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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병무전집2 |
민중신학을 말한다
(한길사)
마르코복음서의 제자 비판

그리스도교는 이제까지 소위 신학의 이름으로 비역사화, 추상화를 계속했고 그것을 발전시켜왔습니다. 신학에서는 운동(movement) 보다는 존재론(ontology)을 중시했습니다. 사건은 철학화되고, 그 결과로서 역사상의 예수는 점차 사라져버리고, 단지 커다랗게 된 것은 지상의 교회였습니다. 예수는 영원히 없어져버리고, 그 대리자로서 지상으로부터 천상까지를 지배하는 로마교회는 자신의 발을 내밀어 사람들에게 '키스'를 하게 했습니다. 이런 바보 같은 행위를 도스토예프스키는 아이러니컬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대심문관'의 에피소드가 그것입니다.

세상의 대심문관은 지금도 만일 예수가 나타난다면, 교회의 이름으로 용서 없이 추방할 것이라고 합니다. 실제로 예수는 제도적인 교회로부터 추방당하고 있습니다. 니체는 "참된 그리스도인은 역사상 한 사람밖에 없었다, 그는 예수 자신이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것은 진실입니다.

나는 케리그마 신학에 대하여 커다란 불만을 품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들의 현장을 볼 때, 이것을 케리그마적으로 본다고 할 것 같으면 온통 추상화되어버리기 때문입니다. 국내에서는 일어나는 이런저런 사건들이 어떤 방식으로 전달되는가 하면, 이것은 좀 이상 한 비유가 될지 모르겠습니다만, 케리그마적으로 전달되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게 됩니다. 논리적으로, 체계적으로, 분석적으로 전달되는 것입니다. 이래서는 사건이 있는 그대로 생생하게 전달될 수 없는 것이지요. 제가 지금 삿포로에 온 것도 글로 쓴 것을 읽고 논리적 설명을 전개하려는 생각으로 온 것이 아닙니다.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고 이야기를 나누어 무엇인가를 전승하고 싶다는 기분으로 온 것입니다. 무언가 전하고 싶은 간절한 생각으로 온 것입니다. 그러나 케리그마가 승리함으로써 단 한 사람의 역사적 예수가 패배하고, 교권(敎權)이 신학의 중심 기둥으로 되어버리는 현상이 일어난 것입니다. 나도 소위 신학자의 한 사람입니다만, 그러한 죄를 지금까지 범해왔습니다.

그런데 신약시대에도 비역사화, 추상화에 대하여 불만을 품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아시는 바와 같이, 최초에 성립된 복음서는 마르코복음서입니다. 빠르면 A.D. 64년경으로 볼 수 있는데, 역시 유다전쟁 후로부터 A.D. 70년에 있었던 예루살렘 함락까지의 사이, 또는 그보다 약간 후였겠지요. 나는 A.D. 70년 이후라고 하는 가설을 세우고 있습니다.

마르코복음서가 전승하는 예수의 행태는 케리그마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한때는 바울로서신과 케리그마는 역사적 예수를 전제로 하여 만들어진 것이라고 하는 말을 하기도 했습니다만, 그것은 거짓말입니다. 복음서가 전승된 것은 케리그마를 정리했던 자들과는 명백히 구별되는 다른 전승모체가 있어서 그들이 예수사건의 내용을 전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케리그마를 성립시킨 층과 예수사건을 전한 층이 분명히 서로 다른 전제 위에 서서 그 각각을 전승했고 그것이 마르코복음서에 반영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저는 차츰 가지게 되었습니다. 어젯밤에 저는 마르코복음서를 끝까지 다시 읽어보았습니다. 성서학자로서가 아니라 일반 신자로서 읽어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결과는 누구의 눈에도 명백한 것이었습니다.

마르코복음서는 예수사건을 그의 공생애(公生淮)에서 시작합니다. 탄생이야기는 취급하지 않습니다. 공생애의 출발과 동시에 예수의 주변에는, 그 이름은 분명히 밝혀져 있지 않지만 많은 사람들이 모여듭니다. 1장 35절 이하에는 이미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습니다. 시몬(베드로, 즉 게파)과 그의 동료들이 예수에게 달려와서 "선생님, 사람들이 선생님을 찾고 있습니다. 어서 가시지요" 하고 말합니다. 이에 대해서 예수는 "나는 여기에서만 일하러 온 것이 아니다. 가까운 여러 마을을 찾아가자. 거기서도 말씀을 전해야 하겠다" 하고 말합니다. 여기서 이미 예수는 시몬과 그 무리들의 무지를 폭로한 것입니다.

