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서 교회가 제 모습을 찾아야 할 첫번째 과제가 분명해집니다. 그것은 종말론적인 본래성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예수와 민중의 만남의 장으로서의 교회가 될 수 없습니다.
교회는 결코 건물이 아닙니다. 하느님 나라는 결코 교회에만 국한하여 내림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교회는 스스로 쌓은 담을 헐어야지요. 왜 교회가 하느님 나라를 독점함으로써 사실상은 그 나라를 차단합니까! 그러면 교회는 예수와 민중이 만나는 종말적 공동체라는 것으로 다 설명됐나? 아니, 공관서에 의하면 또 하나의 다른 면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예수는 민중과 조건 없이 만나서 모든 것을 나누는 공동체를 이룩 합니다. 그런데 한편으로 민중 가운데서도 '제자'라는 그룹을 설정 합니다. 저들에게 특별한 사명을 줍니다. 그 사명은 '파견한다'로 성격화할 수 있을 것입니다.
'보낸다!' 이것은 예수가 보냄받은 것처럼 저들을 세상에 보내는 것입니다. 어디로? 세계로 보내는 것입니다. 저들을 보내는 것은 하느님 나라가 도래하고 있다는 것을 증거하기 위한 것입니다. 말로만이 아니라 저들에게 귀신을 쫓고 병을 고치면서 그 나라 도래의 증거로 삼으라고 했습니다(마르 6, 12~13). 그것은 예수의 행태와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실은 처음 예수운동에 참여한 자들은 사방으로 흩어졌습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났습니다. 그런데 이 '보냄'의 전통은 종말의식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습니다.
그런데 종말의식이 희미해지고 하느님 나라 표상을 잘못 인식함으로써 그 나라의 도래가 지연된다고 본 자들이 '보냄'의 전통에서 '모음'의 전통으로 전환한 것입니다. 가령 공관서에는 제자들을 '보낸다'가 중요한 명령인데, 바울로에 와서는 '보냄'과 '모음'이 병행 하다가 후기 바울로에 와서는 '보냄'의 전통은 완전히 없어지고 '모음'의 전통만 남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모여서 예배드리는 곳이 되므로 모이는 것이 목적이 되니까, 교회란 세계를 위한 것이 아니라 그 자체를 위한 것이 되고 만 것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기성교회에 무엇이 빠져버렸느냐?'는 것이 또 하나 밝혀진 셈입니다. 즉, 교회가 스스로 '거룩한 장소'로 자족함으로써 원모습을 역행한 것입니다. 교회란 자기를 비우거나 죽이면서 세상에 보냄받기 위한 운동체여야 합니다. 세상으로! 그것은 자동적으로 예수의 민중에게로, 민중의 현장에로 가게할 것입니다. 교회가 예수운동의 계보에 속한 것인 한,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려면 바로 세상으로 나가는 데 장애가 되는 온갖 장식품들―그것이 신의 이름을 빌린 것이라도―을 과감히 폐기해야겠지요.
▶ 그렇다면 현재와 같은 교회의 체제와 조직과 제도, 그 형태를 그대로 가지고 있으면서 거기에 종말론적인 강한 요소를 다시 회복할 수는 없을까요? 아니면, 내용과 형식이라는 것이 불가분리적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이 형식을 갖고는 그런 내용을 담아낼 수 없는 것인가요?
지금 것을 그대로 두고 강한 종말론적 요소를 회복할 수 없는가라는 질문은 그 자체가 잘못된 것입니다. 내용과 형식이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면서요? 내용이 달라지면 형식도 달라지게 마련이지요. 지금의 교회체제나 체질은 바로 반(反)종말적 탈바꿈에서 형성된 것입니다.
'내용만 있고 형식은 없어도 된다'는 말은 물론 아니지요. 이 둘을 분리시켜서 본다면 내용아 중시되고, 형식은 내용에 따라 상대화돼야지요. 그런데 기성교회란 거꾸로 형식을 고수하고 내용을 그것에 맞도록 상대화하거나 형식을 고수하기 위해 보수적 교리를 만들고 그것에 매달립니다. 혹은 그런 것은 쉽게 개혁할 수 있다고 생각할지 몰라도, 그러나 그것을 방해하는 계층이 있어요. 그 계층이 바로 제도적 교회를 이끄는 이른바 지도층입니다. 쉽게 말하면 성직자들입니다. 저들은 자신들의 위치를 공고히 하기 위해 자꾸 교회를 고유한 분위기로 만들고 그 자리의 주인은 자신만이 되도록 합니다. 이것은 일반 제도적 기관에서 일어나는 현상과 똑같습니다. 저들은 교회를 그리스도와 민중이 만나며 또 현장으로 보냄받는 본분을 다하는 곳으로 이해하기보다는, 한데 뭉뚱그려 모이는 곳이라고 이해하고, 따라서 저들은 모인 이들을 다스리는 것(治理)에 관심하게 마련입니다. 이것을 위해 신학자들도 큰 역할을 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