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서남동 선생의 강연집을 받아서 밤에 조금 읽어보았습니다. 거기에서 서남동 선생은 '한'(恨)이라는 말을 설명하면서 '한'의 반대 개념은 '죄'와 관계가 있다고 말하더군요. 서남동 선생은 죄라고 하는 것은 대개의 경우 강한자, 위에 있는 자, 또는 지배계급이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 내려먹이는 말인데 그것을 아래에 있는 자, 수세에 몰린 자, 눌려 짜부라진 자, 학대당하는 자의 입장에서 보면 '한'이라는 것으로 표현될 수 있다고 말했더군요. 어떻게 보면, '한'이라고 하는 것은 사회적 심리상태를 나타낸 것으로서 그것을 설명하기란 매우 어려운 것입니다. 한문으로 말하면, '한'은 마음이 닫혀진 상태를 말합니다. 마음속에 불만이 있고, 학대받고 상처 입은 울분 때문에 하고 싶은 말이 가슴에 곽 차 있으되 말할 수 없는 그런 상태인 것입니다. 이 상태가 지속되다 못해 발병하면 '울화병'이 됩니다. 이것은 특히 여성들에게 많은 병이지요. 남편이 난폭하여 아내를 학대하고 자기 권리만 주장하는 경우에 아내의 마음속에 한이 쌓여 결국 병이 됩니다. 발광하든가 아니면 내적인 병을 일으킵니다. 이것이 표면화한 것이 '화'(火)인데, 이것은 '한'과 관계가 있습니다. 이것은 독일어의 'Klage'(비탄의 호소)와는 의미가 다릅니다. Klage라는 것은 표현할 수 있는 것, 무언가 불만이 있는 것을 스스로 말로 표출하는 것입니다. 이와는 달리, 그것을 말할 수 없는 상태가 '한'인 것입니다.
'한'을 서양적인 개념으로 표현하자면 서양의 '비극'을 예로 들 수가 있겠지요. 키에르케고르는 비극을 두 가지로 분류하고 있는데, 그 하나는 '왜 비극이 일어나는가' 하는 이유를 알고 있으면서도 그 비극 앞에서 놀라는 가운데 멸망해가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그 이유를 전혀 알지 못하는 채로 내적으로 점점 더 비극적으로 되고 불안이 쌓이고 쌓여서 결국 죽어가는 것입니다. '한'은 바로 이 두 번째 경우에 속하는 것입니다. 명확히 표현할 수 없는, 그러면서도 억눌린 울분이 속에 가득 차 있는 상태입니다.
얘기가 좀 빗나갑니다만, 한국에서는 한에 얽힌 이야기가 많습니다. 밤이 이슥해지면 흰옷을 입은 유령이 머리를 풀고 피를 흘리면서 칼을 물고 나타납니다. 유령의 이야기는 대부분 여자에 관한 것입니다. 여자는 '한'에 사무쳐 억울하게 죽었기 때문에 죽은 뒤에 원귀가 되어 나타나서, 이 '한'을 풀어달라고 간청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과 샤머니즘의 무당과는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샤머니즘의 무당은 이 원귀를 '한'으로부터 해방시킵니다. 이런 의미에서 '무당'은 그리스도의 역할을 합니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사실입니다. 이제까지 교회는 이것을 무시해왔습니다만, 이제는 그래서는 안 됩니다. 예수는 이른바 '한의 사제(司祭)'로서의 그리스도가 아니었던가요! 한에 사무친 사람들을 해방시키는 역할을 무당이 해왔다면 이런 의미에서 예수도 무당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무당은 환상의 세계에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그것으로부터 해방됩니다. 죽은 자의 유령이 무당에게 잡아먹혀서 무당 속에 들어가, 살아 있을 때 말하지 못했던 것을 전부 토해내는 것입니다. 그 결과 병도 낫습니다. '한'을 푸는 것이 중요합니다. 한이 타오르는 불처럼 발병하는 경우에는 기존의 질서도 무엇도 안중에 없게 되고 전부를 파괴해버리게 됩니다. 그렇게 되기 전에 한으로부터 해방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민중신학에서 '한'이라는 것이 자주 등장하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성직자는 '한'의 사제가 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어떠한 의미에서건, 넉넉한 자도 가난한 자도 부지불식간에 '한'에 사무쳐 있습니다. 목회자들은 알고 계시겠지만, 아무리 겉으로 명랑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단둘이 마주앉아 진지하게 속사정을 이야기하게 되면 거의 예외 없이 웁니다. 그럴 정도로 슬픔에 가득 차 있는 것이 인간의 상황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커뮤니케이션은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소외된 민중과의 관계에서 예수가 행한 가장 중요한 일은 이 '한'으로부터의 해방이었습니다. 병으로 인해 자기의 생애가 한에 사무친 인간, 누구도 그를 돌아보지 않고 병 때문에 신자로서의 생활도 할 수 없는 인간, 문둥병 따위에 걸려 인간세상으로부터 추방된 경우 또는 병 때문이 아니라 직업과도 관계가 있겠지요. 어쨌든 소외된 인간은 소외되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는, 민중신학의 견해로서 받아들일 수 없는 세리도 그 당시의 사회로부터는 소외되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는 '한'에 사무친 세리조차 맞아들였다고 이해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