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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병무전집2 |
민중신학을 말한다
(한길사)
 
하느님 나라―민중의 나라
하느님 나라―민중의 나라

▶ 오늘 얘기해주실 주제는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언젠가 선생님께서, 하느님의 나라는 역사 속에서 눌리고 빼앗기고 서러움당하는 사람들의 삶 속에서 형성된 개념이 아니겠느냐는 말씀을 하셨던 것을 기억합니다. 하느님 나라에 대한 관념은 고대 팔레스틴에서만 나타난 것이 아니고, 세계 여러 민족에게 두루 나타난 보편사적 현상이라고 볼 수 있겠지요. 그러면 하느님 나라라는 개념이 어떠한 사회적 문맥에서 발생한 것인가 하는 데 대해서 선생님께서 평소에 생각해오신 것을 얘기하는 것으로 오늘의 주제를 풀어나가지요.

하느님 나라는 공관서 연구에서나 서구 신학의 체계에서는 큰 주제 가운데 하나인데, 그들이 늘 앵무새같이 반복해 온 말이, "하느님 나라는 알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사람의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다"라고 했지요. 나도 거기에 한마디 거들어서 "알 수 있고 현재적 언어로 표현할 수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이미 낡은 것이고 새 세계로서의 하느님 나라가 아니다"라고 했던 적이 있었지요. 그건 역시 내가 서구 신학에 오염되었다는 증거였지요.

또 하나, 서구 신학에서는 묵시문학과 하느님 나라 표상을 동일선 상에 놓고 해석했지요. 그런 방식이 옳으냐, 그렇지 않느냐는 차치하고라도, 서구 신학은 현실적으로 묵시문학을 상대화해버리기 때문에 하느님 나라마저 덩달아 상대화해버리는 결과에 떨어졌습니다.

예를 들어, 종말학파에 참여한 알베르트 슈바이처는 예수를 묵시 문학적으로 파악한 나머지, "예수는 실패했다. 예수는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믿었지만 그 나라는 오지 않았다"고 말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그는 예수의 하느님 나라 혹은 종말론에 대한 입장을 상대화하고 말았던 거지요.

그리고 성서에는 하느님 나라에 대한 예수의 여러 비유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하느님 나라가 과연 무엇이냐?' 하는 데 대해서는 서구 신학은 거의 완전에 가깝도록 설명을 안 해왔어요. 누룩의 비유라든지 겨자씨를 심는 비유 등을 통해서 예수는 하느님 나라를 말했는데, 이런 비유에 대해서 서구 신학자들은 "이 비유들은 하느님 나라 자체에 대한 이야기라기보다는 그런 얘기를 통해서 실존(實存)이 계시된 것이다." 이렇게 주장해요. 그러나 예수는 위의 비유를 통해서 누룩이나 겨자씨 속에 하느님 나라가 보이지 않게 숨은 가운데서 발전해간다는 것을 말했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하느님 나라가 이 땅에서 누록과 같이 또는 작은 겨자씨가 자라듯 퍼지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현실적으로 무엇과 동일시하는가는 문제이겠지만, 어쨌든 하느님 나라를 향해서 역사는 가고 있다는 이 신념만은 우리들이 확실히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의 하느님 나라 비유에서 가장 실감나는 비유는 잔치의 비유입니다. 그 잔치의 초대에 기득권자들은 응하지 않았어요. 결국 일거리를 찾아 거리에서 서성거리는 가난한 사람들을 불러들여 그들의 잔치, 곧 그들의 세상이 된 것이거든요. 기득권자들이 참여하지 못하는 그런 현실이 된 것이지요. 부자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말, 가난하고 슬퍼하는 사람들은 복이 있다는 말은 '열린 새 역사는 너희들의 것이다, 하느님 나라는 너희들 것이다'라는 말이지요. 예수의 이런 말씀 자체가 우리들에게는 도움이 됩니다. 우리들의 안정된 삶을 파괴하는 이 말씀이 말이에요.

▶ 서구 신학에서는 하느님 나라를 신학의 중심 테마로 삼지 않았지요.신학사를 보면 인간의 영역과 하느님의 영역을 딱 갈라놓고 인간은 하느님의 영역에 참여할 수 없다고 했어요. 그러면 선생님, 이 경우 하느님의 나라는 인간의 영역에 속한다기보다는 하느님의 절대 주권 영역에 속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래서 인간의 참여를 제한했다고 볼 수 있겠는지요?

