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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병무전집1 |
역사와 해석
(한길사)
3. 그리스도와 역사

오랫동안 사람들은 바울로의 구원의 사상을 오해했다. 따라서 성서에서 말하는 구원의 뜻도 잘못 이해했다. 우리는 존 버니언(J. Bunyan)의 『천로역정』이라는 종교적인 문학에 친숙해왔다. 따라서 그 안에 있는 구원을 찾는 자세가 바로 성서의 구원관처럼 생각해왔다.

『천로역정』의 그리스도인은 이 세계가 곧 망한다는 생각에서 이 세상에서 빨리 탈출하는 것이 신앙의 길이요, 구원의 길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자기 고향의 처자를 다 뿌리치고 "구원, 구원" 소리치면서 뛰쳐나간다. 그의 앞에는 많은 장애와 유혹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끝끝내 모든 것을 이기고 결국 천국에 입성한다.

그 안에는 물론 많은 진리가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좀 돌이켜 생각하면 그 주인공은 철저한 이기주의자이다. 자기 개인의 구원만을 위해서 가까운 사람을 다 버리고 자기만 살겠다고 달려가는 그 사람이 정말 본받을 만한 인간일까? 자기만 구원받고 이 세상에 있는 자기 처자를 위시한 다른 사람들은 망해도 좋다는 말인가? 또 그의 행위가 정말 신앙인의 행위인가? 그는 실은 이 세상에서의 도피, 말하자면 도망하고 있는 비겁한 자가 아닌가?

우리는 구원이라고 하면 쉽게 구약에 있는 노아의 홍수 이야기를 연상한다. 홍수로 세상은 전부 망해버리기 직전에 놓였다. 노아는 그와 그의 식구들의 구원을 위해서 방주(方舟)를 만든다. 마침내 홍수로 세상이 전부 전멸될 때 그는 이 방주에 오르고, 그 문을 잠근다. 그로 인해 모든 인간은 다 없어지고 그의 식구들만이 살아남는다.

성서에서 말하는 구원도 이와 같은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은 이 세상은 곧 망해버릴 것이니 나만이라도 방주를 만들어 구원받자고 생각한다. 따라서 이러한 구원관은 이 세상은 고해(苦海)와 같으며 곧 없어질 것이니 다 무가치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구원이란 이 인간세계에서 초연하며 마침내 그것에서 탈출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노아의 홍수 이야기를 잘못 이해한 것이며 더욱이 바울로의 구원관과도 애당초 거리가 멀다. 노아의 홍수 이야기는 구원관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인간의 죄악을 문책하려는 것이다. 그리하여 인간역사가 지속되는 것은 하느님의 새로운 은총과 약속에 의해서라는 것을 말하려는데 그 초점이 있다.

바울로는 결코 이기적인 구원을 말하지 않는다. 아니, 그는 이 세계, 이 역사의 구원을 말한다.

내게는 큰 슬픔이 있고 내 마음에 끊임없는 고통이 있습니다. 나는 내 동족인 형제를 위하여 나 자산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오히려 나는 한이 없겠습니다(로마 9, 2~3).

이것은 『천로역정』의 그리스도인의 자세와는 너무나 다르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위해서 그 생애를 바친 바울로의 염원이다. 그러나 그것은 소원만이 아니다. 그는 이스라엘 전원이 반드시 구원받게 될 것을 믿었다(로마 11, 26). 이것은 하나의 민족주의인가? 그렇지 않다. 그는 이스라엘보다는 이방인을 위한 사도라는 사명감에서 일생을 이방인들을 위해 바쳤다. 이것은 그가 그리스도를 통한 하느님의 구원은 어느 개인이나 어느 부분적인 데에 머무를 것이 아니라 인류 전체에 이를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민족은 점령세력과 야합하여 예수를 처형하고, 그리스도의 구원의 사건을 거부했고, 그리스도교를 박해했다. 그들의 박해에 못 이겨 이방으로 흩어진 적은 무리는 가을 숲에 던져진 불처럼 이방인 세계에 이 구원의 영역을 넓혀나갔다. 바울로는 그 선봉에 섰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가는 곳마다 이방에 사는 이스라엘 민족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쳤다. 이 무슨 아이러니일까? 예수는 이스라엘 민족의 일원으로 그 땅에 태어났는데 그 민족은 저를 거부하고, 오히려 이스라엘이 아닌 이방인들이 속속 새로운 구원의 사건에 참여하였다. 그러면 이스라엘 민족은 이 구원의 사실에서 제외되었는가?

