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의 실력자 폼페이우스(Pompeius, 주전 106- 48년)가 동방정벌의 대군을 일으켜(주전 66년) 그 판도를 넓혀가면서 유다인들을 압박하고 있었다. 로마는 본래 상업으로 부유해진 나라다. 그런데 이것은 노예제사회였다. 저들의 생활수준의 성장과 확대는 더 많은 노예를 필요로 했으며, 또한 약소민족의 곡물을 수탈하기 위해서 군사적 침략을 감행했다. 그러므로 저들의 군사주둔지는 바로 노예의 공급지요, 식량조달처이기도 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하스몬왕가는 정권쟁탈싸움에 열중했다. 형제인 히르카누스 2세와 아리스토불 2세는 그들의 생모인 알렉산드라 여왕(Alexandra, 주전 76~67년, 재위)의 권좌계승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이 둘은 모두 로마 폼페이우스의 힘을 빌려 군주국을 유지하려고 했다. 그러나 민중은 이러한 군주국을 반대하고 사제정부 정도까지는 용인하겠다는 태세였다.13)Jos., Ant., 14, 3, 2.
폼페이우스는 결국 하스몬 가의 형제 중 아리스토불을 제거하기로 결정함과 동시에 예루살렘으로 진격했는데 안티파터(헤로데 대왕의 아버지)의 조종을 받고 있던 히르카누스는 자진해서 성문을 열어주었다. 그러나 이에 굴하지 않은 이스라엘민은 아리스토불과 더불어 성전을 교두보로 저항하기를 3개월간 계속했다. 결국에는 성전도 점령되었는데 요세푸스는 그때 죽은 이스라엘민만도 1만 2천 명이라고 한다.14)Jos,. Ant., 14, 2, 4. 그후 로마에 포로로 잡혀갔던 아리스토불 부자(父子)가 차례로 탈출, 귀국해(주전 57~56년) 흩어진 군사를 모아 재기를 꾀했으나 피만 많이 흘렸고, 예루살렘 함락(주전 63년)과 더불어 마카베오 가가 쟁취했던 주권도 빼앗겼을 뿐 아니라 마침내 하나의 작은 '성전지방'15)Bo Reicke, a.a.O., S. 62/ 한역본 92면.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로마는 이스라엘을 죽은 짐승 고기처럼 갈기갈기 찢었다. 해안의 모든 도시들, 요르단 강 저편의 도시들 그리고 유다와 사마리아 일부도 빼앗아버렸다. 그리고 왕권을 폐지하고 그들에게 협조한 대가로 히르카누스에게 이름뿐인 대사제직을 주었다. 그리고 이스라엘 민족을 대표하는 산헤드린을 다섯 지역으로 나눔으로써 구심점을 깨뜨리려고 했다. 민중이 마카베오 가에 호응해서 주권을 회복하기는 했지만 지배층은 권력을 잡으면서 권력욕에 사로잡혀 부패하고, 권력싸움만 일삼다가 더 무서운 외세를 끌어들임으로써 마침내 망국의 비운을 맞게 되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