, 세계를 가슴에 품은 것이나 다름없는 환희와 궁지를 갖다주었을 것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그는 성서의 해석권을 교회에서 뺏어 민중에게 돌려주려고 했습니다. 이것은 성서해석의 중요한 전기가 되었습니다. 루터의 뜻은 다음 몇 가지로 성격화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성서해석 기준을 제시한 것입니다. 그 표어는 "성서는 성서로 하여금 해석하게 하라"였습니다. 이 말의 뜻은 중요합니다. 여기에는 지금까지 독점적인 권위를 누려왔던 성서해석권자가 배제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대로 하면 성서와 그것을 읽는 자와의 사이에 어떤 중개자도 필요없게 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지금까지 전권을 휘두르던 교권을 배제한 것입니다.

둘째는, 만인사제설(萬人司祭說)입니다. 사제는 교회를 치리하고 의식(儀式)을 집행할 권리가 있지만, 무엇보다도 성서해석권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은 다 사제라는 것입니다. 이 선언은 사제의 특권을 박탈하는 말이기도 하지만, 교회를 이끌어나갈 주인이자 성서를 푸는 주체는 어느 특권층이 아니라 신도 전체라는 것입니다.

셋째는, 성서의 알레고리적 해석, 즉 영적 해석을 철저히 배격한 점입니다. 그의 주장은 이렇습니다. "성서가 하느님 말씀임에는 틀림없다, 그것은 누구나 글을 읽을 수 있으면 문자를 통해서 이해할 수 있도록 된 하느님의 말씀이다, 그것을 이해하려면 문자 뒤에 숨어 있는 보이지 않는 영적인 의미를 읽을 수 있어야 한다는 주장은 사람의 말로 되어 모든 사람이 이해할 수 있게 된 성서의 권위를 유린하는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이로써 그때까지 '영적 해석을 할 수 있는 자는 사제계층뿐'이라는 주장에서 마치 그들이 일반인은 갖지 못한 영적인 소리를 듣는 특수 안테나를 가지고 있는 듯한 허상을 여지 없이 깨뜨리고 폐기해버렸습니다.

이렇게 해서 그는 알레고리적 해석방법이 지나치게 자의적이어서 문자로 된 성서가 무의미해지는 위험성을 극복하는 한편, 그 당시에 퍼져가고 있는 신비주의, 나아가서는 광산주의에 제동을 걸고 성서를 다시 살려낸 것입니다. 루터의 싸움에서 보아 넘겨서는 안 될 것은 교권에 대한 저항과 성서의 해방운동이 동시적으로 일어났다는 사실입니다.

칼뱅도 크게 보아 루터와 같은 노선을 걸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런 노선에서 성서주석을 써내는 데 주력했음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교회질서 정립과 신도들의 훈련과 교육을 염두에 둔 나머지, 교의적인 바탕에서 성서해석을 분리시키는 데에는 미온적인 자세를 보였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이 통쾌하리만치 명쾌하게 성서를 교권에서 해방하여 민중에게 돌려야 한다는 선언을 한 루터는 불행하게도 성서에 또 다른 굴레를 씌웠습니다. 비록 같은 길을 지향하는 이들이라도 사람에 따라 비중의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물론 그 차이를 둘 때에는 객관적 근거가 제시돼야 합니다.

종교개혁에서 특히 성서를 해방시킨 루터나 칼뱅은 성서를 민중에게로 돌리면서도 성서를 볼 때에 그것을 올바르게 보기 위해서 절대로 필요하다는 안경을 씌워준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성서를 해석하는 기준인데, 그들이 내세운 '사도적 복음'이라는 개념이 그것입니다. 즉 '사도적 복음성'을 확실히 알고 그것을 잣대로 성서의 각 책들의 가치를 측정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도적 복음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루터의 말은 예수사건의 목격자로써 첫 세대인 사도들의 증언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엄밀하게 말해서 신약성서에는 그러한 첫 세대가 쓴 글이 단 한 줄도 없습니다. 루터는 바울로의 글을 기준으로 삼고 있으나, 바울로는 역사의 예수를 만난 일도 없고 또 역사의 예수에 대해서 거의 침묵하였습니다. 그리고 오늘날에는 복음서 저자 전체와 베드로서(베드로1서)도 사도들의 글이 아니라는 것이 판명되고 있습니다. 루터가 사도적이라고 한 것은 현실적으로 바울로직이라는 말과 동의어가 되어 있습니다. 그는 바울로의 사신(使信)에 도취됐으며, 그것이 그리스도교의 진수(眞髓)를 서술한 것이라고 판단한 것입니다. 그중에서도 갈라디아서와 로마서가 성서 전체의 비중을 재는 척도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바울로적이라는 말에서 또 하나의 껍질을 벗겨야 그의 참뜻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울로의 서신에서 핵심을 이루고 있다고 판단되는 의인론(義認論)입니다. 의인론이란 인간은 모두 구원받을 수 없는 죄인들이지만 예수의 십자가사건이 하느님의 속죄행위로서, 이 사실을 믿으면 의롭다고 인정을 받는다는 교리입니다. 그는 죄와 십자가와 속죄를 믿는 것이 구원에 이르는 핵심이라고 본 것입니다. 이로써 그는 이러한 내용이 포함됐느냐, 됐으면 어느 정도인가로 각 책들의 비중이 결정되었고, 구약마저 이런 기준으로 역광적(逆光的)인 판단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단순한 척도로 사람의 삶의 온갖 구석을 다 포함한 성서를 포괄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또 그렇게 하려면 성서의 많은 부분들을 폐기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루터 자신은 이미 성서의 경전화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경전론으로 취사선택을 하지는 않았지만 끝까지 묵시록을 무시해버렸고 야고보서를 경전 안에 있는 한 책으로 인정하면서도 '지푸라기' 글이라는 험구까지 하면서 그 가치를 거의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루터의 말대로라면, 우리는 복음서들도 직접 읽어서는 안 되고 그가 제시한 '사도적 복음'이라는 안경을 쓰고 봐야 합니다. 이것이 성서를 직접 대하려는 우리에게 다시 씌워진 다른 굴레입니다.

