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 사회에서와 마찬가지로 교회에서도 창녀, 도둑 그리고 살인자가 될 수밖에 없었던 과정은 묻지 않고 그렇게 된 결과만 가지고 정죄합니다. 이 점에서는 일반 사회와 교회가 똑같습니다. 아니, 오히려 교회에서 죄를 규정하는 데는 더 고약한 점이 있어요. 그래도 일반 사회에서는 범죄 결과에 이르기까지의 심리적 과정이나 정황을 고려함으로써 죄를 상대화시킬 가능성이 있는 데 반해, 교회는 십계명이나 어떤 교리를 교조적으로 연결시킴으로써 오히려 용서의 가능성을 배제해 버립니다.
일반적인 죄의 규정에다가 하느님의 뜻을 어겼다는 종교적인 죄의 규정까지 덧붙이면 죄에 대한 다른 이해의 가능성이 없어져버립니다. 오늘날 교회는 죄를 풀어줄 수 없을 뿐 아니라 풀어줄 수 없도록 하고 있어요.
교회가 그렇게 하는 이유는, 구원의 길이 다른 데는 없고 교회에만 있다고 하는 그리스도교의 속죄론을 절대화시키기 위해서입니다. 이런 교리가 결국 마태오복음의 문구―어느 시기에 누가 삽입했는지 알 수 없으나―에서 알 수 있듯이 "교회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고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인다"는 논리로까지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교회가 사면권을 가졌다는 주장이 쉽게 나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중세기의 면죄부판매는 이러한 사면권 주장의 자연스런 귀결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의 교회도 바로 이런 논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교회가 사람들을 죄인이라고 규정할 때 중요한 것으로- 내세우는 구체적인 근거는 무엇인가 생각해봅시다. 다시 말해 교회가 '너희들은 죄인이다'라고 할 때 누구나 승복할 수밖에 없는 요소가 무엇인가하는 문제입니다.
첫째, 성욕을 들 수 있을 겁니다. 바울로도 탐심(epithumia)을 음욕이라는 말로 쓰고 있습니다(가령 로마 7, 7~8; 갈라 5, 24). '육적'이라고 말할 때도 성적인 데 기준을 두고 있는 경향이 있습니다(요한 1, 13). 이런 경향이 서구 교회사에 그대로 이어져서 어거스틴도 성적 욕망(concupiscentia)을 원죄와 연결시켰습니다. 소종파들 가운데서는 성관계 자체를 죄악으로 여겨 끝까지 거부한 경우도 많았습니다. 성욕이란 것은 일종의 본능인데, 이 본능을 죄악이라 하며 엄하게 금하니까 사람들이 역(逆)으로 노예가 되어 노이로제에 걸리게 된다는 프로이트의 지적은 매우 정곡을 찌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둘째, 루터 이후 신교에서 강조하는 것인데 '믿지 않는 것'이 죄라는 것입니다. 이 경우에 하느님이나 예수를 믿지 않는 것이 죄라기 보다는 하느님이나 그리스도에 관해 교회가 정해놓은 교리를 그대로 믿지 않으면 죄라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교회 중심적인 것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죄라는 얘기입니다. 이것은 믿음을 통해 진정으로 죄에서 해방되도록 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믿음이라는 것을 구실로 사람들을 교회에 예속시키고자 하는 데 목적이 있다고밖에 볼 수 없어요.
왜 교회 안에서는 죄에 대한 논의가 일보의 진전도 없겠습니까? 교회가 결과로서의 죄에 앞서 인간의 심리적 요인이라든지 사회적 조건(구조악)에 대해 전혀 눈을 돌리지 않았기 때문일까요? 돌릴 수 없어서이겠습니까? 아니면 돌리면 안 되어서였을까요? 나는 후자라고 생각합니다. 교회 중심에서 벗어나서 죄를 이해할 때는 죄라는 것이 상대화됩니다. 죄가 상대화되면 교회의 주장도 약화되고 교회의 권위도 약화됩니다. 이것을 우려한 나머지 교권주의는 의도적으로 그리스도교로 하여금 인간을 다른 측면에서 새롭게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여지를 가질 수 없게 막아버렸습니다. 그리고 의도적으로만이 아니라 교회는 구조적으로 새로운 이해를 할 수 없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바로 여기에 마르크스나 프로이트 같은 사람들이 반(反)그리스도교적인 명제를 내세우고 저항할 수밖에 없었던 요인이 있었던 것입니다. 사실 이들이 그리스도교를 거부한 것은 타당하며, 그에 대한 책임은 전적으로 교회에 있었던 것이지요. 이제는 그리스도교가 능동적으로 죄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과감히 시도하지 않으면 안 될 단계에 이르렀습니다.
▶ 지금까지 서론적인 말씀을 해주셨는데 다음에는 성서 중 먼저 구약에 나타난 죄의 이해에 대해 말씀해 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