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예수의 행태에 눈을 돌려보자. 예수가 활동하던 시대는 로마제국이 온 세계를 점유할 듯이 기세를 부릴 때다. 이 신흥세력은 희랍세력에 대치된 것이다. 저들은 군사력으로 점유한 땅을 자기들의 것으로 하고 그 안의 모든 것, 심지어 사람들까지도 자기들 것으로 치부하여 마음대로 혹사하였다. 이런 판국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의 균형을 깨뜨린다. 소유권을 주장하는 편에 가까이 서는 자들은 소유권을 분배받는다. 따라서 권력과 경제에서 계급이 생긴다. 팔레스틴도 물론 예외가 아니었다.
갈릴래아 지방은 특히 이 소유권 주장으로 인한 쟁탈전에 시달린 땅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에서 잘려나가, 신흥세력이 일어날 때마다 그 주인이 바뀌어 비리가 난무하는 현장이었다.10)넷째 마당 '갈릴래아로'를 참조. 로마가 새 주인권을 발동했을 그때, 그 그늘 아래서 소유권 주장자들이 많이 생겨났다. 이 마당에 예수는 부유한 자들과 가난한 자들을 주목하여 부자들을 깨우치는 일에서 출발한다. 예수는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단호히 말하는데 그것은 어떤 부자 청년과 접촉한 다음에 한 말이다(마르 10, 25). 이 부자 청년에게 예수는 그가 가진 모든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에게 주라고 명한다(마르 10, 21). 그 청년에게는 이것이 불가능했다. 그는 사유화한 재산이 영원히 자기 것이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풀려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 재산이 공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수확을 많이 한 한 부자가 곳간을 더 크게 짓고 그것을 보관한 다음 "내 영혼아 여러 해 동안 쓰기에 넉넉한 좋은 물건들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너는 안심하고 먹고 마시고 즐기라"(루가 12, 19)고 했다. 이 부자는 재산을 사유화할 수 있다고 보고, 소유가 삶을 보장한다고 믿고 있는 사람이다. 이에 대해 하느님은 "이 어리석은 사람아, 바로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을 것이다. 그러면 네가 장만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루가 12, 20)라고 했다. 이것은 소유와 삶은 별개라는 말이며, 소유는 삶을 보장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어리석은 자는 수확한 곡물이 자기 것이라고 생각한 데 대해 하느님은 그가 오늘 밤 죽으면 그것이 모두 누구의 소유가 되겠느냐고 반문한다. 예수는 마침내 저들을 심판한다.
너희 부요한 사람들은 화가 있다.
받을 위안11)παρακλσίς(돈이 주는 위안).을 이미 받았다.
너희 지금 배부른 사람들은 화가 있다.
굶주리게 될 것이다.(루가 6, 24~25)
왜? 저들은 자기가 향유하는 것이 영원히 자기의 것이라고 착각한다. 저들의 부는 하느님의 것을 유린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만큼 분배에 차질이 생겨 한 쪽에는 가난한 자들이 생기는 것이다. 저들은 저 가난의 원인이 자신들의 독점에 있다는 것을 생각지 않는다. 저들은 공(公)을 침범한 자들이기에 화가 있다.
한 부자가 저주를 받게 되었다. 그는 자신이 왜 저주를 받아야 하는지 모르고 산 자였다. 그는 자신의 삶을 만끽했다. 그의 집 문전에 나자로라는 거지가 있어 상 아래 떨어진 부스러기로 연명하며 그 집 개들이 그의 종기를 핥는 처참함을 보여주었다(루가 16, 20~21). 그 거지는 바로 그에게 계속 경종을 울리기 위해 보내진 셈이다. 그러나 그 부자는 그것을 몰랐다. 자신의 소유를 당연한 '권리'로 알 뿐, 바로 그의 독점이 가난한 자들을 만들어 냄으로써 하느님의 질서 즉 공을 침범한다는 사실을 몰랐으며, 자신이 왜 저주를 받아야 하는 지도 알 수 없었다. 까닭은 그가 부자라는 것 외에 그리고 나자로에게 전혀 무관심한 것 외에 그의 잘못을 나타내지 않았기 때문이다(루가 16, 19 이하).12)안병무, 「가난한 자」, 앞의 책 참조.
어떤 왕이 1만 달란트나 되는 재산을 축낸 종에게 그의 몸과 처자와 그 밖에 그가 가지고 있는 것을 모두 팔아 갚으라는 단호한 명령을 내린다. 그러나 다음 순간 이 왕은 아무런 조건도 제시하지 않고 그를 빚에서 해방시켜준다. 참 소유권자로서의 자유를 보여준다(마태 18, 27). 그런데 이렇게 빚에서 해방된 그는 자기가 졌던 빚에 비해서 극히 미미한 빚을 진 그의 동료가 자기가 왕에게 간청했던 것과 똑같이 간청했어도 용서하지 않고 옥에 가두었다(마태 18, 30). 그는 자기의 소유권을 절대적인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이 소식을 들은 왕은 그를 다시 체포하여 옥에 가두고 그 빚을 다 갚을 때까지 석방하지 말라고 지시한다(마태 18, 34). 이 왕은 우리가 말하는 공에 해당하며 이 종은 공을 사유화한 전형적인 경우다. 그러므로 그의 죄는 용서받을 수 없다. 이것은 하느님 나라에 대한 예수의 비유이다(마태 18, 23~35).
들에 핀 꽃 한 송이를 보고 예수는 "온갖 영화를 누린 솔로몬도 이 꽃 하나만큼 입지 못하였다"(마태 6, 29)고 말한다. 솔로몬, 그는 이스라엘 역사에서 모든 권력을 한 손에 쥐고 가장 화려하게 산 행복한 사람의 상징이다. 그러나 그는 하느님의 것, 공을 침범한 대표적 상징이기도 하다. 공중에 나는 새, 들에 핀 꽃, 그것은 위의 구약 여러 본문에서 보았듯이 하느님의 땅과 하늘에서 아무런 사유함도 없이 하느님의 것을 먹고 입는 구체적인 예로서 먹을 것과 입을 것 때문에 걱정하는 사람들에게 참 삶의 모범으로서 제시되며, 안심하고 살도록 격려한다. 즉 가짐에서가 아니라 공에서 살라는 것이다.
예수 자신은 자신의 삶의 양식에 대해서 "여우는 굴이 있고 공중에 나는 새도 깃들일 곳이 있는데 인자는 머리 둘 곳도 없다"(마태 8, 20)고 한 것처럼 집도 가정도 아무 소유도 없이 글자 그대로 무소유의 방랑객처럼 살았다. 이것은 사유화와 독점화로 공을 침범하는 타락한 세대를 향한 상징적인 저항행위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와 같은 생활로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