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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병무전집4 |
예수의 이야기
(한길사)
4) 자유를 위한 투쟁

복음서에 가장 많이 그리고 중요하게 등장하는 것은 병자들이며, 또 병을 고쳐주는 것이 예수의 행태 중 큰 비중을 차지하는데, 특히 귀신 들린 자를 고치는 이야기가 특수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을 볼수 있다. 예수는 박수나 무당의 범주에 속한 이인가?

과학을 배웠다는 사람은 그의 기적행위 보도에 쉽게 불신감을 느낄 것이나 실은 그렇지만도 않다. 현대 의학이 아는 분야보다 모르는 분야가 더 많기도 하지만, 정신과 육체를 완전 분리시켜버리는데 젖어 있는 현대인은 옛 시대 사람들의 현실을 잘 모를 뿐아니라 그 차이 역시 크다. 복음서 편자들은 예수가 병 고친 사실을 별 의문 없이 자명한 사실인 것처럼 전하며, 또 그것이 예수에게만 국한된 특권이라고도 보지 않는다. 그후 그의 제자들이 병을 고친 얘기도 많이 전해지는데(사도행전), 주목할 것은 주의 제자가 아닌 한 마술사(시몬)도 병 고칠 능력이 있었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예수가 병을 치료하는 기적을 성격화한다면, 그것은 병마에서 사람을 해방시킨 기적이라고 불러야 적절할 것이다. 몇 가지 구체적인 경우를 살펴보자.

예수가 나병환자를 치유했다. 그런데 치유된 그에게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네가 깨끗해진데 대하여 모세가 명한 예물을 드려 사람들에게 증거를 삼으라"(마르 1, 40 이하)고 지시하여 보냈다. 사람들은 예수의 지시를 유다교 계율에 충실했다는 증거로 이해했다. 그러나 그것은 실은 그의 복권(復權)을 위해서였다. 나병환자는 죄가 많아서 천벌을 받았다는 관념이 그에게서 사람과 더불어 살 권리를 박탈한 것이다. 그가 있을 자리는 제 본향, 제 집, 자기가 사랑하는 식구와 더불어 사는 곳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때 공인된 수속을 밟음으로써 떳떳이 제 권리를 찾으라는 지시다. 그러나 주목할 것은 이런 지시가 계속된다는 사실이다. 중풍병자(마르 2장), 정신병자(5장), 혈루병자 여인(루가 8장) 등에서도 한결같이 '집으로 가라'는 것이다. 정신병자의 경우에는 그가 치유되는 자리에서 예수를 따라가기를 원했으나 역시 집으로 보낸다. 이것은 한낱 병의 고통에서 해방시키는 것만이 아니라, 병 때문에 비인간화된 상태에서 해방시키려는 뜻이다.

특히 귀신 들린 자에 대한 예수의 자세는 병을 치료하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투쟁이다. 마르코에 두 번(5장, 9장) 나오는데 한결같이 대결의 긴장을 보인다. 예수는 "더러운 귀신아,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또는 "네게 명한다, 아이에게서 나와 다시는 들어가지 마라"고 명령한다. 이런 서술에서 사람들은 무당이나 박수를 연상할 것이다. 그러나 예수의 역사관을 보면 그 질적 차이를 이해할 것이다. 예수는 "내가 하느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면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한 것이다"(루가 11, 20 / Q)라고 하는가 하면, "사탄이 번개처럼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루가 10, 18)라는 얼른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을 한다.