이러한 현실 한복판에서 이 구원의 사건의 사도로 참여한 바울로는 이 역사적 현상을 해석한다. 이것은 세계 전체의 구원을 위해서 되어지는 과정이라고, 이스라엘이 그리스도교를 박해하였기 때문에 오히려 빠른 속도로 이방인에게 구원의 문이 열리게 되었으며 또 이방인이 그토록 적극적으로 구원의 반열에 가담하게 되는 것은 이스라엘에게 질투를 일으켜 종당에는 저들도 그 대열에 참여할 계기가 될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마침내는 세계 전체가 구원받게 될 것이라는 것이 바울로의 해석이었다(로마 11장 참조).

이것은 섭리론(攝理論)이 아니다. 하느님이 인류 전체를 구원하시리라는 신앙의 증언이다. 그리고 그것은 신앙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의 신념으로서 그의 삶의 설계로 현실화됐다. 그는 그 당시의 대제국으로 세계의 중심부로 엮어진 로마 시를 정점으로하고, 이 때 이 지구의 끝이라고 알려졌던 스페인까지 선교할 계획을 세우고 착착 진행시켰던 것이다.

바울로는 그리스도의 구원사건은 인류 전체를 위한 것이라고 믿는다. 한 사람, 한 사람의 구원은 이 전체의 구원의 틀 속에서만 가능하다. 그러나 바울로의 구원관은 사람의 세계에서 더 확대되어 나아가서 우주론적인 접근을 한다. 즉 이 구원은 사람에게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이 피조물 전체에까지 구원이 확대되어야 한다고 본 것이다. 그러면 이 세계, 이 역사의 구원은 어떻게 가능한가? 이것은 그가 이 세계를 어떻게 보고 있는가와 관련되어 있다.

바울로의 세계관은 당시 중동아시아 일대의 사조(思潮)에서 보는 것처럼 비관론적인 색채가 농후하다. 그는 로마서(8, 18 이하)에서 자신의 눈에 비친 세계에 대한 인상을 말하는데, 그것은 이 세계의 만물이 신음하고 있다는 것이다. 아니, 그것만이 아니다. 인간들도 신음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비관적인 안경을 쓰고 세계를 보는 사람들의 말과 같다. 만물은 신음한다. 왜? 그것은 '허무'와 '사멸'될 것에 예속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현대에 와서 이 바울로의 자연관에 옷깃을 여미어야 할 것이다. 바울로의 이 같은 자연관은 서구인들에게는 낯선 것이고, 오히려 동양인에게는 친숙한 것일 수 있다. 이른바 오늘날의 현대화는 서구화와 구별없이 진행되는데, 그것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자연의 정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자연을 자연대로 두지 않고 모두 파괴, 동력화해서 '보다 더'라는 인간의 허무한 욕구 충족에 이용하는 것이다. 그 결과 이른바 생태학적 위치를 새삼 떠드는데 바울로는 그의 언어로, 자연이 신음한다고 한 것이다. 그러나 그는 비관주의자의 함정에 빠져서 세계와 인간의 무상을 노래하며 체념이나 몰아(沒我)를 권하지 않는다. 그는 이 세계와 인간들의 신음소리와 더불어 그 속에서 '간절한 기다림' 소리를 듣고 있다.