3장 13절에서는 제자를 부르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러나 잘 아시듯이 12명의 제자의 이름아 확실하지 않습니다. 루가와 마태오에 있는 제자들의 이름은 마르코와는 다릅니다. 본래 열두 명이었는가 하는 것도 알 수 없습니다. 그리고 몇 번 거듭 등장하는 제자는 베드로와 요한과 야곱, 이 세 사람뿐입니다. 그 밖에 한 사람은 예수를 판 자, 또 한 사람은 예수가 정말로 부활했는가 만져보지 않으면 알 수 없다고 한 자 등 연극으로 친다면 엑스트라 역할 이상을 한 자가 아닙니다. 있으나마나 한 존재일 뿐 그들이 갖는 중요한 의미는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불트만은 12라고 하는 숫자는 상징이지 역사적 숫자는 아니라고 말하고 있고, 그의 제자인 보른캄은 실제 12명이었다고 주장합니다만, 결정적인 것은 아무도 말할 수 없습니다. 이렇든저렇든 좋습니다만, 중요한 것은 12명을 선정했다고 하지만 그 이름마저 확실하지 않다고 하는 것은 바로 12제자를 그다지 중요하게 취급하지 않았던 역사가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4장 11절에 보면 예수가 제자들을 향하여, "너희들에게는 하느님 나라의 비밀을 일러주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단지 비유로만 말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이상한 일입니다. 설명이 되지 않습니다. 제자들에게는 하느님 나라를 설명해줌에도 불구하고, 제자들보다 이해력이 뒤지는 다른 사람들에게는 단지 비유로만 말한다고 하니까요. 이것만 봐서는 제자들 쪽이 더 잘 아는 것이 됩니다. 그러나 조금 후에, "너희들은 지금 내가 말한 비유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느냐? 이 비유도 알지 못하니 어찌하면 좋으냐?"라는 강한 비판이 나오고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의 비밀을 직접 말하면 소화하기 어렵기 때문에 비유로 말하는 것인데, 이것조차 이해 못하는 것이 제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이래서야 제자라고 할 수 있겠는가 하는 비판이 감춰져 있는 것입니다.

4장 35절에는 제자들에 대한 비판이 등장합니다. 예수가 제자들을 칭찬한 장면이 있다면 말씀드리겠는데, 놀랍게도 전부 비판한 것밖에는 없습니다. 35절 이하에서는, 예수는 제자들에게 갈릴래아 호수 저편 언덕으로 가라고 명령합니다. 예수도 배에 올랐는데 거기서 잠이 들었습니다. 그때 파도가 일고 제자들이 놀라 어쩔 줄을 모를 때 예수가 꾸짖는 장면이 나옵니다. 5장에 보면 회당장(會堂長)의 아이가 죽었는데, 예수는 이름이 밝혀져 있는 세 명의 제자를 데리고 거기로 갑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습니다. 예수는 또한 제자들을 데리고 고향으로 갑니다. 거기에서도 제자들의 역할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6장 7절 이하에는 유명한 제자파송의 장면이 있습니다. 제자들을 파송할 때, 너희들은 준비를 해야만한다든가, 아무것도 지니지 말고 가서 무엇을 말해야 할 것인가하는 것을 예수는 구체적으로 일러주고 있습니다. 여기서 처음으로 제자들의 본래적 사명이 무엇인지가 구체적으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이것은 이렇게 구체적으로 기록돼 있는 것일까? 이것은 아마도 예수가 제자들을 파송하면서 명령한 사실과 지금 살아 있는 제자들의 모습아 너무나도 대조적이었다는 것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나는 민중신학을 하고 있습니다만, 여러분이 나의 생활을 조사해 내지나 않을까 두렵습니다. '민중, 민중' 하고 떠들지만, 당신은 어떻게 살고 있는가? 이것을 여러분들이 알아버릴까봐 무서운 것입니다. 그것은 결과적으로 나 자신을 발가벗겨 여러분의 비판대 앞에 세우는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제자파송의 기사는, 목사들이 가장 싫어하는 대목입니다. 결혼해서 가정을 가지며, 하고 싶은 것이면 무엇이나할 수 있는 사람들이 "나는 그리스도의 제자다"라고 자신의 권위를 말하는 경우에, 옛날얘기라면 몰라도 GNP가 세계 2위인 일본에 살고 있는 자신에 대해서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 이것이 문제입니다. 마르코는 이것을 지적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평신도가 이 말을 논지로 하여 '예수는 이렇게 말했다'고 하는 경우에, 이 말은 결과적으로는 목사를 비판하는 것이 됩니다. 이 부분을 전승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권위와 카리스마를 주장하는 자들에 대하여 의식적으로 비판을 가하고, 그대들의 삶의 모습은 그대들의 주장과 다르지 않느냐고 말했던 것입니다. 성서의 그 대목은 그렇게밖에는 달리 이해되지 않습니다.

