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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병무전집2 |
민중신학을 말한다
(한길사)
예수는 하느님 나라를 규정할 필요가 없었다

예수가 "때가 찼다"고 말한 것은 어떤 막연한 의미의 때를 말한 것이 아니고 사회변혁의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궐기할 때가 왔다는 말과 상통히는 것이라고 봐요. 당시 예수 집단을 포함해서 이른바 탈예루살렘파들은 하나같이 예루살렘 성전체제를 공격했습니다. 그 점에서는 그들은 예수와 똑같은 노선이었다고 할 수 있어요. 예수는 젤롯당과 세례자 요한파에 대해서는 물론이고, 에쎄네파에 대해서조차도 비판하지 않았습니다. 거기에는 어떤 이유가 있었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이를테면 그들의 비밀을 보호해주기 위해서였거나 혹은 너무 자명한 일체감을 느껴서였을 것입니다. 하여간 예수의 말 속에 그들에 대한 비판은 하나도 나오지 않습니다. 크게 보면 다 메시아운동하는 하느님 나라 운동의 대열이었으니까요.

그런데 독특하게도 예수는 하느님 나라 운동을 일으키는 데 있어서 기존의 여러 운동 속에 합류해버리지 않고 새로운 조직을 만들었습니다. '제자로 삼았다' 하는 것은 곧 '동지를 규합했다'는 말과 같아요. 우리가 조금만 상상력을 발휘해보면 예수가 갈릴래아의 젊은이들을 만나고 그들을 동지로 규합해가는 과정이 눈앞에 선히 보이지 않습니까? 어떻게 만나자마자 '날 따라오라' 하면 따라가고 그랬겠습니까? 그런 일이 사전접촉 없이 어떻게 가능했겠습니까? 베드로, 요한과 같은 젊은이들과 접촉하는 장면을 요한복음은 참 잘 그리고 있어요. 서로 내적으로 연계가 있었던 그룹으로 묘사하고 있지 않아요? 그 나라를 이루기 위해 비밀리에 모이면서 서로 애쓰는 그런 젊은이들이었던 거지요. 필립보라는 젊은이도 나오고, 나타나엘이라는 사람도 나오는데 그런 것이 반드시 비역사적인 기록만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자꾸 들어요. 여기저기 뜻있는 사람들이 모여 시국을 걱정하고 하느님 나라 일을 고민하고 있었는데, 예수는 그들을 만나서 "드디어 때가 왔다. 모이라!"고 말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젤롯당원도 들어오고, 세례자 요한파도 들어오고…….

이렇게 운동적인 차원에서 볼 때 눈에 띄는 점은, 예수가 하느님 나라에 대해 비유를 많이 말하면서도 정작 하느님 나라 그 자체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말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이걸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예수는 하느님 나라에 대해서 새삼스럽게 정의할 필요가 없었다. 당시에 이미 하느님 나라 운동을 하고 있던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던 바로 그것을 예수는 그대로 수용한 것이다, 이렇게 난 생각해요. 또 예수에게는 그 짧은 갈릴래아 생활 속에서 하는 행위 하나하나가 하느님 나라 운동과 분리되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하느님 나라 운동이 따로 있고 하느님 나라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예수의 행태 그 전체가 곧 하느님 나라의 현실이 아니었겠나, 그렇게 봐요. 그 점에서 난 도드(C. H. Dodd) 같은 서구 신학자가 하느님 나라는 예수의 삶 그 자체, 그리고 예수의 공동체 그 자체 속에 이미 왔다고 한 것, 그래서 '실현된 종말론'을 주장한 건 옳다고 봐요.

그런데 예수의 말씀 중에서 하느님 나라의 모습이 가장 잘 드러난 것은 역시 주기도문인 것 같습니다. 잘 보면 주기도문은 하느님 나라에 대한 증언입니다. 또 하느님 나라 신앙을 고백한 신앙고백문이기도하고요. 처음은 "당신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옵소서"인데, 이것은 하느님의 주권확립을 고백하는 겁니다. 당신 주권만이 고유합니다. 이런 고백이지요. 이것을 "당신만이"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주권만이 우리가 인정할 수 있는 유일하게 참된 주권이기 때문에 그 다음에 "당신의 나라가 임하옵소서"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여기서 "임하옵소서"라고 했으니까 '미래'에 실현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건 옳지 않습니다. "하옵소서"라는 것이 곧 그 나라를 실현하는 현재의 운동이지요.

