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앞 마당에서 하느님 나라의 도래가 예수의 선포의 중심인 것을 확인했다. 여기에서는 예수의 행적에 가장 큰 비중을 둔 사건으로서 민중과 함께 하는 예수를 개관했다. 그러면 이 가장 중요한 두 사실이 서로 어떤 관련이 있는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마르코복음에 의한 예수의 생애는 하느님 나라 도래의 임박이라는 대전제 밑에서 예수의 일체의 행태를 이해하고 있다. 하느님의 나라는 관조의 객체가 아니라 쟁취하는 실천 속에서 실현되는 현실이다. 그러면 예수가 민중과 함께 이러한 투쟁의 방향을 제시한 적이 있는가?
복음서에 나타나는 민중은 대부분이 그 사회에서 소외되고 무능한 자들로 부각되고 있다. 그들과 더불어 한 예수의 행태를 보면 가난하고 병든 자들을 그들의 요청에 의해서 도와준 사람이라는 인상을 받게 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따른다"(imitatio Christi)는 것을 바로 구제사업으로 인식해 온 오랜 전통을 서구신학은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 민중을 하느님 나라 도래의 선포와 관련시켜 볼 때 그들을 구제의 대상으로 삼았을 수 없다. 우리는 비록 복음서에 명확하게 제시되어 있지 않으나 갈릴래아 민중을 이스라엘의 민중전통에서 볼 필요가 있다.
이미 '하느님 나라'라는 주제의 마당에서 밝힌 대로 고대 이스라엘 부족 지파동맹을 형성한 합비루는 민족개념이 아니라 계층을 지칭했다는 사실은 정설로 되어 있다. 이 합비루는 군주들의 농노상태에서 탈출하여 자주적인 자치동맹을 형성했다. 이 동맹을 지탱하는 데 결정적인 것은 군주제도를 배격하는 일이었다. 그것이 바로 "야훼만"(Mono-Yahwism)이라는 간단하고 확고한 기치가 된 것이다. 즉 야훼 외에 어느 인간의 주권도 용인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야훼만"이 통치하는 사회가 합비루의 이상이요 염원이었다. 약 200년 동안 계속된 이 고대의 해방된 이스라엘 체제는 군주국이 된 이후에도 선망의 대상이었다.
그런데 갈릴래아 지방이 지역적으로도 고대 이스라엘의 판도 안에 있었다는 것은 중요하다. 갈릴래아는 유다인들에 의해서 그 순수성을 멸시받고 있었지만 사실은 그와 전혀 다르다. 갈릴래아에 많은 외국인들이 거주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도시에 한한 것이다. 갈릴래아에 세워진 도시들은 애초부터 침략한 외세에 아첨하기 위해서 세워졌는데 특히 로마시대에 그러했다. 그러므로 이 도시들은 노예노동에 의해서 팽배해진 그레꼬 로마적 사회인데 반하여, 농촌은 고대 이스라엘 당시의 체제와 별로 달라지지 않은 이른바 준아시아적 생산양식의 사회이며 저들은 비옥한 토지, 비옥한 땅에 살면서도 가난에 시달렸다. 예수가 저들과 행동을 같이 할 때에 아무런 구체적 목표가 없었다고 보는 것은 상상할 수 없다. 아니 거꾸로 예수를 무조건 따르던 수많은 민중들이 단순히 구제나 기대하는 나약한 자들이었다고 볼 수는 없다. 로마제국의 식민지민으로서 착취를 당하고, 그의 앞잡이인 헤로데왕가에 의해 그리고 더 나아가 침략세력과 야합하여 생산품의 징수권을 가진 종교귀족들에 의해서 이중삼중으로 착취당하는 저들에게 예수가 선포한 하느님의 나라가 어떻게 이해되었으며 또한 예수에게 무엇을 기대했는지를 상상할 수가 있다. 우리는 예수가 하느님 나라 자체에 대해서 별 설명이 없었다는 사실을 사람의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신비의 현실이었기 때문이라거나 그때 상황이 그것을 언급하는 것을 허락치 않았기 때문이라는 추측보다는 오히려 그들에게는 설명이 필요없을 만큼 너무도 자명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제 그것에 관한 이야기는 다음 마당에서 계속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