6장에는 유명한 5천 명의 급식기사가 있습니다. 거기에도 제자들의 무지가 표현되어 있습니다. 6장에는 또 예수가 물 위를 걸어간 기적이야기가 있습니다. 이것도 제자의 대표인 베드로의 불신앙이 표현된 것 이상의 의미는 없습니다. 8장에도 4천 명을 먹인 기사가 있습니다. 거기에도 또 한 번 제자들의 불신앙이 표현됩니다. 계속해서 8장 14절 이하, 특히 17~18절에는 급식기적 후에 제자들이 예수의 말을 오해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대단한 비판의 말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의 마음을 아시고 말씀하셨습니다. 왜 너희가 떡이 없다고 서로 수군거리느냐? 아직도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느냐? 아직도 마음이 둔하냐? 너희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마르 8, 17~18)

여기서는 할 수 있는 모든 말이 동원되고 있습니다. '너희는 귀도 없고, 눈도 없고, 생각하는 능력도 없는 철저한 바보들이다. 뭐 하나 제대로 아는 게 없구나.' 이렇게 꾸짖는 것입니다.

9장에는 산상에서의 변모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에는 어떤 의미에서 열두 제자가 특별취급을 받았다는 전제가 깔려 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전승을 편집할 때 비판의 내용이 강조되었던 것입니다. 예수가 세 사람의 제자를 데리고 산에 올랐는데, 거기서 변모의 사건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여기서도 현실을 파악하지 못한 베드로의 태도를 예수가 비판합니다. 그리고 산에서 내려 오자마자 또 제자들의 무지와 불신앙을 공격하는 것입니다. "이 신앙 없는 시대에 내가 언제까지 너희와 함께 있으랴. 언제까지 너희를 참아야 하겠느냐."

그런데 이들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8장 27절 이하의 내용입니다. 알베르트 슈바이처가 "마르코복음의 분수령"이라고 말한 대목입니다. 예수는 거듭해서 "너희들은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세상 사람들은 무어라고 하느냐?" 하고 묻습니다. 거기서 베드로는 "당신은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고백합니다. 여기에 대한 예수의 대답은, 그 내용을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종래에는 이 부분을 소위 '메시아의 비밀'이라고 하는 식으로 이해했습니다. 예수가 베드로에게 "자네가 말한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라. 나는 그리스도다. 하지만 이것을 말하지 마라"고 이해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이 점에서는 불트만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즉, 베드로가 고백한 내용을 발설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지금부터 내가 말하는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한 것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당신은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한 발언에 대하여, 예수는 "그렇다"라고도 "아니다"라고도 말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지금부터 내가 말하는 것을 너희들은 주의해 들어라. 그러나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아라. 나는 이제부터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사람들에게 죽임을 당할 것이다. 그리고 3일 만에 부활할 것이다." 이렇게 처음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에 베드로가 정면으로 반대하고 나서면서 "절대로 안 됩니다"라고 말합니다. 거기에서 예수의 유명한 질책이 나옵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인간의 일, 자기 자신의 일만을 생각했지 하느님의 일은 전혀 생각하지 않는구나"라고까지 베드로(제자)를 심하게 질책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후 두 번째 수난 예고가 있은 후에는 제자들이 "누가 더 훌륭한가" 하고 서로 다투는 장면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10장 13절 이하에는 사람들이 어린아이들을 예수에게로 데리고 와서 그들을 어루만져주기를 바라자 제자들이 그 아이들의 어머니들을 꾸짖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때 예수는 분노해서 말합니다. "이 어린아이처럼 되지 않으면 절대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이것은 단지 하느님 나라와 어린아이의 관계를 말한 것으로만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서는 구체적으로 지금 이미 권위주의에 빠져 있는 제자들에 대하여 너희들은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하고, 어린아이와는 반대의 인간이 되어버린 제자 둘의 존재를 문제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10장에 들어가면 널리 알려진 부자 청년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때에 예수가 저 유명한 말,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귀에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 즉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거의 불가능하다고 하는 말을 하는 장면에, 베드로가 제자들을 대표해서 "우리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르겠습니다" 하고 말하자, 이 말은 다른 문맥에서도 나옵니다만, "주의하라, 너희들은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는 것을 명심하라"고 합니다. 이 말은 '너희들은 선택받은 자로서 교회의 우두머리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너희들은 가장 뒤진 자가 될지도 모른다'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10장 32절 이하에서 예수는 예루살렘을 향해 갑니다. 이 예수의 모습은 너무나도 진지합니다. 나는 이것을 역사적으로 중요한 단편(斷片)이라고 봅니다만, 예수는 예루살렘으로 울라가는 데 너무나도 진지했기에 어느 누구도 그러한 예수에게 무어라고 말을 건네지 못하는 엄숙한 분위기였던 것입니다. 죽음을 향하여 예수는 지금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제자들은 서로 다투고 있습니다. "누가 위인가?" "예수가 영광의 자리에 앉게 되면 누가 오른쪽에, 누가 왼쪽에 앉을까?" 이런 따위를 다 두고 있는 장면을 폭로하고 있습니다. 계속해서 41절 이하에 "지금의 정권은 강제적으로 지배하는 독재정권이지만, 너희들은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위에 있고자 하는 자는 아래에 있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하는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그리고 11장에 예루살렘 입성의 장면이 나옵니다. 거기에는 게쎄마니 동산의 이야기가 있고, 유명한 최후의 만찬, 베드로의 예수 부인, 제자들 전부의 도망 등이 있습니다. 예수의 수난 현장에는 제자들은 단 한 사람도 남아 있지 않았던 것입니다. 수난의 현장을 목격하지 않은 자가 부활의 현장을 목격했을 턱이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부활의 예수를 본 제자는 없다고 하는 내용인 것입니다.


