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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병무전집1 |
역사와 해석
(한길사)
3. 예수의 선포
1) 하느님 나라의 초대

때가 찼다.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마르 1, 15).

이것은 예수의 설교의 요약이다. 그런데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우리는 얼른 이해되지 않는다. 그러나 당시의 이스라엘에게는 생소 한 말이 아니었다. 저들은 하느님이 세계를 완전히 지배하는 때가 어서 오기를 간구하는 기도문을 매일같이 외웠다. 그리고 하느님의 나라가 어떻게 오는지는 여러 가지로 생각되었다. 그것은 다윗왕조의 기적적인 재건일 수도 있고, 또는 세계의 종말과 더불어 오는 우주적인 사건일 수 있었고, 메시아(Messia) 또는 인자(人子)라는 이가 온다는 뜻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과거의 예언자들에 의해서 전해진 믿음, 즉 하느님의 약속이 성취되는 때를 의미한다는 데는 이론(異論)의 여지가 없었다. 그러므로 그를 그렇게 적대시하던 이스라엘의 지도자들도 이 말씀에 항의했다는 보도는 없다. 그뿐 아니라, 예수에 앞서 출현한 세례자 요한도 이스라엘의 회개를 촉구하고 다녔다. 그러나 그의 외침의 의미는 지금까지의 어느 누구의 그것과도 달랐다.

 

하느님의 나라 : 세례자 요한은 세례를 받으러 온 무리들에게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에게 그 다가오는 징벌을 피하라고 일러주었는가?" 또는 "도끼가 이미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다 찍혀 불속에 던져질 것이다"(마태 3, 7 이하)라고 한다. 그에게는 하느님 나라의 도래는 무엇보다도 이 세계의 심판을 뜻했다.

예수는 역사에서 부당한 피를 흘린 책임을 이 세대가 짊어져야 한다고 한다(루가 11, 51). 그 세대는 마지막 세대다. 그도 하느님 나라의 도래는 종말적 심판이라고 하였다. 그것을 노아의 때와도 같이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가고 시집가고……팔고 사고 나무를 심고 집을 짓고" 할 때에 갑자기 멸망이 온 것같이 올 것이다(루가 17, 27 이하). 그 나라의 도래는 이 땅의 위기다. 이어 "위선자들아, 너희가 땅과 하늘의 기상은 분간할 줄 알면서 이때는 분간하지 못하느냐?"(루가 12, 56 병행)라고 하였다. 이것은 지평선 너머를 보려고 하지 않는 세대를 책망하는 것이다. 이것은 성격상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지 않는 이스라엘에게 경고하는 예언자들의 소리와 같다. 그러나 이런 책망은 특히 그 당시의 종교적 지도층을 빗댄 말씀으로서 회개를 촉구하는 것이지 하느님 나라 자체의 의미를 나타낸 것은 아니다.

그에게 있어서 하느님의 나라는 인간에게 심판이기 전에 새로운 가능성이었다. 그것은 위협이 아니라 축복이다. 그는 하느님 나라를 땅에 묻힌 보화를 발견하고 기뻐하는 농부, 값진 진주를 발견한 장사꾼의 경우와 비교한다(마태 13, 44~45). 그 나라는 기쁨이다. 또한 그는 그 나라의 도래를 왕이 그 왕자의 결혼을 위해 배설(排設)한 잔치와 비교한다. 왕은 "이제 잔치가 준비되었고 소와 살진 짐승을 잡아 모든 것이 준비되었으니 어서 잔치에 오시오"(마태 22, 2 병행)라는 초대의 말을 종들을 통해서 전한다. "모든 것이 준비되었으니 어서 잔치에 오시오!" 이 한마디에 그 나라의 성격이 가장 단적으로 나타나 있다. 잔치음식을 함께 나누는 기쁨은 특히 이스라엘에게는 최대의 행복을 나타내는 상징이었다. 그러므로 예수는 종종 그 나라를 이렇게 표현한다. "많은 사람이 동쪽과 서쪽으로부터 와서 하늘나라에서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과 함께 잔치에 참석하겠고……"(마태 8, 11). 이 잔치는 시간과 공간에 관계없이 누구에게나 개방되어 있다.

