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 번째로 주목할 것은 예수의 말과 민중의 말에 관한 것입니다. 예수의 말은 농경사회의 언어였다고 말씀드렸습니다만, 그것은 곧 민중의 언어였습니다. 민중의 언어는 '이야기'입니다. 논리적인 전개가 아니라 사실을 단순하게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예수의 말하는 방식을 주목해보십시오. 특히 그의 비유를 보십시오. 그것은 그냥 이야기입니다. 누가 들어도 알 수 있는, 생활에서 나온, 전혀 어렵지 않은 말입니다. 생활에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말은 쉬워지고 이야기식으로 됩니다. 그러나 생활로부터 거리가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그리고 사색을 하면 할수록 소위 지식층의 논문형식이 됩니다.
일본의 교회는 잘 정리된 짜임새 있는 내용의 설교를 한다는 평판을 얻고 있습니다. 그런 설교를 들은 사람들은, '참 잘 정리해서 짜임새 있게 말하는구나', '머리가 좋구나', '정말 센스가 있어' 등등으로 생각하겠지만, 이것은 뭔가 잘못된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에 가는 것은 그런 것을 듣기 위해서가 아니니까요. 그런 것이라면 책에서도, 신문이나 잡지에서도 얼마든지 접할 수 있습니다. 또 그런 쪽이 목사의 설교를 듣는 것보다 나을 수가 있습니다.
한국에서도 마찬가지 경향이 있습니다. 특히 내가 속하고 있는 교단은 어떤 의미에서 신학적으로 개방적인 입장에 있기 때문에, 낡고 보수적인 것을 피하고 새로운 것을 소개한다는 뜻에서 교양 있는 말로 지적이고 논리적인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설교는 듣기는 좋을지 몰라도 듣고 나서 돌아서면 아무것도 남지 않습니다. 마음에 호소해오는 것이 없습니다. 머리로는 '그렇구나' 하고 수긍하지만 나 자신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고, 그저 그것으로 끝나버리는 설교는 딱 질색이에요. 예수의 삶에서 나온 이야기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여섯 번째로 생각할 것은 예수의 행태입니다.
행태는 일본어로 '후루마이'(振舞)입니다. '후루마이'라고 하면 경솔하게 들립니다만, 달리 적당한 번역어가 없군요. 예수는 절대로 당시의 민중의 수준보다 위로 울라가려고는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민중적인 것을 싫어하기는커녕, 민중과의 커뮤니케이션을 위해 필요한 것이라면 무엇이라도 했습니다.
예를 들어, 마르코와 마태오 또는 루가복음을 비교해보면 재미난 현상이 발견됩니다. 몇 군데나 나옵니다만, 예수가 병자를 고칠 적에, 다만 "(병이) 나으라!"는 말을 사용할 뿐만 아니라, 어떤 장님에게는 자산의 침을 발라주기도 하고, "무엇이 보이는가?" 하고 상대방의 응답을 구하기도 합니다. 혹은 진흙을 개서 발라주기도 합니다. 이런 기록들이 마르코에 나오는데 마태오와 루가복음에서는 전부 삭제되어버립니다. 지식인이 그런 것을 읽으면 너무나 원시적이라고 생각할 것이라는 염려 때문이었는지도 모릅니다만, 진짜 '오리지널'한 것은 마르코가 전한 그대로가 아닐까요? "병이 나으라!"고 말로 하기보다는 실제로 손으로 만져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당시 사람들의 생각에도 그랬을 것입니다.
손을 잡기도 하고 만져주기도 하는 것은 민중적인 '행태'입니다. 몸과 몸을 서로 맞대는 커뮤니케이션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예수는 기계적으로가 아니라 진정으로 당시의 사람들이 속으로 '이렇게 해 주었으면……' 하고 바라는 대로 해주었던 것입니다. 나는 그것이 가장 오리지널한 예수의 행태였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지식인이다', '나는 현대인이다'라고 하면서 민중과 거리를 두는 것이 아니라 민중의 수준에서, 민중이 사용하는 커뮤니케이션 방법을 가지고 민중과 사귀는 것이 중요합니다. 민중의 요구, 민중의 가능성, 민중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전달하는 것, 이것이 신학하는 사람의 임무입니다. 예수 자신은 그렇게 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예수는 민중을 대할 때 자신이 먼저 이니셔티브를 취하지 않고 수동적으로 움직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대는 무엇을 원하는가?"라고 먼저 묻고, 그 대답에 따라서 움직였던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들도 한 번쯤 생각해봐야 할점입니다.
일곱 번째로, 예수는 책을 읽었는지는 몰라도 공부 같은 것은 하지 않았습니다. 말하자면 무학(無學)이었던 셈이지요. 이것은 공관복음서에도 나오고 요한복음서에까지도 나와 있어요. 사람들이 예수를 라삐라고 불렀디는 기록은 나와 있지만, 라삐가 되는 훈련을 받았다는 말은 전혀 비치지도 않아요. 예수는 무학이었고 따라서 아무런 자격증도 없었습니다. 학사학위도 없었고, 목사시험도 치르지 않았습니다. 물론 박사학위 따위가 있을 리 만무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사람들이 "당신은 어디로부터 그런 권위를 얻었소? 당신은 라삐의 자격도 없지 않은가? 하늘로부터 그대가 특별한 인간이라는 증거로 무슨 기적이라도 일어난다면 그나마 별문제겠지만, 아무것도 아닌 주제에 이런 되지도 않은 말을 함부로하고 다니다니!"라고 하면서 무슨 권위를 보이라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보일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보일 것이 있다고 한다면, "기다려라. 죽어 보이겠다"라고 말한 그것뿐이었습니다. 그 밖에는 다른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죽는 것이 그가 가진 유일한 재산이었습니다. 돈도 없었고, 아내도 자식도 없었습니다. 그가 결혼을 했다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물론 결혼하지 않았다는 기록도 없습니다. 그래서 유행을 좋아하는 어느 미국 작가는 『예수는 결혼했는가?』라는 책을 써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는 얘기도 있습니다만.
