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코복음에 따르면, 공생애의 길에 나선 그가 어부 네 사람을 제자로 부른 기사 다음부터 계속 이름없는 군중들이 그를 싸고돈다. 처음에는 그들에게 어떤 이름도 부르지 않고 그저 "사람들이" "많이" "모두"와 같은 표현을 쓰다가 2장에서 예수가 가파르나움의 어떤 집에 들어갔을 때 저들이 얼마나 많은지 "문 앞에까지도 설 자리가 없을" 정도라고 하면서 마침내 그들을 오클로스(ochlos; 2, 4)라고 부른다. 그로부터 계속 이 대명사로 이들의 성분을 나타내는데, 무려 36회나 반복된다. 희랍어에서 군중을 가리키는 말 중에 가장 많이 쓴 것은 라오스(laos)로서, 가령 구약을 희랍어로 번역한 70인역에는 무려 2천 회나 나오는데, 이스라엘 백성 또는 하느님의 백성이라고 부를 때 쓴 것이다. 라오스는 현대적 개념으로 옮기면 국민이나 시민 등에 해당하는 것으로, 소속이 있어서 의무와 권리를 가진 집단의 일원이라는 뜻이다. 이에 대해서 오클로스는 거의 쓰이지 않는데, 그것은 소속이 없는, 그 사회에서 무슨 이유로든 소외되어 떠돌아다니는 계층에 적용하는 대명사이다. 이를테면 궁핍한 농민, 농노, 품팔이, 탈영병 등을 오클로스라고 불렀다. 이것으로써 예수를 따른 민중은 그 사회에서 소외된 계층임을 나타내려는 의도를 충분히 볼 수 있다.
이런 갈릴래아의 민중들이 예수를 싸고돌았고 이름없는 한 세력으로 예수운동에 가담했다. "사흘이나 나와 같이 있었는데 먹을 것이 없으니 가엾다. 만일 그들을 굶긴 채 집으로 돌려보낸다면 길에서 지쳐버리겠다"(마르 8, 2~3)는 서술에서 저들의 가난함 그리고 예수에게 밀착된 것을 동시에 읽을 수 있다. 저들을 뺀 예수를 생각할 수 없으며, 예수를 뺀 저들은 "목자 잃은 양떼"(마르 6, 34) 이상일 수 없다.
이들과 더불어 사는 예수의 행태를 단면적으로 나타내는 몇 가지 예를 보자.
예수가 호숫가에 나가니 많은 민중(오클로스)이 예수에게 모였다. 예수가 그들을 가르치며 가는 도중 레위라는 세리를 만났다. 세리는 경제적인 측면에서 소외된 자의 상징일 수 없으나, 유다 민족 사회에서는 완전히 소외된 자다. 예수가 그를 제자로 삼았다. 그것을 기념하여 레위는 출가(出家)의 잔치를 베풀었다. 그런데 그 자리에 "많은 세리와 죄인도 식탁에 함께했는데" 이는 이들이 "많이 예수를 따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을 본 바리사이파와 서기관들이 "왜 예수는 세리와 죄인들과 같이 식사하느냐?"고 항의했다. 이에 예수는 "건강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없으나 병자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오지 않았고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했다. 이상은 마르코복음 2장 13~17절의 서술을 그대로 따온 이야기이다. 이 짧은 문장을 세밀히 검토하면, 여러 다른 자료를 이처럼 편집한 흔적을 충분히 찾아낼 수 있다. 바로 그렇기에 편자로서의 마르코의 의도를 잘 읽을 수 있다. 처음에 그는 예수에게 모여든 이들을 오클로스라고 하고, 그리고 그들이 계속 예수를 따르고 있었는데 그중에는 세리와 죄인이 많이 있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오클로스와 세리와 죄인을 같은 반열에 두었다는 것이다. 오클로스는 그 사회에서 죄인으로 규제된 계층이라고 볼 수 있다. 저들은 일반 사람들과 함께 식사할 권리도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 누가 저들의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박탈하고 죄인으로 규정했는가? 이 편자의 의도는 분명하다. 그것은 바로 예수의 오클로스에 대한 행태에 항의하는 바로 저 바리사이파를 중심으로 한 유다 지도층인 것이다.