그러면 어떻게 그 나라는 인간에게 이 같은 양면을 가졌는가? 왜 그 나라는 새 가능성, 축복의 향연을 뜻한다면서 그것은 동시에 심판인가? 그것은 그 나라 자체의 성격에서 오는 결과가 아니라 그 초대에 응하느냐 안 하느냐에서 결정된다. 그 나라는 모든 사람에게 개방되어 있다. 그 초대는 "큰 거리에 나가서 아무나…… 악한 사람이나 선한 사람이나 만나는 자"에게 다 해당된다. 따라서 그 초대는 동시에 심판이다. 왜냐하면 인간이 초대를 받아들이느냐, 아니냐의 양자택일의 결단을 요구하는 현실이기 때문이다.

 

회개 : 따라서 그 회개의 의미도 재래의 이해와 다르다. 세례자 요한은 회개를 촉구했다. 그는 회개의 상징으로 세례를 주었다. 이것은 과거의 모든 죄를 씻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라는 질문에, "세리는 정해진 세금 외에 더 받지 않을 것이며 군인은 남의 것을 강제로 빼앗거나 속여 빼앗지 말고 너의 봉급으로 만족하라"(루가 3, 10 이하)고 한다. 그러나 여기서 회개란 과거의 어떤 행동 하나하나의 잘못을 뉘우치고 그것을 깨끗이 씻으라는 것이 아니다. 아니, 회개란 바로 그 나라의 초대에 응하는 행위 자체이다. 즉 윤리적인 죄를 씻으라는 뜻이 아니라 새 가능성에 자기를 개방하고 받아들이라는 말이다. 물론 이것은 과거를 청산하는 일과 유리되지 않는다. 그러나 회개는 어떤 부분적인 것을 수정하라는 뜻이 아니라, 삶 전체의 방향전환을 뜻한다. 지금 가진 것에 집착하고 그것으로 자기 삶의 보장을 찾는 사람은 미래가 차단된다. 그것은 종교적이건 윤리적이건 마찬가지다. 지금까지 어떻게 살았느냐가 문제가 아니다. 이제부터 어떻게 사느냐가 문제이다.

그런 뜻에서 예수는 그 시대의 종교인들에게 정면에서 반박한다. 두 사람이 성전에서 기도한다. 한 사람은 바리사이인이고 다른 하나는 세리다. 이 둘은 그 시대의 의인과 죄인의 상징이다. 바리사이인은 "하느님, 나는 다른 사람들과 같이 욕심이 많거나 불의하거나 간음하는 사람이 아니며 또 세리와 같은 사람도 아닌 것을 감사합니다. 나는 한 주간에 두 번씩 금식하고 있으며 내가 얻은 것의 십일조를 드립니다"라고 한다. 이것은 기도이기보다는 감사다. 간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시위이다. 이런 사람은 새것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현재까지의 자기의 삶에 만족한다. 그런데 이 바리사이인의 기도는 당시 유다인들이 매일 기도하는 내용 그대로이다. 이 기도를 위선이라고 볼 필요는 없다. 지금까지의 종교나 윤리적인 각도에서 볼 때 그는 참 의인이다. 이에 대해서 소외자요, 죄인인 세리는 "오 하느님, 이 죄인에게 자비를 베푸소서"라고 할 뿐 고개도 제대로 들지 못한다. 그는 자신이 없다. 가진 자가 아니다. 아니, 이제 받아야만 살 수 있는 사람이다. 그런데 그 다음의 판정이 중요하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느님 앞에 옳다 함을 받고 집으로 내려간 사람은 이 세리였고 저 바리사이파 사람이 아니었다"(루가 18, 10 이하). 이것은 확실히 폭탄선언이다. 이 판정은 현재의 가치기준에서 한 것일 수 없다. 그러기에 현재의 가치 질서에서 보면 망발(妄發)이다. 그러나 그는 현재에 판단기준을 둔 것이 아니다. 오고 있는 새 나라의 빛 아래서 판단한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회개의 뜻이 확실히 드러나고 있다. 회개는 현재의 질서에서 탈선된 데로 되돌아가라는 것이 아니라 지금 미래로 향하라는 것이다.

