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에, 전통적인 성령이해는 변증적 필요에서 많은 우여곡절을 겪어왔습니다. 특별히 그리스도교는 자체의 신학과 교리를 정립함에 있어서 언제나 희랍철학을 의식했는데, 거기에서 크게 부각된 것은 이른바 인격(persona)이라는 개념입니다. 하느님을 페르조나로 파악함으로써 이데아, 세계성립의 제1원리 등과 같은 희랍적인 발상과 다르다는 점을 밝히려고 했는데, 성령도 희랍의 모든 관념론적 규범의 핵심인 프뉴마(pneuma)와 구별하기 위하여 페르조나로 파악하려는 노력이 계속되어왔습니다. 이러한 변증적인 노력이 그리스도교의 또 다른 주장, 즉 유일신론과 상충되기 때문에 그 논의는 종교개혁 이후에까지 계속 혼선을 빚어왔습니다. 그런 것 중에 이른바 삼위 일체론이 A.D. 4세기 이후에 등장했는데, 이것이 상당한 우여곡절을 겪고 물의를 빚은 것도 바로 페르조나라는 개념을 계속 고수하려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현재까지도 성령이해는 혼선을 빚고 있습니다. 성령을 페르조나로 파악함으로써 독자성을 부여하게 되는데, 이렇게 되면 자칫 다신론에 빠지는 위험이 있기 때문에 하느님과 그리스도 사이에서 성령의 역할이 여러 가지로 모호하게 설명되어온 것입니다. 또한 성령을 페르조나로 파악함으로써 어쩔 수 없이 성령이 활동할 영역을 제한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범신론이나 물활론(Animism) 따위를 극복하려고 했는데, 그 결과 성령의 역사를 자연의 모든 현상과 단절시키게 되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역사와의 관계에서도 문제가 되었습니다. 역사 자체내에서의 성령운동을 페르조나로 파악할 경우에는 자동적으로 그 영역에 한계가 그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사실상 교리사에서 자연과의 관계는 설명되지 않았으며, 성령과 역사 일반에 대한 관계도 규명 되지 않았습니다. 이리하여 성령론은 마침내 이원론적인 사고 속에 그 자리를 고정시키게 되었습니다. 하느님과 그리스도의 관계를 이어주는 기능으로서의 성령, 하느님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계시한 말씀을 현실화하는 힘으로서의 성령이라는 역동적 사고는 마침내 제도적 교회에 의해 위축되고 또한 그로써 성령의 활동영역이 제한됨으로써 성령은 단지 하느님의 말씀인 성서를 사람에게 전달하는 기능, 또는 일반적 물질인 떡과 포도주를 예수의 살과 피로 변화시켜 사람에게 전달하는 기능 등으로 그 영역이 제한되어갔습니다. 한마디로 오늘날까지 성령은 그 독자적인 위치로서의 페르조나성이 제대로 정립되지 않은 채로인 것입니다.
이와 같이 제도교회는 성령을 페르조나로 파악함으로써 삼위일체론을 수용하게 되었지만, 그것도 제대로 이해할 수 있게 해명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저들은 페르조나를 '인디비디움'(individium)으로 파악했습니다. 신(神)도, 성령도, 아들도 '인디비디움'입니다. 그러므로 다신론에 빠질 위험이 있었던 것이지요.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삼위일체론을 내세웠으나, 그것으로 오히려 혼란만 일으키게 되었던 것입니다.
또 하나 지적해야 할 것은, 성령론의 논쟁에서 이단으로 몰린 한 맥(脈)은 성령운동과 역사적 사건을 결부시킨 데 반해서, 어떤 힘을 이용해서든지 그리스도교의 주류로 자처한 이른바 정통파의 성령관은 이원론(二元論)에 빠지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육에 대한 영, 물질에 대한 영, 악마가 지배하는 세계에 대해 영이 지배하는 세계 등이 바로 그런 이원론의 내용이었습니다. 그 결과로 성령이 점차 교회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즉 성서를 이해하게 하는 힘으로서의 영, 떡과 포도주 즉 물질을 나누는 만찬을 성례전화하게 하는 영 등등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영에 국한된 것이 아니고, 신관(神觀)과 그리스도론과도 연계된 것입니다.