그는 묵시문학파에서와 같이 세계를 두 단계(에온)로 보았다. 악마가 지배하는 낡은 단계, 그리고 하느님의 주권이 완전 지배하는 새 세대가 그것이다. 그런데 묵시문학파 일반과 예수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예수는 이 두 '에온'이 교체되는 것을 그저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낡은 것과 새것, 악과 선의 대결의 한복판에서 새것이 오게 하는 전투를 한다는 신념에서 행동한 것이다. 그러한 신념과 행태가 귀신을 추방하는데서 구체화된 것이다. 이런 사실은 루가복음 11장 14~22절에서 찾아낼 수 있다. 그는 현 역사의 현장을 악마(사탄)와 하느님의 아들들의 투쟁의 장이라고 본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바로 낡은 세대 곧 악마의 지배에서 인간을 해방하는 행위이며 그 승리를 예시한 것이다. 좀더구체적인예로서는 이미 언급한 18년 병든 여인을 안식일의 규정을 어기면서 치료해주었을 때 그에 항의하는 한 종교 지도자에게 한 말, "아브라함의 딸인 이 여인이 18년 동안이나 사탄에게 매여 있었으니 안식일에라도 그 매임에서 풀어주어야 하지 않겠느냐?"(루가 13, 16)라는 말은 재음미해야 할 말씀이다. 이 말씀은 병자를 한낱 생리적으로 고장이 났다고 보지 않고 사탄에게 포로가 된 상태라고 보며, 병을 고치는 행위를 바로 사람을 병마(病魔)에서 해방시키는 행위로 본 것이다.

그러면 예수는 악마의 지배가 병으로만 나타난다고 보았는가? 그러므로 병마에서의 해방에 치중했는가? 만일 그랬다면, 그는 한 특수한 박수 이상은 아닐 것이다.

위에서 민중과 더불어 행진하는 예수를 보았다. 그리고 그 민중이 어떤 부류의 사람들인가를 보았다. 그런데 그들과 함께하는 그의 행태는 바로 그들을 그렇게 소외시킨 속박에서 해방하는 운동과 병행되었다. 그것을 다음의 단계로 집약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는 강자가 만든 전통사회의 관념에서 저들을 해방하는 일이다. 유다 사회는 성인의 사회, 큰자의 세계, 공로자의 세계라고 한다. 그것은 아이들, 여인들, 약자들 그리고 이유야 어떻든 업적을 이루지 못한 자가 천대 받는 사회라는 말이다. 의인과 죄인의 기준도 이런 사고범주에서 나누어진 것이다. 죄인이란 결국 능력이 없어 율법의 의무를 실천하지 못하는 계층이다. 그런 뜻에서 어린이와 여인들까지도 멸시받았다. 이런 차원에서 보면 가난도 힘없는 것도 죄이다.

예수의 제자들 사이에도 이같은 낡은 관념이 아직 남아 있는 흔적이 있다. 어린이의 축복을 원하는 어머니를 그 어린이와 함께 예수에게 접근하지 못하게 했다(마르 10, 13)는 얘기와 또 사람 수를 계산할 때 남자만 오천 명(마태 14, 21)이었다고 한 것 등이 그런 흔적이다. 예수는 바로 그런 제자들을 책망하는 것으로 낡은 관념에서 해방시키고 있다. 예수의 주변에 있는 많은 여인들, 그리고 가난한 자, 힘없는 자, 곧 낡은 관념에 의해 소외된 자들을 철저히 두둔함으로써 오히려 그런 이들을 위해 세상에 왔다고 했다. 이 같은 관념과의 대결이 루가복음 13장 2~3절에서도 전달되고 있지만, 요한복음(9, 1~3)에도 뚜렷하게 천명되어 있다.

둘째는 자유를 속박하는 체제와의 대결이다. 그것이 비록 신적 권위를 등에 업은 율법에 의해 이룩된 체제라도, 그것이 사람의 자유를 구속하고 나아가서 남을 돕고 사랑하고 살릴 수 있는 지유마저 구속할 때 예수는 그것을 용인하지 않았다. 바리사이파는 바로 당대의 체제의 이념을 제공하고 그것을 지킨 상징적 존재이다. 저들은 안식일법, 정결법 등을 만들어 마치 그물을 쳐놓고 한 귀퉁이에서 벌레가 걸리기를 기다리는 거미마냥 범법자를 색출해냈다. 안식일법과 관련 된 얘기는 많은데 그중 마르코에 있는 두 경우가 대표적이다.