세계는 이 고통 속에서 '영광'의 상태, '해방', 궁극적인 '자유', 즉 구원을 기다린다. 세계는 슬픔에 차 있다. 그러나 동시에 희망에 찬 세계이다. 지금은 허무에 종속되어 있다. 그러나 영광스러운 미래가 약속되었다. 지금은 고통스럽다. 그러나 그 희망에서 구원이 이미 약속되었다. 따라서 그는 "현재 우리가 당하는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에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그는 비관론에 빠질 수 없었다. 왜냐하면 이 역사에는 궁극적인 목적이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우리는 바울로와 더불어 우리의 세계가 고통과 절망적인 비참함으로 차 있다는 것을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변화무쌍한 과정 속에서도 세계가 전체로서 어떤 것을 지향하고 있다는 사실을, 비록 구체적으로 볼 수 있게 제시하지는 못한다고 해도 쉽게 믿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내적 갈등을 생각하면 쉽게 바울로에게 동의할 수 있다. 인간은 어느 면에서 자연의 한 부분이다. 그것은 육체를 가졌다는 사실 하나에서도 너무나 분명하다. 이 육체는 숙명과도 같은 맹목적인 동물성에 지배받고 있다. 그러나 사람은 쉴 새 없이 '보다 나은', '보다 아름다운' 무엇을 갈구해서 쉬지 않으며 어떤 완성의 상태를 지향해 마지 않는다.

그런데 모든 만물이 허무에게 예속되어 신음하고 있다는 것과 그런 것에서 해방되기를 갈구하고 있다는 말은 얼론 납득이 가지 않는다. 그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어떤 이들은 이것은 최후 종말 때에 신기한 사건으로 새 하늘과 새 땅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한다. 바울로는 그렇게 생각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에게서 가장 중요한 점은 이 만물의 해방과 인간형성을 직결시킨 것이다. 즉 이 세계가 허무에서 해방되는 길은 물질 자체의 진화나 기계문명의 발달과 같은 과정에서 직접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참 사람'이 출현할 때에만 가능하다.

여기에는 두 가지 사실이 전제되어 있다. 하나는 그가 '만물' 또는 '세계'라고 말할 때 우주론적인 의미에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세계'를 말한다는 사실이다. 바울로는 만물이 그 자체로 독립되어 있는 실체라고 보지 않는다. 그것은 인간의 의지 여하에 따라서 그 가치가 결정된다. 인간의 의지에 따라서 선도 악도 된다. 따라서 그것은 사람을 죽이는 전쟁의 도구나 장소도 될 수 있고, 또한 사람을 살리는 도구나 장소도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우주의 운명의 열쇠는 사람이 가지고 있다. 만물이 허무한 데서 해방되기 위해서 '하느님의 아들들'이 나타나기를 기다린다 함은 세계의 운명은 참된 인간의 출현에 달렸다는 절박한 요청을 시적(詩的)으로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세계의 운명은 참 인간의 탄생과 직결된다. 그러기에 인간도 참 인간이 되기 위해서 신음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사람의 소원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뜻이다. 그러므로 바울로는 성령도 인간의 형성을 위해서 동원되고 있다고 한다.

이 세계 역사의 성취는 참 인간의 완성과 직결된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세계 구원의 뜻은 참 인간의 형성에서 시작된다. 그 뜻은 예수 그리스도의 출현과 함께 세상에 드러났다. 예수는 바로 이제 완성될 참 인간의 모습 자체이며 그 확증이다. "하느님께서 미리 아신 사람을 그의 아들의 형상과 같은 모습이 되게 하시려고 미리 작정하셨습니다"(로마 8, 29). 그런데 그것은 단순히 작정만 하는 계획이 아니다. 그 일은 이미 시작이 됐다. 그리스도가 바로 그 첫 인간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외아들'이라는 지금까지의 관념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야 한다. 그는 홀로의 길을 간 것이 아니라 우리의 길을 앞서가고 있을 뿐이다. 이 말은 우리는 그와 더불어 그의 길을 가도록 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개인이 아니라 우리가 포함된 한 '집단'의 선구자인 것이다. 그런 뜻에서 바울로는 "그것은 그의 아들을 많은 형제 가운데서 맏아들이 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라고 한다.