그런 빛에서만 "가난한 사람들은 복이 있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루가 6, 205, 3)라는 판결이 이해된다. 산상설교에서 축복받은 자들은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주리고 목마른 자이다(루가 6, 20~23, 마태 5, 3 이하의 산상설교와 비교. 루가의 것이 원형이다). 이것은 이른바 의로운 자의 모습이 아니다. 미래를 향해 개방한 삶의 모습이다.

 

가까웠다 : 그 나라가 가까웠다는 것은 새 말이 아니다.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은 언제나 임박한 그 나라를 선포하였다. 더욱이 예수 당시에는 특히 많은 종말론파들이 이제 곧 올 그 나라를 선포하였으며 그것을 맞이할 준비를 서둘렀다. 세례자 요한도 그런 사람들 중의 하나다. 그런데 여기 가까웠다고 번역된 '엥기켄'(enggiken)이라는 말의 뜻은 예수의 전체적인 발언에서 볼 때 그 뜻을 다 포함한 것이 못 된다. '가까웠다'고 하면 아직은 안 왔다는 뜻이 된다. 그러면 예수 이전의 상태와 본질상 다를 바가 없다. 그러면 지금은 그저 기다리는 때가 되고 만다. 그래서 어떤 학자는 이것을 '왔다'(has come)를 잘못 번역한 것이라고 한다(C. H. 닷드). 이에 대해서 어떤 이들은 '오고 있다'로 이해하며, 어떤 이는 그 뜻을 설명해서 온 것도 아니고 올 것도 아니고 그 두 사이, 즉 하느님 나라와 현재의 분기점에 서 있음을 뜻한다고 한다. 그처럼 여러 의견이 있게 된 데는 이유가 있다. 그것은 예수가 때로는 왔다, 또는 올 것이라는 뜻의 말씀을 번갈아 가면서 하였기 때문이다. 이제 올 것이라고 한, 미래를 나타낸 말씀은 수두룩하다. 주기도문에서 "나라가 임하옵시며"라고 한 것이나 최후 만찬석상에서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하느님 나라에서 새것으로 마시는 날까지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마르 14, 25 병행) 등은 그 구체적인 예인데 가장 신빙할 만한 자료이다. 반면에 그 나라는 이미 현존한다고 발언한 사람들도 있다. 낡은 때(Eon)는 악마가 지배하는 때라는 것으로 이것은 그 당시 묵시문학파의 신념이었다.

예수도 이러한 사고를 그대로 이용한다. "내가 하느님의 손을 힘 입어 귀신들을 쫓아낸다고 하면 하느님의 나라는 이미 너희에게 임 한 것이다"(루가 11, 20 병행)라고 한 것이 그것이다. 그는 또한 "나는 사탄이 번개처럼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루가 10, 18)라고 한다. 그러면 그 나라는 이미 현재적임을 뜻한다. 또는 "너희의 보는 것을 보는 눈은 복이 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예언자들과 왕들이 너희가 지금 보고 있는 것을 보려고 했으나 보지 못 하였고 너희가 듣고 있는 것을 들으려 했으나 듣지 못하였다"(루가 10, 23~24 병행)고 한다. 이것은 이미 과거에 없었던 새로운 사건이 시작되었음을 뜻한다. 그는 그 나라가 언제 오느냐고 멀리 내다보고 묻는 자에게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 있다'(루가 17, 21)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것을 시간적인 미래라고 단정할 수 없으며 그렇다고 이미 왔다고 할 수도 없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예수는 그 나라가 언제 어떻게 오는지를 가르치려는 데 목적이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는 이때가 인간에게 어떤 때인가, 인간은 어떤 상황에 있는지를 밝히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하늘나 라가 언제 오느냐 하는 질문을 거부하며, 그 나라에 대한 표적을 보여 달라는 것을 거부한다(마르 8, 12 병행). 그는 미래에 대한 사변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런가 하면 그는 지금이 어떤 때임을 분간하지 않는 그 시대의 사람들을 책망한다.

