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계속적인 명암의 반복이 있어왔지요. 그러는 동안에 끊임없이 예수운동으로의 회귀를 목표로 한 운동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정통적 주류에 의해 이단으로 단죄되곤 했습니다. 그들은 포괄적이 아니고 어느 부분을 크게 부각시키므로 편향적이기는 했으나, 그 방향성만은 적극적인 데가 있었어요. 무엇보다도 종말론적 성령론이 거의 공통적인 것이었으니까요.
기존교회가 어떻게 자체를 개혁하느냐 하는 것은 교회사를 통해서 거듭 논의됐고, 현금에는 W.C.C를 통해 많이 제시됐습니다. 또 교회 자체도 무엇이 병폐인가를 모르는 바 아닙니다. 그러나 바로 그런 '병폐'를 제시하면 기존교회는 무너져요. 그래서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민중신학의 시각이 새롭게 세부적인 개혁을 운위할 필요는 없어요. 단지 재강조할 것은 기성교회가 민중이 발붙일 수 있는 현장인가 하는 물음을 시금석으로 하면 대답은 자명하리라고 생각합니다. 가난한 자, 실권을 박탈당한 자, 여러 측면에서 수난당하는 자와 자신을 일치시킬 수 없는 교회라면, 그것은 사회적 조건이 비슷한 계층의 취미집단 이상이 아니라는 것을 언명하고 싶을 따름입니다.
또 하나 강조하고 싶은 것은 기존교회는 하느님도, 예수도 독점했다는 허구적인 생각을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 하느님이 제도교회의 도구가 돼야 해요? 하느님은 자유 합니다. 어떤 형태로 어디에서 그의 일을 성취하는지는 하느님 자신만의 일입니다. 그러므로 기존교회는 바로 하느님의 선교(missio Dei)가 역사의 이 구석 저 구석에서 일어난다는 확신에서 하느님 나라 도래의 전위대(아방가르드)임을 의식하고, 그같은 의식을 행동으로 실현하는 것이 최선의 길이라고 봅니다.
끝으로 또 하나 강조하고 싶은 것은 교회내의 계층성 제거입니다. 지금까지 사제 중심, 목사 중심 체제가 '기능'으로서의 구별을 넘어서 권위화됐는데 그것은 날이 갈수록 심화됩니다. 교회가 하느님의 백성의 집단이라면 평등공동체여야 합니다. 목사는 사제의 후예가 아닙니다. 그는 기능상 가르치는 자일 뿐입니다. 가령 새크러먼트를 시행하는 권한을 목사의 특권으로 삼는 것은 성서적으로 아무 근거가 없습니다. 교회의 가장 중요한 성격이 '나눔'인데, 그 나누는 일이 왜 목사의 특권이어야 합니까!
나는 평신도들이 이끄는 밑바닥 공동체가 많이 생겨나기를 바랍니다. 평신도들이 직장을 갖고 공동체를 형성해서, 가르칠 능력이 있는 이들이 생활에서 성서 그리고 현실을 증거하는 것이 설교가 됐으면 합니다. 어떤 교단이든 이 길을 터놓고 그런 공동체를 수용하는 제도적 장치를 한다면 그로부터 기존교회의 개혁에 큰 활기를 얻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 이상의 구체적 제안은 할 것이 없고 또 해서도 안 될 것입니다. 그것은 교회를 이끄는 실세가 결정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