그런데 그리스도를 통한 하느님의 뜻은 인간을 그리스도의 형상과 같은 모습이 되게 함에 있다는 일차원적인 인간의 구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세계구원의 발판으로 삼고자 함이다. 즉 인간의 완성은 이 역사의 궁극적인 목적이며, 그리스도는 이 사실을 앞당겨 보여준 것이다. 이로써 세계 역사의 궁극적인 구원은 하나의 염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진행되고 있다는 확증을 보여준다. 이 세계 역사는 그리스도의 탄생으로 역사에 새 가능성의 시작이 이미 수태(受胎)되었으며, 따라서 그것의 완성은 너무나 분명하다. 참 역사는 그리스도에게서(from), 그리고 그리스도를 향해서(to) 진행한다.

따라서 바울로는 이스라엘 역사의 기원에서부터 역사를 말하지 않고 인류의 조상 아담에서 시작하여 그리스도의 출현, 그리고 세계 역사의 종국의 그날로 역사의 시작과 끝을 삼는다(로마 5장). 아담에게서 죄로 시작된 역사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류 전체의 구원으로 끝날 것이다. 따라서 그는 아브라함을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으로 국한시키지 않는다. 그는 온 인류의 조상이다. 그것은 혈연의 측면에서가 아니라 믿음으로, 즉 미래의 궁극적인 측면에서 보아 그렇다(로마 4, 16). 동시에 이스라엘이라는 개념도 달라졌다.

이스라엘의 혈통, 그 땅에서 난 사람이 이스라엘이 아니다(로마 9, 6). 그리고 이 이상의 외적인 조건으로 유다인이 되는 것은 아니다. 유다 사람은 율법의 할례와 그 법조문을 독점함으로써 하느님의 선민(選民)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육체로 받은 할례는 참 할례가 아니다. 참 복종이나 할례 따위는 다른 차원에서 결정된다. 그것은 내적인 의미에서의 유다인 또는 할례라고 한다(로마 3, 28 이하). 이것은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세워진 새로운 기준이다. 그러기에 그리스도는 민족으로서의 이스라엘의 끝이며, 또한 율법의 끝이다(로마 10, 4). 그는 육적인 계보에 종지부를 찍었다. 낡은 계약은 끝나고 그리스도를 통해서 새 계약이 주어졌다. "이 새 계약은 씌어진 법조문으로 된 것이 아니라 영으로 된 것이다"(고후 3, 6). 여기서 영으로 되었다 함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임을 말한다. 그러기에 "아브라함의 자손", "하느님의 아들"이 되는 길은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이루어진다(갈라 3, 26 이하).

바울로는 그리스도를 중심하여 이루어질 새 사람의 공동체를 바라보고 있다. 그는 이것을 '새로운 이스라엘' 또는 '그리스도의 몸', 또는 '교회'라고 부른다. 이것은 사회주의자가 그리는 복지사회나 또는 공산주의자가 말하는 유토피아 같은 것이 아니다. 그것은 바로 하느님의 나라, 하느님의 주권이 완전히 지배하는 새로운 현실을 말한다. 그것이 이루어질 때가 바로 "주의 날"(데살전 5, 4~8)이다. 바울로는 이날이 가까이 오고 있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보이게 오는 것이 아니다. 아니, 지금은 오히려 밤과도 같이 어둡다. 이스라엘도 세계의 다른 민족도 오히려 그날을 역행하고 있다. 그러나 그날이 반드시 오리라는 것을 그는 의심하지 않는다. 그날은 약속된 날이다. 그러므로 비록 현상적인 세계는 역행하고 있으나 하느님은 그날을 오게 하고야 말 것을 믿는다. 그는 그날을 눈으로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앞당겨 본다. 이런 믿음은 그로 하여금 어둠의 현실에 좌절하게 하지 않고 그 어둠 저쪽에 밝아 오는 아침의 여명이 다가오는 소리를 듣게 한다. 그러므로 그는 밤이 깊다는 현실 속에서 낮이 가까움을 본다. 그는 과거에서 현재를 보지 않고 미래에서 현재를 보기 때문에 밤이 깊다고 하지 않고 낮이 가까웠다고 하는 것이다(로마 13, 11~14). 그날이 와야 비로소 모든 만물이 허무한 것의 노예상태에서 해방되어 제 본연의 모습을 찾을 것이다. 그러므로 만물이 함께 신음하면서 하느님의 아들들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역사는 궁극적인 새 현실을 향하여 운행된다. 이것은 바울로에게서 시작된 역사관이 아니다. 이미 구약의 이스라엘의 신앙, 특히 예언자들의 신앙이 그러했다. 그러나 바울로 당시의 전통적인 유다교에는 이러한 희망이 사라져버렸다.

