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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병무전집2 |
민중신학을 말한다
(한길사)
사건으로서의 부활

복음서로 다시 돌아갑시다. 이미 지적한 대로 복음서마다 부활을 빈 무덤을 전제로 하여 말하고 있는 점에서는 공통되나 부활한 예수가 자신을 현시하는 장소나 방법은 제각기 다릅니다. 루가복음은 예수의 자기현시를 예루살렘에서만 있었던 이야기로 전승합니다. 이에 반해서 마태오는 갈릴래아 현시만 전승하고 있으며, 요한복음은 갈릴래아와 예루살렘 두 곳에서의 현시를 전하고 있는데, 요한복음 전승의 내용은 마태오나 루가와 다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과연 어느 것을 기준으로 해야 할 것인지 당황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모든 복음서의 원자료로 알려져 있는 마르코는 부활전승을 어떻게 서술하고 있을까요? 마르코복음은 16장 8절로 끝납니다. 그런데 죽은 예수를 무덤으로 찾아간 여인들에게 무덤 곁에서 있는 한 청년이 말합니다. "놀라지 마라. 그대들은 십자가에 못박힌 나자렛 예수를 찾고 있지만 그는 다시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않다. 보라, 여기가 시체를 모셨던 곳이다. 그대들은 지금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가서 전에 예수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는 그들보다 먼저 갈릴래아로 가실 것이니 거기서 그를 뵐 것이라고 전하라"는 말을 끝으로 부활이야기는 끝납니다. 마르코에는 부활의 현시장면이 없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마르코 전승은 부활에 있어서의 현시를 믿지 않았을까요?

그렇게 볼 수 없는 것은 이미 14장 28절길에서 갈릴래아에서 다시 만나자는 약속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전제로 마태오는 갈릴래아의 현시를 전하고 있습니다. 사람들 중에는 8절 뒷부분이 소실됐을 것이라는 추측도 합니다만 나는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바로 이런 서술법에서 마르코의 부활사상을 읽어내야 한다고 봅니다. 사도행전이 사도들의 흔적을 끝까지 추적하지 않고 중간에 붓을 놓은 듯이 서술된 것처럼, 마르코는 이런 서술법으로 부활사건은 어떤 시점에서 종지부를 찍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알리고자했다고 생각 합니다. 이 문제는 후에 다시 제기하겠습니다.

루가는 예루살렘 현시만을 전승하고 있는데 마르코 전승은 왜 갈릴래아를 다시 만날 장소로 믿었을까? 대답은 극히 간단합니다. 갈릴래아는 예수의 공생애 활동의 현장이고 민중과 더불어 산 장소입니다. 많은 민중들이 그에게 온갖 기대를 걸었으며, 그와 더불어 새 하늘과 새 땅이 출현할 것을 기대했던 장소입니다. 그러던 것이 예수가 예루살렘에 울라가 처형됨으로써 단절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갈릴래아는 민중의 실망의 현장입니다. 죽음을 앞둔 예수가 예루살렘 근처에서 최후의 만찬을 갈릴래아의 민중들과 나누면서 "내가 진정으로 말한다. 내가 하느님 나라에서 새것을 마실 그날까지 나는 포도열 매에서 난 것을 다시 마시지 않을 것이다"(마르 14, 25)라고 말한 것으로 전승되고 있는데 이것은 예수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새 세계 도래에 대한 확신의 표명이며, 갈릴래아 민중들의 한 가닥 희망의 표현이었을 것입니다.

이 민중들에게 현시된 장면들을 보면, 그것이 어떻게 그들에게 새 나라 도래의 현실이 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을 가지게 됩니다. 분명히 절망했던 갈릴래아 민중들에게 일대전환의 사건이 일어난 것은 틀림이 없는데, 그것은 결코 주객도식(主客圖式)으로 설명될 수 없는 사건이었음에 틀림없습니다. 즉, 실망했던 제자들이 부활한 예수를 보고 새사람으로 변화한 것이 아니라, 죽은 예수의 부활사건과 그들의 재기가 분리되지 않고 동시에 일어난 사건이라고 보는 것이 훨씬 더 현실감이 있습니다. 이러한 사건을 전달하고자했을 때 현시에 관한 동화와 같은 이야기보다는 오히려 그것에 대한 침묵으로 독자의 상상력에 맡기는 편이 가장 적절한 방법이었다고 생각됩니다. 말하자면 갈릴래아 민중들에게 일대전환의 사건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갈릴래아에서 부활의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절망에서 희망으로, 비겁에서 용기로, 소외된 자의 의식에서 역사의 주체라는 의식으로의 일대전환이 일어나는 엄청난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이 사건과 예수의 부활사건은 결코 유리될 수 없습니다. 저들은 예수의 죽음에서 자기들의 죽음을 경험했고, 그의 아픔이 자기들의 아픔임을 경험했으며, 이 죽음이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라는 확신을 가졌습니다. 이 신념과 부활의 확신은 결코 분리되지 않습니다.

