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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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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의 뿌리—공(公)의 사유화

소위 전통적인 죄론에서는 죄라는 것이 먼저 있고 그 죄가 세상에 들어음으로써 세상이 불행하게 되었다고 말하지요. 그런데 여기서 먼저 밝혀야 할 것은 성서에서 말하는 세상은 우주(cosmos)라는 의미의 세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서에서 세상은 윤리화된 사람의 세계, 제도화된 세계를 뜻합니다. 다시 말해서 사회적 관계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이와 같은 내용을 전제하고 전통적인 죄론을 생각해봅시다.

창세기에 인류의 타락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사람들은 옛날부터 이 '금단의 열매'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는 것이냐고 물어왔는데, 거기에 대해서는 엇갈린 대답들만이 있습니다. 그것은 성적인 것이라고도 하고, 인간의 한계성이라고도 했습니다. 그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이든간에 그것은 사유화(私有化)해서는 안 되는 것, 성서의 표현대로 말하자면 '하느님의 것'일 테고, 사회학적으로 말하자면 '공'(公)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공은 바로 사유화할 수 없는 것, 사유화해서는 안 되는 것을 말합니다. 하느님은 창조주입니다. 따라서 모든 것은 다 하느님께 속했습니다. 땅도, 하늘도, 바다도 그리고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이 다 하느님의 것입니다. 즉, 공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누구도 사유화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 하느님의 것을 사유화 또는 독점하는 것이 바로 죄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바로 하느님의 영역을 침범하는 것, 즉 공을 파괴하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아담이 바로 이것을 침범했습니다. 그 순간부터 낙원은 사라졌습니다. 이로써 생산물에 대한 사유와 독점경쟁이 생깁니다. 그것은 살인을 유발하고 전쟁의 원인이 됩니다.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는 이런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습니다. 네 것, 내 것의 싸움이 경계선을 만들게 되고 내 땅, 네 땅이라는 팻말을 박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점점 극단화되어 하늘도 그리고 바다마저도 네 영역, 내 영역으로 갈라놓는 일이 생겨나게 된 것입니다. KAL기가 소련의 영공에서 격추된 이야기는 우리 기억에 생생합니다. 그들의 영역을 침범했으니 사살할 권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유화는 성(sex)에 적용하면 정욕(epithumia)이 되고(로마 1, 24), 재산에 적용하면 물욕이 될 것입니다(마르 4, 9). 이 욕심이 "하느님을 알면서도 하느님을 하느님으로 높이지 않고 감사도 드리지 않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그들의 생각이 허황하여 그 분간 없는 마음이 어둠에 빠졌습니다"라고 한 바울로의 말(로마 1, 21) 그대로의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즉, 공(公)과 사(私)를 구분하지 못하는 결과에 빠져들었다는 말입니다.

사유욕은 결코 물질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권력에도 적용됩니다. 성서에서 하느님을 왕(王)이라는 말로 표현한 것은, 고대에는 모든 주권이 왕에게 있었기 때문입니다. 대지(大地)는 모두 왕의 것이었고, 그것은 곧 전권(全權)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이 권력을 사유화함으로써 재산의 독점화는 물론 신분계급이 생겼고, 사람마저도 사유화하는 노예제도가 생겨났습니다. 세상의 악이란 모두 권력의 남용으로 이루어지는데, 그것은 바로 공권(公權)의 사유화를 의미합니다.