그것은 율법주의 때문이었다. 저들은 하느님이 이 세계를 창조하였다는 것과 오랜 옛날에 하느님이 이 역사에 개입했던 것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궁극에 가서 하느님이 세계의 심판으로 개입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인간역사로서의 이 시대는 냉혹한 법(율법) 만이 기계적으로 돌아갈 따름이다. 특히 당시의 바리사이파들은 율법을 철저히 지키는 것 외에 다른 것은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율법은 이미 조문화(條文化)된 것이며 기존체제를 지키는 이데올로기가 된 것이다. 그러기에 오히려 이 율법을 강조하면 할수록 그만큼 하느님의 직접적인 개입을 막는 것이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어떤 새것도 용납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안에 있는 인간은 기계적인 행동밖에 할 수 없다. 말하자면 인간은 율법을 숙명처럼 지고 가는 노예일 따름이다.

그 당시의 철학은 인간의 운명은 그의 별(星)에 의해서 조종된다는 고대 그리스 미신에 의해서 지배되고 있었다. 따라서 인간은 숙명주의에 빠져 있었다. 그들은 사람으로는 어쩔 수 없는 자기 운명 아래서 체념으로 질식상태에 있었다. 이런 것들을 바울로는 "이 세상 통치자" 또는 "자연의 힘들"(우리 번역은 '원시종교'라고 했다)이라고 한다.

이런 법의 기계적인 지배, 숙명의 성좌(星座)의 지배라는 사상에 저항해서 바울로는, 하느님은 언제나 어떤 시대를 막론하고 직접 이 역사에 관여하고 지배한다고 선언한다. 그는 이 역사를 제멋대로 내버려둔 자동적인 흐름으로 보지 않고 구원의 역사(Heilsgeschichte)로 본다. 하느님은 아브라함을 불렀다. 그러나 그것으로 그의 간섭이 끝나고 그 혈연에 그 성취를 내맡긴 것이 아니다. 그는 이사악, 야곱을 택했다. 또 이스라엘이 타락했을 때 우상에게 무릎을 꿇지 않은 7천 명―엘리야에게 보여준―을 택했다. 또는 타락한 이스라엘을 구할 '남은 무리'―이사야에게 보여준―를 택하였고, 마침내 다윗의 자손 예수를 그의 아들로 임명하여 온 세계인을 하느님께 이끌고(로마 1, 3~4) 그 자녀의 자격을 주려 했다(갈라 4, 4~7). 이처럼 계속적으로 역사에 간섭하시는 그 하느님은 이 역사 안에서 역사를 종국으로 이끌 것이다. 이것은 숙명론자에게는 혁명적인 선언이 아닐 수 없다.