이때를 분간하라는 것은 이때를 측정하라는 의미가 아니다. 이때에 너는 무엇을 해야 할 것이냐를 알라는 뜻이다.

즉 예수의 선포의 중심은 임박한 하느님의 나라다. 그러나 그는 그 나라가 어떤 것이며, 언제 어떻게 오는지에 대해서 가르치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나라에 대한 현재적 발언과 미래적인 발언을 그 나라와 관련시켜서 이해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실존(人間實存)의 상황을 아주 독특하게 나타내고 있다. 그 나라를 "이미 왔다……아직도 아니"(schon……noch nicht)라고 함으로써 인간의 상황을 현실과 가능의 긴장 속에 있게 하였다. 그 나라는 확실히 다가오고 있다. 그러나 그것에 대한 어떤 사변도 허락하지 않고 오직 지금은 결단의 때임을 알게 했다. 이 말은 그 나라의 도래가 실존론적인 의미만 갖는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현대인들은 역사와 단절된 실존을 가상하고 있으나 구약의 전통은 그런 것을 전혀 모른다. 그리고 하시딤 이후의 후기 유다교에 있어서도 그런 가능성은 없다. 예수의 하느님 나라를 알려면, 적어도 하시딤을 기점으로 한 하느님 주권 운동의 맥락에서 보아야 할 것이다.

이들에게서는 하느님의 주권이란 어디까지나 정치적인 것이다. 구체적으로 이스라엘은 하느님이 지배해야 한다는 사상이며, 저들의 운동들은 모두 그것을 위한 운동이었다. 그것은 묵시문학 일부에서 볼 수 있는 사변의 대상도, 피안적인 것도 아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이 역사 위에서 이루어질 구체적인 것이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이스라엘을 외세에서 해방시키고, 가난한 자를 해방시키며, 불의한 자를 제거하는 것이 저들의 구체적인 역사적 사건으로 일어난다고 믿은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예루살렘과 성전을 불의한 자들의 손에서 풀어내는 일이 일차적 목표였다. 예수는 하느님 나라로 간다고 한 것이 아니라 온다고 했다(주기도문). 하느님 나라의 도래와 직결되는 인자도 오리라고 한다(마르 8, 38 병행). 예수는 하느님 도래의 전조(前兆)로서 그를 통해 일어나고 있는 사건을 열거한다. "맹인이 보고 절뚝발이가 걷고 나병환자가 깨끗해지고 귀머거리가 듣고 죽은 사람이 살아나고 가난한 사람에게 복음이 전파된다"(루가 7, 22). 이 사건의 내용은 예수가 고향에서 읽었다는 이사야서의 것과 아주 비슷하다(루가 4, 18-19). 이것은 해방의 사건이다. 그는 정치적 구조를 근원적으로 보고 있다. 그는 이 에온을 사탄이 지배하고 있다고 보고 있으며 이런 전제 아래서 모든 세력을 판단한다. 그러므로 하느님 나라의 도래와 악마의 추방은 동시적인 사건으로 본다. 그런 각도에서 볼 때에만 그가 귀신들을 쫓아내면 하느님 나라는 도래한 것과 같다(루가 11, 20/Q)는 말의 의미를 알 수 있다. 이것은 하시딤 이후의 여러 계보에서 일관된 사상이요, 신념이었다. 예수도 그 계보 위에 섰다. 단 그는 그 나라의 도래와 이스라엘 중심주의를 연결시키지 않았다. 그는 이마 그 나라 도래의 우주성을 본 것이다.

그러기에 그것은 한 민족의 운명을 바꾸어놓거나 또 사회개혁을 가져오는 사건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다. 우주적 '개벽'을 가져오게 하는 사건을 본 것이다. 이런 뜻에서 마태오는 많은 암시를 하고 있다. 그것은 이미 이스라엘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동쪽과 서쪽으로부터, 즉 온 세계에서 그 나라에 참석하게 되리라는 것이다.

참고문헌

김지철, 「예수의 '은혜의 해'(희년) 선포」, 『교회와 신학』 제23호(1991).