바울로는 모든 권리(exousia)는 하느님께 속한 것인데, 하느님이 그 권리를 사람들에게 의탁했다고 합니다. 이러한 독점욕이 개인의 것이라고 생각되는 것을 보존하기 위해 제도적인 악을 자행하게 합니다. 이에 아부하거나 저항하는 데서 인간은 갈리고 또 다투게 되며, 더 나아가 전쟁까지도 초래하게 됩니다. 전쟁은 큰 강도이고 남의 집 물건을 훔치는 자는 작은 도적인데, 작은 도적은 처형되고 전쟁에 대해서는 누구도 비판하지 못하게 금합니다. 아직까지 전쟁에 대한 신학적 공론(公論)이 정립되지 않은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그것의 죄악성을 몰라서입니까? 아닙니다. 결국 칼 가진 자들에게 기생해서 살고 있기 때문이고 또 그들이 무서워서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같은 구조 안에서는 민중이라고 해서 무죄 한 것은 아닙니다. 민중도 소유를 삶의 제1원리로 하는 사회 속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삶에서 추구하는 바가 가진 자들의 그것과 같은 것일 수 있습니다. 그들이 선망하는 최고의 가치가 바로 독점자, 권력자 들일 수 있습니다. 이런 뜻에서 모든 인간이 죄 아래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자본주의체제는 바로 이 사유욕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유하지 않고는 살 수 없도록 되어 있고, 그러므로 누구나 사유욕의 노예가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모든 사람이 죄 아래 있다는 말이 여전히 타당성이 있습니다.

끝으로 제기될 수 있는 물음은 '이같은 죄의 현실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앞에서 말한 대로 마르크스는 사회구조를 변혁시키면 된다고 했고, 예수는 사탄이 지배하는 현실, 즉 유다교 체제의 구조악을 타파하는 데 초점을 맞췄습니다. 그러나 그런 현실의 궁극적 극복은, 전통적인 표현을 빌려 말하자면, 하느님의 주권에 의해서만 가능하다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런데 하느님만이 죄의 현실을 궁극적으로 극복할 수 있다고 하면 다시 전통적인 이원론(하느님의 현실 대 인간의 현실)에 빠질 염려가 있으므로 그것을 현대적인 언어로 바꿀 필요가 있습니다. 즉, '하느님에 의해서만'이라는 말은 '자기를 비운다'는 말로 바꿀 수 있습니다. 구체적인 죄의 현실에서 인간이할 수 있는 노력을 다하되, 인간의 노력만으로 모든 것을 완결지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말고 궁극적으로는 전혀 새로운 현실을 향하여 그 가능성을 열어두어야 합니다.

끝으로 처음 제시한 세 가지 사례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의 문제를 생각해봅시다. 마지막 사례에서는 그 주인공을 무능력자로 규정하는데, 그것은 그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세 가지 이야기의 주인공 모두를 그렇게 규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윤락가로 빠진 여인들도 다른 길을 개척할 힘이 없기 때문에 그 길로 들어선 것입니다. 거기에서 제시된 통계를 보면 단순히 허영심 때문에 그 길에 들어선 이들이 많은 수를 차지하고 있으나 이 통계 자체가 믿을 만한 것이 못 됩니다. 응답자가 허영심이라고 대답했을 때, 구체적으로 허영심을 어떻게 이해했는지 불투명합니다. 그것은 지금까지 체험해 왔던 삶에 대한 좌절감 내지는 절망감으로부터 그렇지 않은 상태로 비약해보고 싶다는 몸부림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대로 나아가면 경제적으로나 혹은 계층적으로 앞길이 뻔하다고 생각되는 경우 또는 비록 의적 조건이 남 보기에는 좋은 듯하나 본인은 부모가 만들고 있는 가정환경에 환멸을 느끼거나 질식할 것 같은 불안을 안고 있을 때 거기서 탈출하는 방법으로 그런 길을 선택했을 수도 있습니다.