바울로는 자주 하느님이 "미리 정하신 것"이라는 말을 자주 쓴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숙명적인 예정론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하느님이 직접 산 뜻으로 역사에 개입하고 계시다는 신념의 고백이다. 위에서 관찰한 로마서 8장에서 바울로는 우주의 미래를 말하고 "하느님께서는 미리 정하신 사람들을 부르시고, 부르신 사람들을 또한……"이라고 한다. 이것만 보면 쉽게 숙명적인 예정론에 빠지게 된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바로 그전에 하느님께서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계획대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과 함께 일하셔서 모든 것을 선하게 해줄 것을 믿습니다"라는 말이다. 이것은 다음의 뜻을 시사한다.

첫째, 하느님은 홀로 이 역사를 이끌지 않고 사람과 더불어 일하신다는 것이다. 하느님이 인간을 제외하고 일방적으로 역사를 이끈다면 그것은 인간에게는 숙명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인간과 더불어'라고 하면 인간은 이 역사의 완성의 과업을 위한 참여자가 된 것이다.

둘째, 그러나 하느님은 이 과업을 인간 전체를 상대로 시작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의 계획대로 부른 자', 말하자면 선택된 자와 더불어 일하신다고 한다. 이 말 속에는 구약의 전통적인 사상이 반영되어 있다. 이스라엘이 하느님의 뜻을 역행했을 때마다 하느님은 그중의 일부 또는 한두 사람을 선정해서 그들을 거점으로 그들과 더불어 일했다. 엘리야에게 보여준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은 7천 명, 또는 이사야에게 보여준 '남은 무리' 따위가 그것이다. 이것은 현대적으로 말하면 엘리트'이다. 하느님은 이 엘리트를 선택해서 이 역사를 완성한다.

셋째, 그런데 그 엘리트는 인간의 능력에 그 기준이 있지 않다. 그것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자'들이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자란 바로 이 하느님의 역사 경륜을 믿고 거기에 전적으로 참여하기로 결단한 자다. 구약에서는 하느님이 이스라엘 민족을 세계의 구원을 위해 선정했다고 했다. 그러나 이 민족이 하느님의 뜻에 반역했다. 그것은 저들의 폐쇄적인 독선과 이기주의로 나타났다. 바울로는 저들의 우선권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출현을 기점으로 저들의 우선권은 상실되었다. 그 대신 민족의 담을 넘어서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이 바로 엘리트로서 선택된 것이다.

초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이러한 엘리트의식이 충일되어 있었고, 바울로는 주저없이 그리스도의 동역자로 자처하였다. 바울로는 이들을 '새로운 이스라엘'이라고 부른다. 그 새 이스라엘이 현실적으로는 누구인가? 그리스도의 뒤를 따르기로 모여든 사람들이다. 저들은 사회계층으로 보면 어떤 사람들인가? 우리는 고린토전서에서 중요한 단서를 발견한다.

형제들이여, 여러분이 부르심을 받을 때의 일을 생각해보시오. 인간적으로 볼 때 지혜있는 사람이 많지 않았으며 권력있는 사람이나 가문이 훌륭한 사람도 많지 않았습니다(1, 26).

이 말에서 그 모인 자들은 권력, 사회, 문화적 측면에서 볼 때 밑 바닥 사람들이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바울로는 하느님이 바로 저런 이들을 택했다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지혜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세상의 약한 자들을 택했습니다. 그리고 유력하다는 자들을 무력하게 하기 위하여 세상에서 천한 자들과 멸시받는 자들과 존재없는 자들을 택하셨습니다(고전 1, 27~28).

결국 선택된 것은 민중이다. 저들이 궁극적으로 역사의 주역이 되리라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저들이 '엘리트'이다(「선택된 민중」, 『현존』 104호, 1979 참고). 따라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은 그 개인의 구원을 위해서 선택된 것이 아니라 바로 이 세계 역사의 완성을 위한 전위대로 부름받았음을 뜻한다. 이들이 바로 하느님의 아들들이다. 저들은 바로 이 역사를 그 종국으로부터 거슬러 내려와서 보고, 현재를 지배하는 유령(허무)과 싸워 이김으로써 이 역사를 진정한 주인에게 맡기기 위해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다.

