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지적한 대로 '복음서'라는 문학적 유형은 마르코에서 새로 창조된 것인데, 요한도 그런 범주에 속하는 복음서임에는 틀림없다. 그것은 예수에 관한 글이라는 의미에서 일찍부터 다른 편지들과 구별하여 복음서라고 불리게 됐지만, 내용상으로 볼 때에도 세례자 요한 이야기에서 시작하여 예수가 예루살렘에서 체포, 재판을 받아 십자가에 처형되었다가 부활한 설화로 끝나는 것이 다른 복음서와 같다. 그러나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다른 복음서에 인용된 자료들과 다분히 다른 자료들이며, 또 예수가 활동한 순서도 아주 다르기 때문에 사람들은 일찍부터 다른 세 복음서와 구별해 보게 되었다. 그리하여 학문적으로 분석한 결과 다른 세 복음서는 '공관서'라고 부르고 요한복음은 완전히 고유한 것으로 취급하게 되었다. 성서를 주의 깊게 읽는 사람은 공관서와 요한복음의 차이점을 쉽게 발견하게 될 것이다.
우선 공관서의 예수는 공생애 중 예루살렘의 1주간을 빼면 갈릴래아 지방에서 보냈는데, 요한의 예수는 적어도 세 차례는 예루살렘에 올라갔다(요한 2, 13ᆞ5, 1ᆞ7, 10). 그중 7장 10절에 예루살렘으로 간 기록을 주목하면 장막절(7, 2)에서 수복절(10, 22)을 거쳐 그의 죽음을 가져온 해방절까지 머문 것으로 되어 있다. 그 기간은 적어도 반 년이 넘는다. 그 사이에 예수가 먼저 예루살렘에 가서 성전숙청부터 하는데, 이것은 그의 생애 맨 나중에 하는 공관서의 예수와는 다르며, 또한 공관서에는 해방절이 한 번만 나온다. 공관서에 따르면 그의 공생애는 1년이 못 되는데, 그가 제자들과 익어가는 밀밭 사이를 지났다는 기록(요한 2, 23)을 연대측정의 자료로 이용할 경우, 요한의 예수는 적어도 2~3년의 공생애를 보낸 것이 된다. 까닭은 그의 공생애 중 확실하게 두 차례의 해방절을 지켰기 때문이다(요한 2, 13ᆞ6, 4).
공관서의 예수의 행태에서 중요한 것은 병을 고쳐주는 것인데, 특히 귀신 쫓는 얘기가 중요하다. 그런데 요한의 예수는 귀신추방을 한 일이 한 번도 없고 가파르나움의 한 관리 아들을 치유한 일(요한 4, 46 이하), 5천 명을 먹이는 기적과 바다 위를 걷는 기적(요한 6, 1ᆞ16 이하) 외의 다른 것은 없다. 위에 예로 든 공동자료도 공관서의 것과 비교하면 그 치유하는 일 자체에 관심의 초점이 있지 않고, 그것을 계기로 그것을 행한 이, 즉 '예수가 누구인가'라는 물음에 집중한다.
그리고 공관서에 없는 기적 이야기들이 있는데 가나의 잔치에서 한 기적(요한 2, 1 이하), 베짜타의 연못가에서의 치유(요한 5, 1 이하), 소경 치유(요한 9, 1 이하) 그리고 죽은 나자로를 살려 일으키는 이야기(요한 11, 1 이하)가 있는데, 모두 긴 이야기로서 역시 그 사건 자체보다 그것을 계기로 '예수가 누구냐'를 해명하는 것에 치중한다.
또 제자를 부른 얘기가 있으나 공관서의 그것과는 전혀 다른 장면과 서술이며, 사람들과의 교류에 있어서 니고데모(요한 3, 1 이하), 사마리아 여인(요한 4, 1 이하), 음행하다 잡힌 여인(요한 8, 1 이하, 이것은 오래된 사본에는 없다)과의 만남 등 공관서에서는 볼 수 없는 집중적인 개인접촉의 예이고, 이러한 개인접촉의 예가 공관서와 비교해볼 때 요한복음에서는 두드러진다.
요한의 언어는 공관서의 그것과 판이하다. 공관서의 언어는 수난사를 빼면 단편적 얘기로 점철되어 있다. 한 가지 길게 서술한 것은 세례자 요한의 처형과정 이야기 외에는 없다. 그 짧은 단편적인 이야기 속의 예수의 말씀은 대부분 전개가 없는 한마디씩이다. 이에 대해서 요한의 언어는 주제적이며 전개적이다. 그 전체구성으로 보면 크게 두 주제로 되어 있는데, 요한복음 1장 19절~12장 50절은 세계 안에서 활동하는 예수를, 13장 1절~20장 29절은 그의 아버지(하느님)께로 돌아가는 예수를 집중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그리고 1장 1~18절에 그의 특유의 서문이 자리하고 있다.
또한 요한복음에서의 예수의 활동의 장은 파노라마적이 아니라 몇 막의 연극무대를 조명하듯이 집중적이다. 세례자 요한의 증거, 니고데모와의 대화,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 베짜타못에서 일어난 사건에 연유된 토론, 5천 명을 먹인 후 계속 전개되는 생명의 떡에 관한 설교, 소경을 싸고 일어난 유다인과의 소경론, 나자로의 죽음을 계기로 전개되는 마리아와 마르타 자매의 대화 등은 각기 평균 한 장 정도의 분량을 차지하며, 14장부터 17장에까지는 유명한 고별설교가 전개된다.
그리고 또한 놀라운 것은 공관서에서 볼 수 있는 그 많은 특유의 비유들이 요한에는 단 하나도 전승되지 않고 있으며, 흔히 비유라고 해서 선한 목자 이야기(요한 10, 7 이하)와 포도나무 이야기(요한 15, 1 이하)를 드는데, 그들은 공관서에 보는 비유와는 성격이 다르다. 전체로서 이 이야기의 성격을 표시한다면 상당히 지적이며 사변적인 언어로서, 결코 민중언어는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