이 사실을 우리에게 전해주는 루가 기자의 전승을 봅시다. 그것은 사도행전 2장에 나오는 저 유명한 오순절 이야기입니다. 예수가 체포되고 처형되는 현장에서 뿔뿔이 도망쳐버린 비겁하고 무력한 갈릴래아 민중들이 어느새 완전히 달라진 새사람들이 되어, 아직도 예수를 처형한 세력들이 시퍼렇게 권력을 장악하고 있고 예수의 피가 땅에서 마르지도 않은 때에, 예루살렘으로 돌진해 들어간 것입니다. 그때는 세계 각곳에 흩어져 있던 디아스포라 유다인들까지 합해서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들의 해방의 기념축제를 위해서 예루살렘에 모여들었던 때입니다. 예루살렘은 이미 특권지역이어서 갈릴래아 민중 따위는 발붙일 수 있는 곳이 아니었습니다. 이 예루살렘 한복판에 배운 것도 없고 어떤 주어진 지위나 자격도 없는, 오직 멸시의 대상인 갈릴래아 민중 한무리가 군중을 뚫고 들어가 도도하게 일대 웅변을 휘두릅니다. 저들은 무기를 가지고 복수하러 들어간 것이 아니라 그들이 죽인 예수를 하느님이 다시 살리신 사건을 증거하려는 것이었습니다.

복음서의 이 기사는 갈릴래아에 별다른 주목을 하지 않은 루가의 전승이기 때문에, 그 진실성은 더욱더 신빙할 만한 것입니다. 저들의 증거에 놀란 예루살렘의 군중들은 "보시오, 말하고 있는 이 사람들 이 갈릴래아 사람들이 아니오. 그런데 우리 모두가 제각기 날 때부터 쓰던 말을 저들로부터 듣고 있으니 어찌된 일이오?" 하고 쑤군거렸습니다. '갈릴래아에서 온 민중!'이것은 멸시의 뜻을 담은 말입니다. 저들은 무모한 기대를 예수에게 걸었다가 그들의 수령의 비참한 죽음에 직면하여 실망하고 두려워한 나머지 뿔뿔이 흩어졌던 자들입니다. 그러했던 그들이 이제 새 역사의 주체로 등장한 것입니다. 저 둘은 이제 부활한 예수를 증거 합니다.

바로 그러한 그들에게서 그곳에 모인 군중은 부활사건을 경험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예루살렘에는 이미 여인들을 포함한 150여 명 가량의 갈릴래아 민중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삿포로 사람들이 도쿄에 가더라도 이런 용기는 낼 수 없겠지요? 예루살렘에서 도망하여 비겁하게 자기들의 스승을 배신한 저들이 언어의 표현능력을 초월한 어떤 비상한 경험을 하지 않았다면 이런 일은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이 갈릴래아 민중들이 바로 구체적으로 부활한 예수의 분신이 아닐까요? 이들을 떠나서 우리가 부활한 예수를 만날 장소가 따로 있을까요? 예수의 부활은 갈릴래아 민중의 궐기와 동시적으로 일어난 사건입니다.


| 안병무전집2 |
민중신학을 말한다
(한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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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
나의 체험 민중의 신학
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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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일 신학과 ‘역사적 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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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건의 신학’과 신학을 위한 신학
    예수는 민중이고, 민중은 예수다
    ‘성문 밖’에 현존하는 예수
    민중의 염원과 민족통일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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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의 책 성서
    한국 교회의 재래의 성서이해
    성서의 통일성 一그 민중신학적 의미
    예수一‘야훼만’을 지켜온 예언자 전통의 절정
    전통적 성서해석 방법의 이데올로기적 성격
    ‘컨텍스트’와 ‘텍스트’의 긴장
    민중신학의 컨텍스트는?
    성서는 우리에게 결단을 요구할 뿐
    민중신학이 본 성서의 맥
민중 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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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의 하느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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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회의 이상一하느님 백성의 평등공동체
죄와 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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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해방과 성령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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