이렇게 "나라가 임하옵소서" 하면서 맨 처음에 등장하는 것이 일용할 양식을 달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일용할 양식은 물(物)의 세계를 말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물에 대한 욕심을 부리는 것이 아니고 오늘 하루 먹을 만큼만 달라는 것입니다. 누구에게나 일용할 만큼씩만 주어진다는 것은 곧 골고루 나누어진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겠어요? 하느님 나라는 바로 그러한 나눔의 질서란 말이지요. 예수에게는 먹는 게 그렇게도 중요합니다! 예수가 민중들과 한 구체적 행위는 더불어 먹는 것입니다. '먹는다'는 것, 이것은 예수의 사상과 입장을 아주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말입니다. 5천 명을 먹이고 4천 명을 먹이고 하는 것이 과장이 됐거나 어쨌거나 간에 예수집단의 하느님 나라 운동에서 그것을 빼고는 다른 것을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중요했습니다. 그러므로 그 전승을 소중히 여겨 복음서에 기록했던 것입니다. 예수 자신이 제자들과의 마지막 자리를 먹는 자리로 마련했고, 그 자리에서 "하느님 나라에서 새 것을 먹을 때까지……"라고 하며 하느님 나라에서도 먹을 것을 생각하고 있었을 정도예요. 만일 가짜가 아닌 진짜(real) 하느님 나라라고 하면, 나누어 먹는 것 빼고는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하느님 나라 운동에 임하는 예수의 일관된 자세는 '더불어 먹는 것!'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가난한 자들에겐 먹는 것 이상 즐거운 게 없어요. '더불어 먹는다'는 건 삶의 즐거움을 최대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렇기에 여기서 무엇보다도 기본적이고도 중요한 것은 일용할 양식입니다. 일용할 양식!

예수가 병을 고쳐준 것도 '육(肉, 살크스)을 고쳐주었다'고 바꿔 놓으면 이해가 달라져요. '살크스'를 해방시킨다, 즉 물(物)에 대한 관심입니다. 이렇게 이해를 하면 아주 현실적이 돼요.

주의 기도는 이렇게 물의 문제를 말하고 난 다음에 인간의 사회적 관계를 얘기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죄를 사해달라는 말이 그것입니다. '죄를 사한다'고 했을 때 그 죄(opheilemata)란 '빛'입니다. 그것이 종교화되어 죄(hamartolos)로 이해됐습니다. 그렇다면 하느님 나라의 도래는 물질적 속박에서의 해방과 깊은 관계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주기도문은 하느님 나라 건설을 위해 행진하는 자들의 고백을 담은 노래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 민중의 노래를 부르면서 예수의 무리는 예루살렘을 향해 행진을 했던 거지요. "마치 하느님 나라 전선의 사령관이나 된 듯이 활동했습니다"(보른캄). 그런데 서구의 성서학자들은 예수가 의도적으로 예루살렘에 울라갔다는 것에 회의를 나타냅니다. 그러나 그것은 성서의 문자에만 매인 탓입니다. 우리는 그때의 운동분위기에 주목해야 합니다. 탈예루살렘파로 분류되는 무리들이 한결같이 예루살렘을 숙청해야 한다고 별렀던 점을 고려하면, 예수가 예루살렘을 주 공격목표로 삼았다는 것은 자명해져요. 예루살렘 성전을 공격하면서 죽음을 각오하지 않을 수는 없었던 것이고, 그렇게 중요한 일을 생각하면서 사전에 아무런 계획도 없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예루살렘 성전 숙청이라는 것은 개인적 거사가 아니었어요. 당시에 젤롯당은 로마를 일차적인 공격대상으로 삼았지만 예루살렘 세력 과도 싸웠으며, 그 밖의 모든 집단들도 예루살렘 성전 숙청을 중요시했습니다. 그것은 당시 팔레스틴에 있어서 예루살렘 성전은 그야말로 로마와 헤로데의 착취가 관철되는 중심고지였기 때문입니다. 즉, 정치적 억압과 경제적 수탈, 그리고 지배 이데올로기가 성전을 매개로 해서 관철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루살렘 성전 공격은 주기도문에 나타나 있는 예수의 하느님 나라 인식과 그 나라의 실현을 위한 계획이 구체화된 행동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목숨을 건 그러한 행동의 배후에는 팔레스틴 사회에 대한 예수 자신의 총체적 이해가 전제되어 있었다고 보지 않을 수 없어요. 그 사회를 이해하지 못하고서는 타당한 도덕적 판단을 내릴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요즘식으로 말한다면 예수는 그 시대, 그 사회의 불의와 억압과 수탈의 모순구조를 바로 인식하고 있었고, 그러한 구조를 변혁하기 위한 구체적인 실천으로 나아갔던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시기 즉 '타이밍'의 선택도 기막히지요. 유월절, 곧 유다의 민족 해방절에 산지사방에서 유다 민중들이 예루살렘 성전에 운집한 바로 그때를 포착했으니 말입니다.


| 안병무전집2 |
민중신학을 말한다
(한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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