그렇지요. 서구 신학에서의 하느님 나라론은 그것을 제거하기 위한 노력입니다. 역사적 예수가 겁이 나듯이 그들에게는 하느님 나라도 겁이 나는 주제지요. 하느님 나라는 자기네의 안락한 삶을 여지 없이 비판하고 깨뜨리는 거니까요. 금을 쭉 그어놓고 '여기까지는 하느님의 절대주권이 지배하는 영역이다. 그러니 그 영역에는 관여하지 말자.' 이래 놓아야 안심할 수 있거든요.

▶ 예수가 하느님 나라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언급했더라면 이런 문제는 생기지 않았을 텐데, 왜 예수는 구체적으로 말씀하지 않았을까요?

예수가 하느님 나라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은 건, 그것이 당시의 사람들에겐 너무나도 자명한 일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마치 우리가 일제시대에 '독립'을 말하면, '그게 뭐요?' 하고 물을 필요가 전혀 없었듯이! 하느님 나라라는 말이 우리에게는 생소해도 예수 당시의 팔레스틴 민중에게는 생소하지 않았어요. 우리에게 생소하다는 것도 언어상 그렇다는 것이지, 말만 바꾸면 그 내용이야 새로울 게 없지요. 민중들에게는 자명한 것인데, 오히려 지식인이면 지식인일수록, 이 땅에 안주할 자리가 분명하면 분명할수록 그 의미가 점점 희미해지고 거부반응을 일으키게 하는 것이 바로 하느님 나라지요.

더구나 중요한 것은 하느님 나라에 관한 제1성(第一聲)을 세례자 요한이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직후 갈릴래아에서했다는 데 있습니다. 서구 신학자들은 이 마르코복음 1장 14절을 마르코의 편집구라고 가볍게 처리하지만, 예수의 그 선언이야말로 그때의 정치적 상황을 가장 적절하게 설명한, 아주 핵심을 꿰뚫은 지적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당시 갈릴래아는 사제와 종교귀족들의 중심지였던 예루살렘과는 상반된 삶의 질서와 이해관계를 가진 지역으로서, 하느님 나라 대망의 열기로 뒤끓고 있는 분위기였습니다.

젤롯당, 에쎄네파, 세례자 요한파 등을 소위 '탈예루살렘파'라고 하는데 그들은 하나같이 하느님 나라 열기로 꽉 찬 집단들이었습니다. 예수의 무리도 물론 탈예루살렘파에 속했습니다. 갈릴래아는 이른바 땅의 백성 '암 하 아레츠'와 그들에 의해 결성된 게릴라부대의 중심지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젤롯당의 중심지였어요. 한국의 임꺽정이나 장길산 일파와 비슷한 무리들이 여기저기에 근거지를 틀고 있는 곳이었습니다. 그들 가운데는 비적들, 도적들도 있었고 거덜난 사람들이 오갈 데가 없으니까 산으로 기어들어간 경우도 많았겠지요. 그러나 당시는 진짜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기다리는, 그것을 위해서 로마제국과의 투쟁에 자기 일신을 내던지려고 하는 사람들이 우글거리는 상태였단 말입니다. 당시 시리아 주둔 총독이 직접 지휘하여 군대를 끌고 와서 갈릴래아 지역 소탕작전을 폈지만, 어떤 동굴은 그 속에게릴라부대가 있는 줄 뻔히 알면서도 끝내 토벌을 못했어요. 저항이 그만큼 격렬했고 아마 지형적으로 어려웠던 모양입니다.

다음으로, 이제까지 신학은 하느님 나라가 현재적인 것이냐, 미래적인 것이냐하는 논란으로 전력을 다 소모했어요. 그런 논의는 관조 자의 입장에 있는 사람에게는가능한 것이지요. 지금 당장 죽느냐, 사느냐 하는 마당에 있는 사람에게 그것이 현재적이냐, 미래적이냐를 생각할 여지가 어디 있겠습니까? 비슷한 예로, 폭력이냐 비폭력 이냐하는 것도 아직은 현실과 거리를 두고 관망하는 사람들의 논란이지 당장 목에 칼이 들어오는데, 그때 폭력아냐 비폭력이냐, 선이냐 악이냐를 논할 겨를이 있을 리 없지요. 하느님 나라가 미래적아냐 현재적이냐하는 것은 그것을 하나의 객체로 놓고 관조할 수 있을 정도로 여유 있는 사람들의 얘기고, 갈릴래아의 민중들에게는 그런 걷 생각할 여지가 없었다고 봐야죠. 그만큼 절박한 현실이었습니다. 그들에게는 당장 몸으로 싸우고 행동하는 것이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위한 일 그 자체였어요. 그들은 하느님 나라와, 그 나라를 위해 싸우는 자기 자신을 별개로 생각하지 않았어요.


| 안병무전집2 |
민중신학을 말한다
(한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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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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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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