처음 경우는 예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밭 사이로 지나다가 굶주린 탓에 밀이삭을 잘라먹었다. 그런데 바리사이파(유다교)가 그 사실을 고소했다. 안식일에 금하는 추수를 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안식일법이 비인간화의 그물이 된 셈이다. 먼저 바리사이파가 비인간화되었다. 그렇지 않고야 어떻게 생밀 낟알을 씹는 자에게 측은한 생각은 고사하고 범법자로 고발할 생각이 날까! 그와 더불어 저들 앞에서 배고픈 저 사람들(제자들)은 사람이 아니고 한낱 범법자가 된 셈이다. 이에 대해서 예수는 폭탄선언으로 대결했다.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마르 2, 27).

이것은 인권에 대한 대선언이다. 그 어떤 것도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지, 그것이 오히려 사람을 구속하고 사랑할 자유마저 차단하는 것이면 그런 것은 깨버려야 한다는 뜻이다.

또 한번은 안식일에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만난 예수는 그 병자를 불쌍히 보기보단 안식일법을 지키느냐 범하느냐에만 관심을 쏟는 바리사이파에게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마르 3, 4)고 물었다. 이것은 질문이기보다는 바로 율법주의자들에 대한 고발로 보는 것이 그 취지를 제대로 파악하는 것이 될 것이다. 병으로 신음하는 자를 해방시킬 수 있는 길이 있는데도 그렇게 못하게 하는 제도가 있다면 그런 것은 깨버려야 한다. 그러기에 이미 예수의 질문에는 안식일법이 안중에 없다. 선을 행하고 사람을 살리는 것은 안식일이든 아니든 언제나, 어느 날에나 해야 할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주저없이 안식일에 치료할 수 없다는 율법을 깬 것이다.

예수에게서 이러한 반율법적 행위나 말씀을 자주 접할 수 있는데(반정결법에 대한 것은 마르 7, 1510, 5~10; 마태 5, 21 이하) 그는 율법 자체를 파괴하기 위해 파괴한 것이 아니라, 그것이 인간을 구속하고 비인간화하는 경우에 그것을 범하는데 주저하지 않은 것이다. 그가 유다 종교 지도자층을 그렇게 힐책한 것도(마태 23장) 저들이 율법을 지키기 때문이 아니라 바로 하느님의 뜻을 '법'으로 파악하고 형식적으로만 실천하고 그 본뜻은 무시하기 때문이다(특히 23절).

우리는 위에서 예수가 귀신 쫓은 행위를 위시해서 병자를 고치는 일 등은 악마와의 투쟁의 상징적 예시라고 했다. 여기서 좀더 밝힐 것이 있다. 그것은 예수도 묵시문학파와 마찬가지로 악마를 하나의 집단적인 악으로 보았다는 사실이다. 예수의 적대자들이 예수가 귀신 쫓는 행위를 사탄의 두목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하는 행위라고 비난할 때 예수는 "한 왕궁이 갈라져 싸우면 그 나라가 절대로 설 수 없다……"라고 하고, 사탄이 사탄과 싸우면 그것이 어찌 존립할 수 있겠느냐(마르 3, 20~25)라는 대답 속에 사탄은 한 집단이라는 묵시문학적 전제를 반영하고 있다.

루가는 게르게사 지방에서 한 사람을 괴롭히는 귀신의 이름을 레기온(legion)이라 했다. 그것은 로마군대의 집단단위를 표시하는 것으로서 사탄의 집단성을 말한다. 현대 언어로 그 실체를 표현한다면 그것은 '구조악'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보면 예수는 구조악과 싸운 것이며, 구조적 속박에서의 해방이 예수의 지상과제임을 시사한다. 그런 뜻에서 루가가 이사야서를 인용하여 예수가 온 목적을 "가난한 자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심"과 "포로된 자들에게 해방을 선포하고 눈먼 자들에게 눈뜨임을 선포하며 눌린 자들을 놓아주기"(루가 4, 18) 위해서라고 했다. 이것이 하나의 선포에 그쳤거나 행동으로 했거나 간에 그것은 가난하게 하고 포로로 잡고 억누르는 구조적 세력의 제거를 빼고는 이룰 수 없는 일이다. 그러므로 그의 싸움은 비록 단편적으로 한 사람 한 사람을 병에서, 제도에서, 관념에서 해방시켰으나, 전체적으로 보면 구조악과의 대결의 일환이 관념에서 해방시켰으나, 전체적으로 보면 구조악과의 대결의 일환이라고 볼 때 옳게 파악되는 것이다. 이것은 하느님 나라의 도래와 관련되어 있다.