루터의 또 하나의 시대적인 제약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그가 정치(국가)와 교회 영역을 분리시키는 이른바 '두 나라 설'을 주장한 사실입니다. 성서는 거의 전부가 정치적 박해 속에서 씌어진 것이며, 그렇기에 어떤 의미에서 보면 '정치수난사'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의 주장에 따른다면, 성서의 내용을 파악하는 길도 막아버리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또 날이 갈수록 정치가 인간생활 깊숙이까지 간섭하는 마당에 신자는 구름 위에 가서 살지 않는 한, 잘못된 정치로 더렵혀진 사회에서 오염되거나 상처받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루터의 판결은 성서 내적(內的)인 논리에 의거한 것이 아니라, 그의 종교개혁을 지원한 봉건주들과의 관계에서 설정된 것입니다. 이러한 시대적인 제약이 우리가 성서를 보는 눈을 가로막는 또 하나의 굴레로 작용한 것입니다.

그러나 루터가 성서를 교권에서 빼앗아 민중에게로 돌렸다는 사실은 그의 몇 가지 약점에도 불구하고 성서해방의 획기적인 전기가 되었음을 잊어버려서는 안 될 것입니다.


| 안병무전집4 |
예수의 이야기
(한길사)
List of Articles
표지
예수는 논하지 않았다
   
제1부 민중의 언어, 이야기
   
1. 성서라는 책의 성격
2. 성서의 서술양식
    1) 구약성서
    2) 신약성서
    3) 민중언어
   
제2부 예수의 이야기(비유)
   
1. 만성병에 걸린 세대
    1)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2) 이 때를 모르는 세대
    3) 악마가 악마라는 죄목으로 박해하는 세상
    4) 어둠에서 썩어가는 세대
2. 잃어버린 자를 찾아서
    1) 목동과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
    2) 잃은 돈 찾은 여인
    3) 돌아온 아들의 아버지
3. 가치의 전도
    1) 누가 ‘그’의 이웃이냐?
    2) 오! 하느님!
    3) 부자의 돈과 과부의 돈
    4) 말만 하는 자와 실천하는 자
    5) 자신을 철저히 비운(空) 자
4. 집요한 투쟁(간구)
    1) 참는 데도 한계가 있다
    2) 닫힌 문
    3) 빚진 자의 엉뚱한 마무리
    4) 한 과부의 투쟁
    5) 친구를 위한 투쟁
5. 심판
    1) 공존의 때와 심판의 때
    2) 그물 안에 든 고기
    3) 심판과 맡은 분깃
    4) 심판과 대비
    5) 너무도 어리석은 부자
    6) 한 부자와 거지
    7) 뜻밖의 심판의 기준
    8) 심판은 바로 관용의 한계
    9) 이미 문이 영원히 닫혔을 때
6. 하느님 나라에 관한 이야기
    1) 제 손으로 심은 씨가 어떻게 자라는지 알지 못하는 농
    2) 겨자씨 이야기
    3) 조용한 혁명(누룩의 이야기)
    4) 그만이 아는 숨겨진 보화
    5) 한 장사꾼의 모험
    6) 해방의 기쁨
    7) 밥상공동체
    8) 손익계산이 없는 세계
    9) 절망과 희망(씨 뿌리는 농부)
   
제3부 성서해석권은 민중에게
   
1. 한 책에 대한 두 가지 이름
2. 성서의 열쇠는 주머니 속에
3. 성서의 전승을 위한 노력들
4. 종교개혁시대와 성서해석
5. 다시 빼앗긴 성서해석의 권리
6. 성서해석권을 되찾으려는 평신도운동
7. 성서의 전승모체
8. 신약성서 성립
    1) 민중과 '지도층'의 상충
    2) 마르코복음의 성립
9. 제 것을 지키지 못하는 주인
   
제4부 역사의 예수
   
1. 역사의 예수
    1) 역사의 예수 추구
    2) 자료
2. 예수의 시대상
    1) 정치적 상황
    2) 유다 사회상
3. 공생애의 출발
    1) 세례자 요한
    2) 세례자 요한이 잡힌 후
    3) 갈릴래아로
4. 갈릴래아의 예수
    1) 민중과 더불어
    2) 제자 선택
    3) 예수의 시선이 머문 대상
    4) 자유를 위한 투쟁
    5) 하느님 나라의 선포
5. 예루살렘의 예수
    1) 예루살렘
    2) 예루살렘행
    3) 예루살렘 입성
    4) 죽음의 전야
    5) 심문과 처형
6. 그는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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