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에는 마르코복음을 중심으로 예수의 죄이해에 대해 얘기해봅시다. 우선 예수는 죄 자체에 대해서는 관심하지 않고 '사탄'이라는 것을 문제삼았습니다. 우선 예수에게 있어서 대전제는 하느님 나라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사탄이 지배하는 세계와 상반되는 것이지요. 예수가 하느님 나라를 대전제로 하였다는 것은 곧 사탄과의 싸움을 전제하는 것이며, 그 사탄이 지배하는 세상을 종식시키겠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사탄의 실체는 무엇이겠습니까? 사탄의 실체는 구조악입니다. 결국 사탄이 지배하는 세상을 종식시킨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말하면 구조악에 의해 속박당하고 그로 인해 죄인 취급을 당하던 민중들을 해방시킨다는 것이지요. 한마디로 예수는 구조악의 법망(法網)이 얽혀 있는 것은 괘념치 않고 그것에 의해 속박당하는 소위 죄인들만을 보고 그들에게 뛰어들어가 그들과 더불어 살다 죽은 것입니다. 죄인 취급을 당하던 민중의 해방을 위해 끝까지 구조악과 싸웠고, 그 구조악에 속박된 소위 죄인들을 죄인이라 부르지 않고 가장 영예로운 이름인 '아브라함의 자녀', '하느님 나라의 새 백성'이라고 불렀습니다. 예수는 구조악이 없어지면 죄가 없어 지고, 죄가 없어지면 곧 하느님 나라가 실현되는 것으로 본 것입니다. 이 점에서 참된 공산세계가 오면 소유욕도 불평등도 없어지게 될 것이라고 보았던 마르크스와 일치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의 죄이해를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기 위해서 마태오복음에 나오는 유명한 여섯 가지 반제(antithesis)를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섯 가지 반제는 살인(분노), 간음, 이혼, 맹세, 보복, 원수사랑에 관한 것입니다. 당시 유다교에서 살인은 가장 중대한 죄로 여겼는데 예수는 살인 이전에 사람을 미워하는 것도 일종의 살인이라고 함으로써 유다교의 살인금령을 극단화시켰습니다. 간음에 관해서도 남의 여자에 대해 탐욕을 느끼는 것만으로도 이미 간음 한 것이라고 했지요. 이혼에 관한 문제에서도 이혼 자체를 부정함으로써 남성의 횡포에 대항해 여성을 옹호하는 입장에 섰습니다. 또 유다교에서는 맹세를 지키지 않는 것이 반율법적인 것으로서 큰 죄가 되었는데, 예수는 맹세 자체를 금함으로써 유다교 체제에 의해 규정 된 죄 자체를 무시해버립니다. 그리고 당시의 유다교적 사고방식과는 달리 예수는 보복 자체를 금하고 있습니다. 끝으로 원수사랑의 문제는 사실상 유다 민족주의와 결부된 것인데, 이 경우 '원수'는 '이방인'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예수는 원수를 사랑하라고 함으로써 유다교 정결법에 의해 규정된 이방인과의 원수관계를 철폐했습니다.
이상의 이 여섯 가지 반제에서 드러나는 중요한 사실은, 예수가 체제에 의해 규정된 소위 '죄'라는 것을 부정한다는 것입니다. 미워하는 것과 살인을 동일시하거나, 음욕을 품는 것과 간음을 동일시한다는 것은 법률(율법)적 규정의 효력범위를 벗어나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율법이 성립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가 율법에 의해 규정된 죄를 거부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이 반제들에서 분명히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이 반제들의 적극적인 의미는 무엇일까요? 반제들을 위한 해석의 실마리는 산상설교의 결론처럼 되어 있는 마태오복음 7장 12절의 황금률,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는 말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황금률을 실마리로 삼아 반제들을 이해하면, 예수의 결론은 '사랑하지 않는 것이 곧 죄다'라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안식일법에 관한 이야기를 생각해봅시다. 예수는 손이 오그라진 사람을 불쌍히 여겨 안식일에 그 손을 고쳐주었는데, 바리사이 체제의 율법주의에 얽매인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안식일법을 어겼다는 이유로 예수를 죽이려 했습니다. 배고픈 사람, 병 든 사람을 보고 측은히 여기는 것이 당연한 일이라고 여기는 예수의 입장에서 보면, 바리사이 체제적 율법주의에 사로잡혀 그 당연한 일을 가로막는 것이 바로 죄라는 것입니다.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예수는 사람을 대할 때 결코 그의 '죄'를 문제삼지 않았습니다. 예수가 오히려 심각하게 생각한 것은 신약성서의 표현들을 통해서 살펴볼 수 있습니다. 우선 카코스(kakos)와 포네로스(poneros)라는 단어를 생각해봅시다. 이 말들은 우리말 성서에서는 대체로 '악하다'라는 의미로 번역되어 있는데 원어에 보다 가까운 의미는 '병이 나거나 가난하거나 추방당해서 불행해진 상태'입니다. 또 하나 중요한 단어는 스칸달리조(scandalizo)입니다. 우리 말 성서에서 '죄짓게 한다'로 번역했는데, 이는 본래의 의미와는 좀 다릅니다. 이 단어는 '남을 넘어뜨린다, 함정에 빠뜨린다, 분노케 한다, 궁지에 몰아넣어 비참하게 만든다'는 등의 의미를 가진 말로 남을 어떤 불행한 상태에 빠뜨리거나 어떤 일을 본의 아니게 하도록 몰아넣는 행위를 뜻합니다. 이 단어들은 '악' 또는 '죄'와 같은 명사적 의미로 사용되는 경우가 거의 없고 주로 동사적 의미로 사용됩니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죄를 독립적 실체로 보고 있지 않다는 것과 사랑하려 해도 사랑할 수 없게 만드는 현실, 어떤 일을 하지 않으려 해도 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힘이 심각하게 문제 된다는 것입니다. 앞서 언급했던 '사탄'이란 말도 원래 독자적인 실체가 아니라 '입장이 다른 상대자' 또는 '고발하는 자'라는 의미의 상대적 실체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결국 '사탄', '카코스', '포네로스', '스칸달리조'라는 말들은 인간을 궁지에 몰아넣는 현실, 즉 구조악을 가리킨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이상의 내용을 간추려봅시다. 사탄의 지배를 받고 있는 이 세상은 구조악을 형성한 지배세력에 의하여 점점 더 죄 속으로 빠져들어가는 현실입니다. 악한 지배권을 제거하는 것, 따라서 죄에서 해방되는 것이 예수의 첫번째 과제입니다.
▶ 그렇게 말씀하시면 민중신학적 전제 아래서는 납득할 수 있겠지만 전통적인 죄론의 입장에서 보면 원죄의 문제를 너무 안이하게 처리하는 것이 아니냐는 질문이 나올 법한데요. 구조악 자체도 죄의 결과라는 주장에 대해 어떻게 말씀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