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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병무전집2 |
민중신학을 말한다
(한길사)
성서의 통일성—그 민중신학적 의미

▶ 그러면 성서의 통일성 문제를 얘기해보지요. 선생님께서는 성서에 통일성이 있다고 보십니까? 있다면 그 통일성의 민중신학적인 의미는 무엇일까요?

독일에서 공부하던 시절에 나는 불트만에게 경도되어 있었어요. 그때 불트만의 「구약성서가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라는 논문을 읽었는데, 그는 "구약은 의미가 없다"고 결론 내리고 있어요. 그는 구약은 신약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부수적인 자료'일 뿐이라고 하면서 구약을 경시합니다. 그래서 나는 그의 말에 따라서 구약을 공부 안했어요. 불트만의 입장은 "우리의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에서 구약에 관심할 뿐이지 유다교와 유다 민족사까지 우리가 책임질 필요가 있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불트만은 '역사적 예수'와 '신앙의 그리스도' 사이에는 뛰어넘을 수 없는 괴리가 있다고 말하고 있어요. 그의 표현대로 하면, "하느님 나라를 설교하던 자(예수)가 그리스도교회에서 설교의 내용(그리스도)이 되었다"는 것이지요. 예수가 바로 그리스도라는 말을 하고 있지만, 실은 역사적 예수사건과 그리스도 고백은 별개의 것으로 서로 연관성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보면,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에서 신약성서는 중시하고 구약성서는 경시했던 불트만 자신의 입장이 중대한 자기모순에 빠지게 됩니다. 그렇다면 구약도 그런 정도의 의미는 인정 받아야하는 것이니까요.

한번은 불트만 학회에서 브러운(H. Braun)이란 신약학자가 신약을 전부 들춰내어 가장 대표적인 것을 뽑아서 그리스도론, 구원론, 교회론, 성령론의 네 가지로 정리해놓고 그것을 각각 검토한 다음에 "그 네 가지는 하나도 연속성이나 통일성이 없다"고 했어요. 그래서 그가 내린 결론은 "하느님 앞에서 너는 가능성이다!"(Vor Gott du darfst, du kannst)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내가 질문을 던졌습니다. "너희들은 국립학교 관리들이니까 그런 애매한 소리하고도 밥 먹고 살 수 있지만, 우리는 다원적인 종교상황 한복판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그런 애매한 대답 가지고는 한 순간도 신학자로서 서 있지 못한다. 우리는 확실한 대답을 해야 한다. 결단해야 한다. 방금 당신이 한 그런 정도의 말을 우리 한국에서는 유교, 불교, 도덕경에서도 얼마든지 할 수 있다"고 해줬지요. 그날 저녁 학회가 끝난 후 브라운 주변에 케제만(E. Käsemann), 보론캄 등 여럿이 모여 그에게 안병무의 질문에 대답하라고 했어요. 보른캄의 요구에 케제만도 가세하여 상당히 강경하게 반론을 폈어요. 곁에 있던 젊은 사람들도 다 이렇게 나오니까 브라운이 막 화를 냈어요. 그 와중에도 내가 다시 물어봤어요. "그러면 당신이 다른 종교에 대해서 그리스도교를 전도하는 설교를 할 수 있느냐?"고, 그랬더니 대답을 안하려고 해요. 보른캄이 중요한 질문이니까 대답을 하라고 하니까, 한참 있다가 "전도 설교? 글쎄…… 설교는 할 수 있다"(Missionspredigt? Ich weisse nicht, aber ich kann predigen)고 했어요. 중요한 말이에요. '전도 설교'와 '설교'는 굉장한 차이가 있거든요. 그 말은 후에도 오랫동안 기억에 남았고, 지금 생각해도 그 사람은 양심적이었다고 생각돼요. 어쨌든 브라운의 결론도 성서 전체에는 어떤 통일성도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통일성을 묻는 의미가 무엇인가를 반성해볼 필요가 있어요. 불트만에게 말을 시키면, "성서가 우리에게 결단을 요구하느냐 안하느냐가 중요하지, 통일성이 있느냐 없느냐는 중요하지 않다"고 할 거예요. 통일성을 찾게 되면 쉽게 조직화(stystematize) 해버리려고 하게 되지요. 결국 '어떤 의미의 통일성을 말하는 것이냐? 왜 이걸 요청하는 것이냐'가 문제입니다. 소위 교리라는 것은 통일성을 자기 나름대로 찾아낸 것 아닙니까?