| 안병무전집2 |
민중신학을 말한다
(한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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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
나의 체험 민중의 신학
변명
   
‘민중’을 발견하기까지
    간도에서 보낸 어린 시절 一민족과 그리스도의 발견
    민중신학의 뿌리
    독일 신학과 ‘역사적 예수’
    민중현실에 바탕을 둔 신학
    ‘사건의 신학’과 신학을 위한 신학
    예수는 민중이고, 민중은 예수다
    ‘성문 밖’에 현존하는 예수
    민중의 염원과 민족통일의 길
    한국 그리스도인의 과제
민중의 책 성서
    한국 교회의 재래의 성서이해
    성서의 통일성 一그 민중신학적 의미
    예수一‘야훼만’을 지켜온 예언자 전통의 절정
    전통적 성서해석 방법의 이데올로기적 성격
    ‘컨텍스트’와 ‘텍스트’의 긴장
    민중신학의 컨텍스트는?
    성서는 우리에게 결단을 요구할 뿐
    민중신학이 본 성서의 맥
민중 예수
    극복되어야 할 서구 신학의 그리스도론
    고난의 종 그리스도
    구원은 민중을 통해서 온다
    예수는 오늘의 민중현장에 계신다
    제도적 교회는 민중현장에 계신 그리스도를 포기
    민중사건은 예수사건이다
    ‘구원’은 물질적 언어로 표현되어야
    성령의 역할은 인류해방에 있다
민중의 하느님
    신이 죽었다?
    서구 신학의 신관(神觀)
    동양인의 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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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중의 하느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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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의 공동체 一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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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활공동체에서 예배공동체로 전락
    교회의 본래 모습을 되찾아야
    민중신학이 꿈꾸는 교회상
    제도적 교회론을 넘어서자
    해방공동체 구현과 교회의 계층성 극복
    교회의 이상一하느님 백성의 평등공동체
죄와 체제
    죄의 뿌리
    기존의 죄이해는 교권을 강화시킨다
    유다교는 죄를 어떻게 보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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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한과 루가는?
    사탄은 구조악이다
    죄의 뿌리 一 공(公)의 사유화
민중해방과 성령사건
    이단으로 박해받은 성령운동
    이원론에 빠진 전통적인 성령 이해
    성서의 성령론의 성격
    성령은 민중사건이다
    한국 교회의 성령운동, 과연 성서적인가
하느님 나라一민중의 나라
    하느님 나라 一 민중의 갈망과 한
    예수는 하느님 나라를 규정할 필요가 없었다
    민중이 주인 되는 새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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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의 기도一하느님 나라 운동의 노래
    하느님 나라 신앙은 민중해방운동 속에 성육신해야
민중에 의한 전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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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르코복음서의 제자 비판
    ‘오클로스’와 ‘마제타이’
    교회의 제도화와 사제계급의 승리
    제도적 교권주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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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민중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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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의 말과 행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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