▶ 그러면 선생님께서는 제도교회의 그러한 성령이해가 성서와 전혀 무관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우리말로 '영' 혹은 '성령'으로 번역된 희랍어의 '프뉴마'는 신약성서에서는 바울로가 맨 먼저 사용했는데, 그가 이 말을 어떤 의미로 사용했는지가 우선 문제입니다. 이 말은 그가 구약의 '루아하'나 '네페쉬'를 프뉴마로 번역한 것안지, 아니면 헬레니즘 세계에서 '살크스'(sarks)나 물질과 상반된 개념으로 사용했던 '프뉴마'를 의미했는지가 우선 문제입니다. 나는 일단 바울로가 이 두 전통을 동시에 염두에 두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70인역에서는 루아하를 프뉴마로 번역했습니다. 그러므로 70인역에 정통한 바울로가 프뉴마를 사용할 때 루아하를 생각했을 확률이 큽니다. 그러나 그는 헬레니즘 영역에 살았으며 또 그레꼬 로마 영역을 자신의 선교의 장으로 하여 그리스도교를 변증하는 것을 그의 삶의 전목표로 삼았기 때문에 헬레니즘적 프뉴마 이해를 무시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구약에서 '루아하'나 '네페쉬'로 표현된 경우 '인디비디움으로서의 인격'이라는 관념은 전혀 없다는 점입니다. 루아하 또는 그런 의미에서의 프뉴마는 한마디로 말한다면 어떤 구체적인 힘의 실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동양의 개념으로 옮긴다면 '영'(靈)보다는 오히려 '기'(氣)가 적당할 것입니다. 우리말로 프뉴마를 '영'으로 옮길 때에는 물(物) 또는 육(肉)의 상반된 개념으로 이해된 프뉴마를 전제한 것입니다. 그러나 '기'라는 것은 이원론적 개념이 아닙니다. 또 그것은 인격으로 파악될 수도 없습니다. 프뉴마의 본래 의미가 '루아하'와 마찬가지로 힘, 숨 또는 바람이라는 뜻으로 통용된다고 할 때, 그것은 오히려 기에 가까운 것으로 파악될 수 있습니다.
바울로문서에 보면 '하느님의 프뉴마', '그리스도의 프뉴마'와 함께 '사람의 프뉴마'라는 말도 나옵니다. 희랍어 원문에는 없는데도 우리말 번역에서 '영'(靈) 앞에 '성'(聖)이라는 말을 붙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니까 하느님의 힘, 사람의 힘이라고 할 수 있듯이 우리말의 '기운'이라는 뜻입니다. '루아하'가 하느님의 기운으로서 세계창조와 그 운행의 원동력을 나타내고 있듯이, '프뉴마'도 교회와 같은 일정한 곳에 국한된 것이 아니고 세계 또는 역사 전체에 작용하는 힘입니다. 따라서 성령에 대한 이원론적 파악은 불가능하며 하느님과 독립된 인격으로서 파악하는 것도 무의미한 일입니다.
▶ 선생님의 말씀처럼 성령이 그렇게 이해될 수 있다면 성령과 자연, 성령과 역사의 관계, 또는 성령과 인간집단의 관계가 훨씬 쉽게 이해됩니다. 이 점에 대해 좀더 자세히 말씀해주십시오.
하느님의 기운(pneuma)은 자연에도, 역사에도, 개개인이 처한 상황에도 예외 없이 뻗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하느님의 활동무대는 아무런 제한도 없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세계의 창조주라고 고백한다든지, 성령이 충만하다고 말할 때 하느님의 한계를 그을 수도 없고, 또 그어서도 안 될 것입니다. 서구인들이 다른 종교에 대해서 그리스도교의 특수성을 고수하기 위하여 범신론적 사고를 경계하였으나 그것은 무의미한, 아니 우리 이해를 방해하기까지 하는 폐쇄적인 사고입니다. 성서에는 그와 같은 폐쇄성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