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시는 절대적이다'라는 전제를 나는 좋아하지 않아요. 과연 그런가? 그건 잘 모르겠어요. 아마 다른 말로 풀어야 할 거예요. 내가 아는 건 이래요. "성서는 우리에게 '이때는 이래라, 저때는 저래라' 하고 세밀한 지시를 하지 않는다. 시대적인 거리도 있고 또 그렇게할 수도 없다. 성서로부터 우리의 행동지침이나 사회윤리를 직접 끌어낸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 점에 대해선 나는 불트만에 동의합니다. 성서는 우리에게 결단을 요구합니다. 우리를 가만 놔두지 않고 현장으로 밀어냅니다. 그리고 구체적인 행동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성서는 함구합니다. 그것은 내가 결정하는 것입니다. 어떤 방법으로 싸워야하는가? 전략ᆞ전술은 어떠해야 하는가? 데모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런 것을 성서에서 찾는다면 그건 웃기는 얘기입니다. 그것은 현실 속에 있는 내가 찾아내야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성서로부터 유리되는 것이냐? 그렇지 않습니다. 성서는 내게 계속 사랑과 정의의 행동을 하라고 요구해오는 것입니다. 유리란 있을 수 없어요. 거듭 말하지만, 가령 노동운동을 성서적으로 해보자거나 농민문제를 성서적으로 풀어보자거나 하는 것은 난센스예요. 노동자와 농민의 권익은 보호해야 한다, 성서는 거기까지 말할 수 있습니다. 노동운동, 농민운동의 방법론을 얘기할 때는 그리스도인이거나 아니거나 전혀 상관이 없이 모두 같은 인간의 자격으로서 얘기할 뿐입니다.
가령 여기 노동문제에 관심 있는 두 사람이 앉아서 얘기한다고 합시다. 한 사람은 마르크시스트이고 다른 한 사람은 그리스도인이에요. 둘이 마주앉았어요. 자, 노동운동을 어떻게 하느냐, 얼마든지 같이 얘기할 수 있습니다. 어느 방법이 가장 나은가? 거기서 폭력을 써야 하느냐, 안 써야 하느냐? 그것은 성서에 물을 얘기가 아닙니다. 이런 정책이 좋겠다, 저런 방법이 좋겠다, 그건 인간에게 맡기는 겁니다. 아까 브라운이라는 독일 신학자의 말을 소개했지요, "하느님 앞에서 너는 가능성이다!"(Vor Gott du darfst, du kannst)라는.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 선생님, 세군도도 꼭 그렇게 말해요. 정책 프로그램을 성서에서 구해서는 안 된다고요.
난 세군도를 읽은 적 없어요. 그건 이미 불트만이 한 말입니다. 예수는 프로그램 제시는 하지 않습니다.
▶ 선생님께서는 이제까지 전략 부분은 나의 소관이 아니라는 식으로 언제나 보류해오셨지요. 신학적인 결론으로서마저도 말입니다. 그런데 현장에서 목회를 하거나 민중들과 더불어 싸우고 있는 분들은 실제적인 필요에서 그리스도교적인 지침이랄지, 그런 것을 절실하게 요청하고 있어요.
그건 이래요. 내가 거듭거듭 얘기하는 거지만, 내가 일부러 그 문제를 멀리하려고 해서가 아니라 내겐 그걸할 능력이 없다는 거예요. '내가 해야 한다'는 주제넘는 생각을 안하는 것뿐이지요. 나는 만일 현장에 있는 사람들이 조금이라도 민중신학의 입장에서 현실문제의 해답을 구하려고 노력한다면 훨씬 분명한 정책이나 전략의 방향을 민중신학으로부터 끌어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 면에서는 겸손하려고 해요. 그 일은 현장에 있는 사람들이 해야 하는데 그분들이 그 일을 자꾸 미루고 있다는 느낌이에요. 그런 일까지 신학하는 사람이 독점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