우리가 통일성을 찾을 때는 주의할 것이 있습니다. 통일성을 찾으면 체계화하거나 조직화하게 되고, 쉽게 일원화로 달려가는 위험이 있습니다. 성서 자체는 풍부한 다양성을 지닌 삶의 기록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을 어떤 하나의 교리적 체계로 단색화(單色化)시키게 되면 삶의 기록에서 '삶'이 쑥 빠져버립니다. 이것은 살아 있는 생명을 어떤 틀에 가두어 질식시키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말하는 통일성이 그런 의미의 통일성이 아니고, '성서에서 어떤 커다란 전통의 흐름을 잡을 수 없겠느냐'는 의미라고 한다면 그것은 얼마든지 가능하지요. 브라운이 말했듯이, 하느님 앞에서 우리는 그것을 할 수 있는 자유가 있어요. 불트만식으로 말하면, 하느님 앞에서 '결단'을 하는 거지요. 그가 "신학은 인간학이다"고 했을 때, 신학은 삶의 기록인 성서를 다룬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인류의 역사가 아주 길고 다양하듯이 성서도 아주 길고 다양한 역사를 가지고 있고, 우리의 삶이 복잡하고 도무지 해결할 수 없는 숱한 모순을 지닌 것처럼 성서도 논리적으로 전부 해결할 수 없는 많은 모순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삶에 어떤 맥이 있듯이 성서도 커다란 맥을 지니고 있어요.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구약에서 신약까지를 꿰뚫고 흐르는 하나의 맥을 짚어낼 수 있다고 할 수 있어요.

그 맥을 민중신학은 어떻게 보고 있느냐? 이걸 얘기해보기로 하겠습니다. 나는 성서를 얘기할 때 '태초에 하느님이 말씀했다'라기보다는 '태초에 사건이 일어났다'고 말합니다. 출애굽 사건을 예로 들면, 파라오의 권력에 의한 박해사건이 먼저 있었고 히브리의 저항과 탈출사건이 잇따릅니다. 사람이 사람 대접을 못 받고 권력에 눌려 신음하다가 마침내 거기서 탈출합니다. 이런 사건이, 비록 그 구체적인 모습은 다르지만 신약에까지 일관해서 일어납니다. 이 문제를 보는 데는, 아직 정설로 확정되지는 않았지만 고트발트(N.K. Gottwald)의 고대 이스라엘 사회의 혁명 모델에 대한 가설이나 픽슬레이(G. Pixley)의 『하느님 나라』의 관점이 많은 도움을 줍니다.

에집트에서 탈출한 히브리와 팔레스틴의 농노들이 어떻게 만났는지는 별문제로 하더라도, 군주국이 형성되고 권력욕이 강한 사람들 이 팔레스틴의 민중을 농노로 삼아 지배하고 수탈했을 때, 눌린 민중이 저항하고 일어나서 에집트에서 탈출해 나온 히브리와 연합전선을 펴서 '하느님만'(mono-Yahwism)이라는 이념 아래 소위 부족동맹(Amphictyony)을 결성했어요. 여기서 '하느님만'이란, 다른 종교들과의 경쟁에서 야훼만을 내세우는 그런 종교적인 의미만이 아니라 하느님 자리에 사람이 대신 앉으려는 인간의 권력욕에 대해서 거부한다는 입장입니다. 소위 종교사학파들은 그것을 종교 사이의 경쟁에서 야훼만을 주장하는 것으로 봤지만, 인간이 권력욕에 의해서 자기를 절대화하여 사람 위에 군림하는 것을 거부하는 정신이 '야훼만'의 신앙으로 표출된 것입니다.

'하느님만'이라는 신앙과 권력의 지배로부터 탈출한 사건은 동전의 양면처럼 불가분리의 관계에 있어요. 나는 이 점을 굉장히 중요시하고 싶습니다. 고대 이스라엘의 부족동펭(이른바 12지파 동맹)의 야훼신앙은 소위 순수한 종교적, 피안적 성격이었던 것이 결코 아니고 그야말로 삶에서 일어난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사건과 결부된, 구체적인 생활규범이었다고 생각됩니다.

이러한 부족동맹의 체제가 한 200년 가량 계속되다가 다윗왕조가 성립되고부터는 이것이 변질되어버렸어요. 또 하나의 사건이 일어난거죠. 다윗에 앞서 사울은 그렇게 절대군주가 아니었어요. 다윗에 와서야 비로소 군주제도가 확립되고 사실상 '야훼만'이 깨지고만 겁니다. 그가 예루살렘을 왕도(王都)로 만들고 궁성을 짓고 거기다 법궤를 안치함으로써 사실상 '야훼만'을 압살한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가장 타락한 군주였던 솔로몬이 세운 신전은 말하자면 야훼를 감금 한 감옥인 셈이었습니다. 여기서 야훼는 다윗왕조의 이데올로기로 격하되고만 것입니다. 다윗왕조의 성립과 더불어 고대 이스라엘사가 끝이 납니다. '야훼만'의 종언이지요. 이때부터 예언자들의 시대가 시작됩니다.


| 안병무전집2 |
민중신학을 말한다
(한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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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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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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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는 민중이고, 민중은 예수다
    ‘성문 밖’에 현존하는 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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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그리스도인의 과제
민중의 책 성서
    한국 교회의 재래의 성서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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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컨텍스트’와 ‘텍스트’의 긴장
    민중신학의 컨텍스트는?
    성서는 우리에게 결단을 요구할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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