첫번째 사례는 세 번째 사례와 별로 다르지 않은 '무능한' 사람입니다. 삶의 출발부터 모든 조건들이 그를 압박했고 거기서 탈출하려고 했지만 무임승차로 서울행을 하는 것 외에는 다른 방도를 갖지 못 한 것입니다. 뒤밀이, 지게꾼, 머슴살이 이상의 것을 그는 할 수 없었습니다. 오죽 한계를 느꼈으면 투신자살을 시도했겠습니까? 그런데 무능이라는 말은 무엇입니까? 기존질서에 적응할 능력이 없다는 말 아닙니까? 저들을 무능하다고 하기 전에 저들로 하여금 무능할 수밖에 없게 만든 사회구조에 대한 비판이 앞서야 하지 않겠습니까? '힘이 곧 진리'라는 말은 어떤 한 사람이 한 말이거나 어느 시대에만 타당했던 것이 아니라 오늘도 엄연히 현존하는 사실입니다. 기존체제는 그 성격상 가진 자와 권력자 지향적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얼마나 가졌느냐 자체가 가치기준이고, 그 소유가 어떤 과정을 거쳐 이루어졌느냐에 대해서는 묻지 않습니다. 또한 모두가 이것을 유일한 가치로 알고 그곳을 향하여 달리도록 되어 있습니다. 거기에서 낙오되면 무능한 자로 낙인 찍힙니다. 이렇게 무능한 자가 된 다음에는 계속 저 유능한 자들에게 짓밟히며 살거나, 아니면 생존 하기 위해서 몸을 팔거나 도둑질을 하거나 자해하는 길밖에는 없습니다. 이런 것들을 '반윤리적'이라고 규정하고 있지만, 조금 각도를 달리해서 '반체제적'이라고 이해하면 저들에 대한 평가는 달라질 것입니다. 윤리란 기존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울타리가 아닙니까? 가령 도둑질을 하다가 잡혀 감옥에 갑니다. 그런데 그는 큰 도둑놈이 가진 것 중의 극히 작은 것을 도둑질하다가 바로 큰 도둑들의 손에 잡혀서 그들에게 정죄를 받는다고 생각해봅시다. 그래도 저들을 죄인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함석헌 선생이 로댕의 「늙은 창기」라는 조각을 보고 처음에는 상식적인 일반 윤리로, 나아가서는 그리스도교에서 제공받은 안목으로 그 여인을 저주합니다. 젊은 날에 그 육체의 아름다움으로 뭇남자들을 유혹했던 탕녀! 그러나 이런 결론을 안고 돌아서는 그를 이 '늙은 창기'는 놓아주지 않습니다. 누가이 여인을 저렇게 만들었나?이 여인을 저렇게 만들어버린 사내들은 여전히 사회의 각계각층에서 모범인으로 군림할 것이 아닌가! 이렇게 볼 때 이 '늙은 창기'는 저주의 상징이 아니라 기존질서에 대한 고발이 된 것입니다.

이 세 경우에 또 하나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기지촌의 여인들이 만든 민들레회의 이야기는 나에게서 나와서 너에게로 향하는 아름다운 마음의 구체적 표현입니다. 이것만이 아닐 것입니다. 저들 중에는 육체를 팔아 번 돈으로 자기 가족을 부양하는 사람들도 많다고 들었습니다. 우리는 자수성가한 사람들의 입에서, 남을 돕는 일에 참여하는 것을 거절하는 논리로'이 돈이 어떤 돈인데!'라는 말을 듣습니다. 그것은 애써 벌었다는 뜻입니다. 이런 윤락여성들이야말로 그 누구보다도 이 소리를 하늘 높이 지를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 돈이 어떤 돈입니까? 몸을 판 돈이 아닙니까? 이 돈으로 저들은 가족이나 남을 돕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가진 자의 적선과는 질적으로 다른, 몸으로 드리는 산 제사일 수 있습니다. 살인죄로 무기징역을 살고 있는 그 사람의 경우도 이런 선한 면을 볼 수 있습니다. 이미 세상에서 살인자로 저주를 받고 있는데 그는 가진 것을 남에게 줄 수 있는 열린 마음을 그대로 지니고 있습니다. 특별히 그의 살인동기는 주목할 만합니다. 그는 술집 아가씨를 사랑하게 된 것입니다. 그는 그 아가씨를 돕기 위해서 도둑질을 한 것입니다. 돕는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는 모릅니다. 그 여인의 꾐이었을 수도 있고 그 여인을 그런 상황에서 탈출시키려는 결의였을 수도 있습니다. 어느 것이든 그에게 있어서는 순수한 사랑이 동기입니다. 그 사랑은 남의 물건을 훔치는 모험을 해야 할 만큼 진지한 것이었습니다. 살인까지 하게 된 것은 그의 본의가 아닙니다.