박수암, 『산상보훈』(대한기독교출판사, 1990).

성종현, 「예수와 하느님 나라」, 『기독교사상』 제329호(1986. 5).

안병무, 「하느님의 나라」, 『갈릴래아의 예수』(한국신학연구소, 1990).


| 안병무전집1 |
역사와 해석
(한길사)
List of Articles
표지
증보판에 부치는 말
머리말
       
제1부 고전(古典)으로서의 성서
       
제1장 고전의 의미
    1. 인류와 고전
    2. 현대인과 고전
제2장 성서의 특성
제3장 성서를 보는 눈
제4장 성서에서 보여주는 역사의 주체
제5장 성서의 자료와 편집
       
제2부 약속을 믿고 산 민족사 : 구약
       
제1장 한 책의 민족 이스라엘
제2장 인간사 서장
    1. 창조된 세계와 인간(아담)
    2. 잘못 출발된 역사
제3장 도상의 나그네
    1. 족장들
    2. 탈출의 족장 : 아브라함
    3. 하느님과 겨룬 사나이一야곱
제4장 엑소더스
    1. 히브리
    2. 모세
    3. 하느님과의 계약
    4. 십계명
제5장 종족공동체의 형성
    1. 가나안 정착
    2. 이스라엘 종족동맹
    3. 판관들
        1) 판관 삼손(판관 13~16장)
        2) 판관 기드온(판관 6~8장)
제6장 왕국시대
    1. 왕권과 국가
    2. 다윗왕조
    3. 왕국시대
        1) 솔로몬 왕
        2) 분단 200년
제7장 예언자
    1. 예언자의 현장
    2. 찬양과 저주一나단
    3. 왕권과의 대결자一엘리야
    4. 종교보다 정의를一아모스
    5. 남은 무리 一이사야
    6. 심판과 새 가능성 一예레미야
    7. 해골의 부활一에제키엘
    8. 너 위한 수난一이름없는 예언자
    9. 예언자의 말의 성격
    10. 과거, 현재, 미래
   
제3부 새로운 개벽 : 신약
   
제1장 예수의 사건
    1. 예수의 시대상
    2. 역사와 해석자
    3. 예수의 선포
        1 ) 하느님 나라의 초대
        2) 낡은 질서와의 대결
    4. 예수의 행태
        1) 무슨 권위로
        2) 예수와 민중
    5. 십자가 처형
    6. 갈릴래아에서 만나자一부활사건
제2장 예수운동의 전진(사도행전)
    1. 예루살렘에서의 예수의 민중운동
    2. 이스라엘 민중운동의 목표와 사상
    3. 민중사실
제3장 바울로의 삶과 증언
    1. 그의 삶
        1) 바울로의 위치
        2) 민중사건에 항복한 사울
        3) 바울로의 연대기
    2. 바울로의 증언
        1) 인간세계 심판
        2) 사람됨의 조건
        3) 죽음에서의 탈출
    3. 그리스도와 역사
    4. 자유인의 길
        1) 앞을 향해 달리는 삶(필립 13,1~14)
        2) 하느님 앞에 선 존재 (갈라 4, 1~10)
        3) 이웃과 더불어의 존재
    5. 바울로의 민중론
        1) 고린토교회의 사회계층
        2) 민중을 보는 바울로의 눈
        3) 택함을 받은 민중
    6. 바울로의 수난기
        1)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
        2) 예루살렘에서
        3) 문제점들
        4) 바울로는 ‘정치범’이 아닌가
        5) 예수의 수난사와 바울로의 수난기
제4장 요한의 증언
    1. 요한복음의 특이성
        1) 공관서와의 관계
        2) 요한의 정신적 풍토
        3) 예수의 새 해석
    2. 개벽의 선언
    3. 갈림길
제5장 박해와 희망(계시록의 신앙)
    1. 묵시문학의 성격
    2. 로마제국과의 대결
    3. 결단할 때
    4. 영원의 노크
    5. 마라나타
한국어로 된 성서 연구 참고문헌
전집간행에 부치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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