제자들이 결혼했는지 안했는지 알 수 없는 일이지만, 베드로의 장모가 열병에 걸렸다고 한 것을 보면, 베드로가 결혼했다는 것은 사실인 듯합니다. 그 밖에는 제자들이 결혼했다는 말은 나와 있지 않습니다. 내가 상상하는 예수는 결혼할 수 없는, 그런 유(類)의 사람입니다. 그것은 예수가 남자가 아니었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그처럼 진지하게 사는 인간은 결혼을 해선 안 된다는 뜻에서하는 말입니다. 예를 들면, 나같이 평범한 인간도 그렇습니다. 나는 평범한 재능밖에 가지지 못했기 때문에 한꺼번에 두 가지 일은 할 수 없습니다. 젊은 시절에 나는 '예수'와 '결혼'이라는 두 가지 일을 놓고, 어차피 한 가지 일밖에 못한다면 결혼 쪽을 단념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두 가지를 할 수 있는 것은 능력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나는 한 가지밖에 못합니다. 그래서 나는 결혼을 단념하고 있었는데, 암에 걸린 어머니께서 수술을 받으신 후 눈을 뜨자마자 하시는 말씀이, "얘야, 죽기 전에 마지막 소원이 있다. 내가 눈을 감기 전에 제발 결혼해다오" 하시는 것입니다. 그때 내 나이 47세였습니다.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하고 대답하고는 그해 12월 29일에 결혼해서 아내를 어머님께 보여드렸지요. 불행히도 그런 연유로 해서 결혼했기 때문에 나는 지금 요 모양 요 꼴의 인간밖에 되지 못했습니다.
공관복음서의 입장에서 보면, 예수의 공생애는 1년 남짓밖에 되지 않습니다. 예수의 공생애가 3년이라는 것은 요한복음서에 의한 설입니다. 어느 쪽이 더 옳은가 하면, 나는 공관복음서 쪽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예수처럼 살면 지금도 1년 이상은 살지 못하기 때문이지요. 그토록 '라디칼'한 삶을 사는 예수가 가정을 가진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나는 예수는 결혼하지 않았다고 단정합니다.
예수는 집을 가졌을까요? 사람에 따라서는 예수는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가파르나움에 있는 '어떤 집'에서 지냈고 그곳을 중심으로 활약했으니까 그것이 예수의 집이 아니었을까하고 상상합니다만, 확실한 근거가 없습니다. 예수 자신은, "공중의 새도 집이 있고, 여우도 굴이 있지만 인자(人子)는 머리 둘 곳도 없다"고 말했지요. 이것은 정말로 예수의 전기적(傳記的) 고백입니다. 예수는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이리저리 방랑하는 빈털터리였던 것입니다.
예수는 노동자였습니다. 아마도 예수는 30세까지 노동했을 겁니다. 물론 30세까지라고 하는 것도 확실한 것은 아닙니다만, 루가복음에 "……30세가 되었을 무렵"이라는 기록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상상하고 있는데 불과합니다.
그후에 예수는 물론 '슈퍼맨'처럼 기적을 행했습니다. 예수에게는 그러한 면이 확실히 있었습니다. 그러나 마르코는 예수 자신의 능력에 한계가 있었다는 것을 주저하지 않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예수는 고향에서는 믿지 않으니까 기적을 행할 수 없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마태오복음에서는, "예수는 만능이다"라는 전제를 갖고 있기에 그가 할 수 있는가, 할 수 없는가를 말하지 않고 다만 "하지 않았다"고 수정하고 있습니다.
복음서에는 예수의 무능력한 면이 여러 가지로 나타나 있습니다. 그것을 철저하게 보여주는 것이 이른바 '수난사화'(受難史話)입니다. 수난사화에 나타난 예수는 철저히 무력하여 인간의 한계를 한걸음도 벗어나지 못합니다. 보통사람보다 나은 점이 하나도 없어요. 그는 그 시대의 일반 민중과 똑같은 모습이었고, 기적을 일으킨다거나 하늘의 도움을 불러내리는 따위의 능력은 전혀 없었습니다. 그저 무력하고 연약하여 모함을 받고 학대를 당하여도 그것을 물리칠 하등의 수단도 없는 사람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간추려서 말하면, 예수는 로마제국 아래 있는 식민지의 아무 가진 것 없는 무명의 한 청년이었고, 이에 더하여 로마제국의 하수인이 되어 로마에 협력하는 예루살렘파가 잡아죽이려고 노리는 표적이었습니다. 이것이 마르코복음이 전해주는 예수의 모습입니다.
예수의 십자가사건은 대충 줄거리만 전해지고 있습니다만, 재미있는 것은 예수시대를 전후하여 십자가에 처형된 자는 무수히 많았고 그것이 로마제국의 기록에 보존되어 있는데, 예수에 관해서는 전혀 기록되어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럴 정도로 보잘것없는, 거들떠볼 가치도 없기에 기록도 남겨지지 않은 꼴입니다. 유다 역사가 요세푸스마저도 예수에 관해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습니다. 후에 첨가된 것이 있습니다만, 그것은 요세푸스의 손으로 기록된 것이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