셋째 단계는 둘째 단계와 유리되지 않지만 구체적으로 눌린 자, 포로된 자들 편에 서서 저들의 인권을 찾아주고 저들에게 새로운 세계가 임박한 것을 알리면서 이미 하느님의 아들과 딸로서 무조건 영접하여 참 인간으로 환원시킨 것인데 이것은 이미 '민중과 더불어'에서 살펴본 바와 같다.


| 안병무전집4 |
예수의 이야기
(한길사)
List of Articles
표지
예수는 논하지 않았다
   
제1부 민중의 언어, 이야기
   
1. 성서라는 책의 성격
2. 성서의 서술양식
    1) 구약성서
    2) 신약성서
    3) 민중언어
   
제2부 예수의 이야기(비유)
   
1. 만성병에 걸린 세대
    1)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2) 이 때를 모르는 세대
    3) 악마가 악마라는 죄목으로 박해하는 세상
    4) 어둠에서 썩어가는 세대
2. 잃어버린 자를 찾아서
    1) 목동과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
    2) 잃은 돈 찾은 여인
    3) 돌아온 아들의 아버지
3. 가치의 전도
    1) 누가 ‘그’의 이웃이냐?
    2) 오! 하느님!
    3) 부자의 돈과 과부의 돈
    4) 말만 하는 자와 실천하는 자
    5) 자신을 철저히 비운(空) 자
4. 집요한 투쟁(간구)
    1) 참는 데도 한계가 있다
    2) 닫힌 문
    3) 빚진 자의 엉뚱한 마무리
    4) 한 과부의 투쟁
    5) 친구를 위한 투쟁
5. 심판
    1) 공존의 때와 심판의 때
    2) 그물 안에 든 고기
    3) 심판과 맡은 분깃
    4) 심판과 대비
    5) 너무도 어리석은 부자
    6) 한 부자와 거지
    7) 뜻밖의 심판의 기준
    8) 심판은 바로 관용의 한계
    9) 이미 문이 영원히 닫혔을 때
6. 하느님 나라에 관한 이야기
    1) 제 손으로 심은 씨가 어떻게 자라는지 알지 못하는 농
    2) 겨자씨 이야기
    3) 조용한 혁명(누룩의 이야기)
    4) 그만이 아는 숨겨진 보화
    5) 한 장사꾼의 모험
    6) 해방의 기쁨
    7) 밥상공동체
    8) 손익계산이 없는 세계
    9) 절망과 희망(씨 뿌리는 농부)
   
제3부 성서해석권은 민중에게
   
1. 한 책에 대한 두 가지 이름
2. 성서의 열쇠는 주머니 속에
3. 성서의 전승을 위한 노력들
4. 종교개혁시대와 성서해석
5. 다시 빼앗긴 성서해석의 권리
6. 성서해석권을 되찾으려는 평신도운동
7. 성서의 전승모체
8. 신약성서 성립
    1) 민중과 '지도층'의 상충
    2) 마르코복음의 성립
9. 제 것을 지키지 못하는 주인
   
제4부 역사의 예수
   
1. 역사의 예수
    1) 역사의 예수 추구
    2) 자료
2. 예수의 시대상
    1) 정치적 상황
    2) 유다 사회상
3. 공생애의 출발
    1) 세례자 요한
    2) 세례자 요한이 잡힌 후
    3) 갈릴래아로
4. 갈릴래아의 예수
    1) 민중과 더불어
    2) 제자 선택
    3) 예수의 시선이 머문 대상
    4) 자유를 위한 투쟁
    5) 하느님 나라의 선포
5. 예루살렘의 예수
    1) 예루살렘
    2) 예루살렘행
    3) 예루살렘 입성
    4) 죽음의 전야
    5) 심문과 처형
6. 그는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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