세 번째 경우의 사람을 이중인격자라고 규정했습니다. 그런데 정말 그렇게 규정해야 할까요? 그보다는 그가 선과 악 사이, 사랑과 증오 사이를 넘나든다고 보면 안 되겠습니까? 그의 행위는 정말 가식이었겠습니까? 금식하고 아스피린으로 망각해보려는 애씀, 유리조각으로 온몸을 자해하는 행위 등을 계속하는 이 사람에게 위선이 무슨 필요가 있을까요? 나는 그 행위를 드라마적이라고 보지 않습니다. 또한 그의 회심의 경험이나 노력을 위선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그에게도 그를 위선이라고 규정하는 사람들이 가진 조건이 주어진다면 극적인 변화를 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고 봅니다.

이 세 사람을 바리사이파들의 법정에 세워보고, 또 예수에게 데려 가보면 너무도 뚜렷한 서로 다른 시각이 드러납니다. 한마디로 예수는 그런 이들을 죄인이라고 부르기보다는 오히려 그들을 죄인으로 고발하는 자들을 규탄할 것입니다. 그리고 저들을 향해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이라 할 것이며, 그들과 자신을 일치시킬 것입니다. 그들이 잘못되기 이전에 기존체제가 잘못되었습니다. 저들이 범죄를 했다면 그것은 그들이 그렇게 하도록 기존체제가 만든 것입니다. 나도 옥중에서 저들과 함께 지내는 동안에 '내가 얼마나 기존체제 안에서 특권을 누리고 있었는가!' 하는 것을 인식할 수 있었고, 민중의 실상을 여러 각도에서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광주사건 때 이른바 윤락여성들의 선전(善戰)에 대한 전설과 같은 이야기를 알고 있습니다.

서남동 교수가 "죄란 지배자의 언어이고 민중에 있어서는 그것이 바로 한(恨)"이라고 했는데, 이것은 참 예리한 인식이라고 생각합니다. 세상이 죄인이라고 규정한 저들의 삶 자체가 한의 덩어리요, 저들의 한을 죄로 규정하는 것이 한을 더하게 하는 것입니다. 저들은 약자들이니까 세상에서 소외된 채 묵묵히 모든 책임을 자기 등에 짊어지고 있으며, 세상의 규정을 그대로 받아 창기, 전과자, 살인자라는 콤플렉스에 빠져 있습니다. 그 콤플렉스가 저들을 절망에까지 몰고 갑니다. 저들은 언제나 햇빛을 피하여 그늘에 사는 인생입니다. 저들은 세상의 저주가 수렁이 되어 그 속에 붙잡힌 바 되어 꼼짝 못하고 점점 더 깊이 빠져들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그들의 죄를 규탄하는 설교는 수렁에 빠져 있는 사람의 머리를 발로 밟아 누르는 행위 이상 아무것도 아닙니다. 저들을 구하는 길은 죄로부터의 해방이 아니라 죄의 '콤플렉스'에서의 해방이요, 이것이 저들에게 일차적으로 던져져야 할 구명(救命)의 밧줄입니다. 그와 동시에 저들을 죄인으로 만든 세상의 구조를 분명히 인식하게 하고 바로 그 세계의 체제를 변혁하겠다는 결의로 전환하게 되면, 이른바 죄인의 반열에서 떠나 세계구원의 주체가 되는 민중대열에 서게 되는 사건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List of Articles
    요한과 루가는?
    사탄은 구조악이다
    죄의 뿌리 一 공(公)의 사유화
민중해방과 성령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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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 나라一민중의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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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건으로서의 부활
    현존하는 부활사건
   
