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교회사적으로 볼 때 성령론은 A.D. 4세기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논의되어 한편으로는 삼위일체론적으로 이해된 소위 정통적 성령론이 형성되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에 대해 반대하는 운동이 계속되었는데 가령 몬타니즘(Montanism), 중세기의 탁발승운동, 요아킴 데 플로리스(Joachim de Floris)의 역사신학, 종교개혁기의 토마스 뮌처에 의한 농민전쟁에서 성령이해가 절대적 역할을 했습니다. 교회사에 나타난 이같은 성령이해에 대한 선생님의 견해부터 듣고 싶군요.
사람에게는 두 가지 상반되는 욕구가 있습니다. 그 하나는 안정입니다. 안정은 어떤 보장을 요구합니다. 그 보장이 결국 질서요, 질서는 체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안정의 요구는 어떤 체제 속에 안주하자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이에 반해서 또 하나는 자유에 대한 갈망입니다. 사람은 끝없이 매인 데서 자유 하려고 합니다. 이 자유의 욕구는 필연적으로 기존의 질서나 체제 즉 나를 구속하는 것에 대한 저항으로 나타납니다. 이것은 사람이 땅에 주저앉으려는 육체를 뒤집어 쓰고 있으면서도 무한에까지 날으려는 자유의 정신을 지닌 존재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일반 역사에서도 안정을 요구하는 시대가 확고한 체제로 군림할 때, 그곳에서 탈출하려는 자유의지가 쌓이고 쌓여 드디어는 개혁운동이나 혁명운동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교회사에서도 이 원칙이 그대로 반영되는 것으로 봅니다.
질문에서 몇 가지 경우들을 예로 들었는데, 그 어느 경우도 경직화에 대한 반동으로 일어난 성령운동이었습니다. 몬타누스는 2세기 중엽 이후에 나타난 사람으로, 이 몬타누스를 중심으로 한 운동은 터툴리안(Tertullian)까지도 그것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을 만큼 영향력이 컸습니다. 그것은 벌써 그리스도교가 경전화(經典化)되고 사도 전통이라는 것을 강력히 내세워 교권이 제도화되었음을 반증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그리스도교가 역사 속에 정착하고 자기보존을 위해 보수화되었다는 말입니다.
이에 대해서 몬타누스가 성령과 종말론을 들고 일어난 것은 결코 우발적이 아닙니다. 그는 성령의 운동이 제도적 교회에 의해서 억압 되었다고 주장했습니다. 성령은 현재적 경험이어야지 과거적인 것일 수는 없습니다. 제도화된 교회가 초대 그리스도인들이 경험했던 성령의 결과로 탄생한 것이 '교회'라고 봄으로써 성령의 현재적 의미를 사실상 압살한 데 대해서, 몬타누스는 초대 그리스도인들이 경험했던 그 경험을 지금도 경험할 수 있게 하는 것이 바로 '성령'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이런 주장으로 그는 교회의 경전확립에 도전했으며, 계층구조적 체제가 되어버린 교회에 저항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이러한 것들이 바로 하느님의 현재적 계시의 가능성을 차단하고 있다고 본 것입니다. 또 한걸음 더 나아가서 이 입장에서 그는 동시에 종말론을 강조함으로써 기존의 모든 것을 상대화시켜버린 것입니다. 다른 차원에서 말하면 이것은 자유 희구의 발로라고 하겠습니다.
요아킴 데 플로리스가 출현했을 때는 어거스틴에 의해 교회의 지위가 확고하게 정립되었을 때입니다. 어거스틴은 교회의 시대를 천년왕국의 시대로 보고, 교회 성례전을 통해서 그리스도는 현재적으로 지배한다고 하며, 교권적 질서를 그리스도의 지배와 일치시켰습니다. 이러한 때에 요아킴은 이에 반기를 들고 일어선 것입니다. 그는 역사를 하느님의 시대, 아들의 시대, 성령의 시대로 구분했습니다. 이 구분의 배후에는 그의 특유한 역사관이 작용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 세 시대의 구분을 종교교리적 차원에서만 보지 않고 사회사적 시각에서 이를 뒷받침합니다.
가령 첫째 시대인 아버지의 시대는 사람의 자유의지를 제약하며, '특히 노동을 강요하는 봉건시대'로 규정했고, 이것을 종교사적으로는 율법시대에 해당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둘째 시대는 사회사적으로 보아 계층시대인데, 이 시대에 교회를 지배하는 사제층이 그 사회를 규정하는 상부구조를 이루고 있는 때라고 봅니다. 이때를 그는 율법주의를 지양하는 신앙의 시대, 다른 말로 하면 타율적으로 존재하는 시대라고 했는데 그 뜻은 사제들에 의해서 제공되는 성례전에 참여함으로써 아무 업적 없이 신의 은총에 참여한다는 것입니다. 셋째 단계 즉 성령의 단계는 자유, 곧 자율의 시대라고 합니다. 자율은 그 원뜻이 그 자체 안에 질서를 가졌다는 것으로 그것이 이루어지는 현장에서는 어떤 외적인 권위도 필요없게 되며, 어떤 매개적 역할도 거부됩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시대는 바로 현재에 역점을 둔 것이기 때문에 이것은 과거적인 것, 국가권력, 교회질서, 나아가서는 그리스도교의 전통과 정경(正經)의 권위마저도 상대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게 됩니다.
요아킴은 진리는 동적(動的)인 것이지 정적(靜的)인 것은 아니며 따라서 진리는 상황에 따라 변한다는 입장이기 때문에 기존교회에 대한 비판 내지 거부에 분명한 거점을 마련한 것입니다. 그도 몬타누스와 마찬가지로 이같은 성령론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종말론을 내세우는데, 특이한 것은 이 제3시대를 구체적으로 수도원시대와 결부시킴으로써 종말론을 구체화했습니다. 그것은 수도원생활의 철저화로 인간역사는 결국 끝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의 이같은 주장은 물론 정통교회에 의해서 철저하게 분쇄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영향은 내면적으로 계속 퍼져 프란체스코 수도회에 큰 영향을 끼쳤으며, 많은 종파들에게 신학적 근거를 제공했고, 사회주의운동에까지도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