참고문헌

이상섭, 「바울의 기독론 : Cosmoic Christology 중심」, 『로고스』 제24호(1977).

Gibbs, J. G., 「바울 신학의 우주적 그리스도론과 생태학적 위기」, 『神學思想』 제2호(1973,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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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해석
(한길사)
List of Articles
표지
증보판에 부치는 말
머리말
       
제1부 고전(古典)으로서의 성서
       
제1장 고전의 의미
    1. 인류와 고전
    2. 현대인과 고전
제2장 성서의 특성
제3장 성서를 보는 눈
제4장 성서에서 보여주는 역사의 주체
제5장 성서의 자료와 편집
       
제2부 약속을 믿고 산 민족사 : 구약
       
제1장 한 책의 민족 이스라엘
제2장 인간사 서장
    1. 창조된 세계와 인간(아담)
    2. 잘못 출발된 역사
제3장 도상의 나그네
    1. 족장들
    2. 탈출의 족장 : 아브라함
    3. 하느님과 겨룬 사나이一야곱
제4장 엑소더스
    1. 히브리
    2. 모세
    3. 하느님과의 계약
    4. 십계명
제5장 종족공동체의 형성
    1. 가나안 정착
    2. 이스라엘 종족동맹
    3. 판관들
        1) 판관 삼손(판관 13~16장)
        2) 판관 기드온(판관 6~8장)
제6장 왕국시대
    1. 왕권과 국가
    2. 다윗왕조
    3. 왕국시대
        1) 솔로몬 왕
        2) 분단 200년
제7장 예언자
    1. 예언자의 현장
    2. 찬양과 저주一나단
    3. 왕권과의 대결자一엘리야
    4. 종교보다 정의를一아모스
    5. 남은 무리 一이사야
    6. 심판과 새 가능성 一예레미야
    7. 해골의 부활一에제키엘
    8. 너 위한 수난一이름없는 예언자
    9. 예언자의 말의 성격
    10. 과거, 현재, 미래
   
제3부 새로운 개벽 : 신약
   
제1장 예수의 사건
    1. 예수의 시대상
    2. 역사와 해석자
    3. 예수의 선포
        1 ) 하느님 나라의 초대
        2) 낡은 질서와의 대결
    4. 예수의 행태
        1) 무슨 권위로
        2) 예수와 민중
    5. 십자가 처형
    6. 갈릴래아에서 만나자一부활사건
제2장 예수운동의 전진(사도행전)
    1. 예루살렘에서의 예수의 민중운동
    2. 이스라엘 민중운동의 목표와 사상
    3. 민중사실
제3장 바울로의 삶과 증언
    1. 그의 삶
        1) 바울로의 위치
        2) 민중사건에 항복한 사울
        3) 바울로의 연대기
    2. 바울로의 증언
        1) 인간세계 심판
        2) 사람됨의 조건
        3) 죽음에서의 탈출
    3. 그리스도와 역사
    4. 자유인의 길
        1) 앞을 향해 달리는 삶(필립 13,1~14)
        2) 하느님 앞에 선 존재 (갈라 4, 1~10)
        3) 이웃과 더불어의 존재
    5. 바울로의 민중론
        1) 고린토교회의 사회계층
        2) 민중을 보는 바울로의 눈
        3) 택함을 받은 민중
    6. 바울로의 수난기
        1)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
        2) 예루살렘에서
        3) 문제점들
        4) 바울로는 ‘정치범’이 아닌가
        5) 예수의 수난사와 바울로의 수난기
제4장 요한의 증언
    1. 요한복음의 특이성
        1) 공관서와의 관계
        2) 요한의 정신적 풍토
        3) 예수의 새 해석
    2. 개벽의 선언
    3. 갈림길
제5장 박해와 희망(계시록의 신앙)
    1. 묵시문학의 성격
    2. 로마제국과의 대결
    3. 결단할 때
    4. 영원의 노크
    5. 마라나타
한국어로 된 성서 연구 참고문헌
전집간행에 부치는 말
판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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