이미 위에서 언급한 대로, 바리사이파는 민중운동 그룹으로 자부했었다. 그런데 저들이 우세해지자 저들이 주동이 되어 이념과 체제의 옹호자가 되었다. 그러므로 그 체제에 적응해서 의무를 다하면 의인이고 그렇지 못하면 죄인으로 간주한 것이다. 저들은 613항에 달하는 방대하고 세밀한 생활규율을 제정했는데, 그것은 모세의 율법과 그것을 해석한 저명한 라삐(서기관, 율법학자)들의 말까지 동원하여 만든 것이다. 그것은 '하느님의 법'이라는 권위로 구속력을 발휘했다. 그러므로 이 계율과 그것으로 이루어진 체제에 적응하지 못하면 죄인으로 규정받고 아울러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박탈당하는 것이다. 그것에 적응할 수 없는 자는 그것을 거부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럴 능력이 없거나 사정이 허락되지 않기 때문이었다. 이를테면 그 중에 안식일법과 정결법에 저촉되어 예수와 저들 사이에 시비가 벌어지는 장면이 있다.
안식일 제정은 본래 가난한 자, 피지배자를 위한 것이다. 주 1일씩은 짐승까지도 쉬게 하자는 자비로운 법이다. 그런데 그것이 체제화 됨으로써 오히려 죄인으로 정죄하고 속박하는 것이 되었다. 안식일에 쉬라는 것을 세밀히 규정한 것은, 그것을 법 질서로 시행하려는 한 불가피할지 모른다. 그런데 안식일에 일체 노동을 허락하지 않으려면 적어도 그 전날까지 하루를 쉴 수 있는 생활여건을 갖추어야 한다. 그런데 하루의 끼니도 이어가지 못하는 민중에게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예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밭 사이로 지나다가 익어가는 밀이삭에서 낟알을 먹었다고 항의하는 장면(마르 2, 23~24)과, 안식일에 병 치료하는 것을 고소하려고 직시하는 장면(마르 3, 1 이하) 등이 나오는데, 이런 것들은 당시의 체제주의자들이 율법을 악용한 예를 잘 나타내는 것이다. 그런 체제 밑에서는 집칸이라도 쓰고 살고 먹는 문제 정도는 해결된 계층만이 순응해 살 수 있게 마련이다. 정결법도 원래 사제계층에만 적용되던 것을 일반에게 확대하여 식사 전에 손을 어떻게 씻는다는 것까지 조문화했는데, 병자, 집 없는 떠돌이, 거지 신세에 어떻게 그런 생활을 지킬 수 있는가?
이렇게 보면 예수의 주변에 가난한 자, 병자 등이 압도적이었음은 우연이 아니며, 저들은 어쩔 수 없이 그 사회에서 '죄인'으로 규정되어 밀려난 계층일 수밖에 없다. 예수가 "나는 의인을 위해 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위해 왔다"고 할 때 그것은 바로 체제에서 밀려난 민중을 위해 왔다는 말인 것이다. 저들이야말로 예수가 부르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마태 11, 28)이며, 저들은 "무거운 짐을 묶어 남의 어깨에 지우고 자기들은 손가락 하나도 움직이려하지 않는"(마태 23, 4) 라삐들, 바리사이파에 의해 허덕이고 마침내 정죄 되어 쫓겨난 자들이다. 예수는 바로 이 민중과 운명을 함께한 것이다. 그들과 식탁을 함께했다는 것은 종교적 이유로 사람 사이를 철저히 나누어놓은 유다 사회에서 "너와 나는 아무 구별 없는 형제다"라는 것을 행동으로 보여주는 일이다. 그러므로 그는 당시의 사람들에게서 "먹기를 탐하고 술을 즐기는 자이며 세리와 죄인의 친구"(마태 11, 19)라는 세평을 듣게 된 것이다.
예수가 민중(오클로스)에 둘러싸여 있을 때 누가 그의 생모와 형제가 왔다고 전했다. 그때 예수는 자기를 둘러앉은 사람들을 보며 "보라, 여기 내 어머니와 형제들이 있다"(마르 3, 31 이하)고 선언했다. 이 얘기에서 자기를 둘러앉은 사람들이 바로 새 공동체의 어머니요 형제라고 했는데, 그들이 바로 오클로스다. 이로써 예수는 자신이 그 민중과 공동체임을 분명하게 선언한다. 이 민중과의 깊은 관계는 뒤에 서술할 그의 언어에서도 다시 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