판권
표지
증보판에 부치는 말
머리말
       
제1부 고전(古典)으로서의 성서
       
제1장 고전의 의미
    1. 인류와 고전
    2. 현대인과 고전
제2장 성서의 특성
제3장 성서를 보는 눈
제4장 성서에서 보여주는 역사의 주체
제5장 성서의 자료와 편집
       
제2부 약속을 믿고 산 민족사 : 구약
       
제1장 한 책의 민족 이스라엘
제2장 인간사 서장
    1. 창조된 세계와 인간(아담)
    2. 잘못 출발된 역사
제3장 도상의 나그네
    1. 족장들
    2. 탈출의 족장 : 아브라함
    3. 하느님과 겨룬 사나이一야곱
제4장 엑소더스
    1. 히브리
    2. 모세
    3. 하느님과의 계약
    4. 십계명
제5장 종족공동체의 형성
    1. 가나안 정착
    2. 이스라엘 종족동맹
    3. 판관들
        1) 판관 삼손(판관 13~16장)
        2) 판관 기드온(판관 6~8장)
제6장 왕국시대
    1. 왕권과 국가
    2. 다윗왕조
    3. 왕국시대
        1) 솔로몬 왕
        2) 분단 200년
제7장 예언자
    1. 예언자의 현장
    2. 찬양과 저주一나단
    3. 왕권과의 대결자一엘리야
    4. 종교보다 정의를一아모스
    5. 남은 무리 一이사야
    6. 심판과 새 가능성 一예레미야
    7. 해골의 부활一에제키엘
    8. 너 위한 수난一이름없는 예언자
    9. 예언자의 말의 성격
    10. 과거, 현재, 미래
   
제3부 새로운 개벽 : 신약
   
제1장 예수의 사건
    1. 예수의 시대상
    2. 역사와 해석자
    3. 예수의 선포
        1 ) 하느님 나라의 초대
        2) 낡은 질서와의 대결
    4. 예수의 행태
        1) 무슨 권위로
        2) 예수와 민중
    5. 십자가 처형
    6. 갈릴래아에서 만나자一부활사건
제2장 예수운동의 전진(사도행전)
    1. 예루살렘에서의 예수의 민중운동
    2. 이스라엘 민중운동의 목표와 사상
    3. 민중사실
제3장 바울로의 삶과 증언
    1. 그의 삶
        1) 바울로의 위치
        2) 민중사건에 항복한 사울
        3) 바울로의 연대기
    2. 바울로의 증언
        1) 인간세계 심판
        2) 사람됨의 조건
        3) 죽음에서의 탈출
    3. 그리스도와 역사
    4. 자유인의 길
        1) 앞을 향해 달리는 삶(필립 13,1~14)
        2) 하느님 앞에 선 존재 (갈라 4, 1~10)
        3) 이웃과 더불어의 존재
    5. 바울로의 민중론
        1) 고린토교회의 사회계층
        2) 민중을 보는 바울로의 눈
        3) 택함을 받은 민중
    6. 바울로의 수난기
        1)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
        2) 예루살렘에서
        3) 문제점들
        4) 바울로는 ‘정치범’이 아닌가
        5) 예수의 수난사와 바울로의 수난기
제4장 요한의 증언
    1. 요한복음의 특이성
        1) 공관서와의 관계
        2) 요한의 정신적 풍토
        3) 예수의 새 해석
    2. 개벽의 선언
    3. 갈림길
제5장 박해와 희망(계시록의 신앙)
    1. 묵시문학의 성격
    2. 로마제국과의 대결
    3. 결단할 때
    4. 영원의 노크
    5. 마라나타
한국어로 된 성서 연구 참고문헌
전집간행에 부치는 말
판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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