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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의 저항—물(物)이 되신 하느님

육(肉 살크스)이란 말은 희랍시대부터 70인역으로 쭉 내려오면서 내내 가장 천하고 더러운 것으로 경멸되던 말이었습니다. 오클로스나 갈릴래아란 말이나 마찬가지로 말입니다. 요한은 그런 과격한 언어를 써서 복음을 설명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심각한 상황에 있었던 것이 틀림없어요.

요한 기자는 여기서 두 가지를 분명하게 전제합니다. '유다교의 시대는 끝났다.' 이것이 중요한 테마의 하나지요. 그러므로 성전숙청을 맨 먼저 했고,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술이 다 떨어진 다음에 새 술을 낸 것도 '유다시대는 지나갔다, 이제는 새 시대다!'라는 선언에 다름아니거든요. 또 니고데모와의 대화에서도, "네가 유다의 라삐이면서 그것도 모르느냐? 너는 다시 나야 한다!"라고 했는데 이 '다시 나야 한다'는 말은 유다교가 주장하는 토라에 의해서, 즉 모세의 법에 의해서 구원받는다는 데 대한 신랄한 도전입니다. 유다교 전체를 거부하는 거지요. 사실 예수의 행동 하나하나가 유다교에 대한 거부였습니다. 이런 거부를 요한은 가장 철저하게 한 사람입니다. "너희들의 시대는 끝났다. 볼장 다 봤다!" 이것은 무서운 선언입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기자는 이 선언을 어느 때에 했습니까? 바리사이파의 세력이 한창 강력해서 기세가 등등했던 때에 이 선언을 했던 것입니다. 성전은 무너졌고, 유다교는 성전종교에서 교리의 종교로 화석화되어가고 있었고, 예수의 사건은 이미 초기 가톨릭화 과정에서 비역사화되고 신비화되어가던 그 시대에 요한은 이에 반기를 들고 바로 저 뜻깊은 문서 요한복음을 기록했던 것입니다. "예수는 생명의 떡이다. 예수는 세상의 빛이다. 예수는 생명의 물이다. 부활이요 생명이다……" 등등 요한 기자는 할 수 있는 한 가장 아름다운 상징을 총동원해서 예수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요한은 "예수는 생명의 떡이다"라고 말하기 전에 반드시 5천 명을 먹인 얘기를 먼저 하거든요. "예수는 생명수다"라고 할 때도 그 앞에 예수가 사마리아 여인에게 "목이 마르다. 물을 좀 달라"고 한 실제의 얘기를 연결시킵니다. "예수는 빛이다"라는 말도 실제로 예수가 소경을 눈뜨게 한 사건을 얘기하고, 그 다음에 나와요. "예수는 생명이다"라고 할 때도 죽은 라자로를 살리는 얘기와 결부시킵니다. 이렇게 하는 의도는 명백합니다.

예수의 말이 추상적인 것이 아니고 현재 여기서 일어나고 있는 사건이라는 것, '떡이다' '빛이다' '생명이다' 했을 때 이것이 단순한 말이 아니고 눈앞의 현실이라는 것을 생생하게 증언하자는 것입니다. 예수가 내 살을 먹으라할 때 관념추상적으로 말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배고픈 군중을 먹인 다음에 '그렇게 내 살을 먹으라!'라고 함으로써 '인카네이션'(incarnation, 化肉)의 의미를 누구보다도 강력하게 내세운 것이 요한입니다. 그러니까 말씀이 육이 되었다는 건 하느님이 물(物)이 됐다는, 즉 하느님을 땅으로, 물의 세계로 끌어내리는 것이지요. 가톨리시즘은 거꾸로 하늘로 올라가버린 신을 말하는 데 대해서 요한은 물(物)이 되신 하느님을 내세움으로써 비역사화, 추상화, 관념화에 저항했습니다. 이런 점에서 요한복음의 의미와 중요성은 우리가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 요한은 실현된 종말, 즉 하느님의 현재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 요한복음에 대한 그런 새로운 평가는 너무 새로워서 어리둥절해질 지경이로군요. 과문한 탓인지는 몰라도 지금까지 우리가 요한복음에 대해서 들어온 얘기는 선생님 말씀하고는 정반대거든요. 공관복음서 가지고는 충족이 안 되는 풍부한 영적 세계를 요한복음이 제공해준다는 것이고 또 그것이 요한 기자의 공헌이라는 것이 통설이었는데요. 세계 신약학계에서 선생님말고 다른 학자 가운데 그렇게 보는 사람이 또 없습니까? 요한복음 연구의 최근 동향에서도요.

난 들어보지 못했어요. 일본 동경대학의 아라이 사사쿠(荒井獻) 교수가 얼마 전에 내게 책을 한 권 보내면서 세계적인 작품이 나왔다고 칭찬을 했어요. 그의 제자인 오오누키 다카시(大貫 隆)이라는 소장학자의 요한복음 연구서로서 『세상의 빛』(世の光)이라는 제목의 책이었는데, 읽어보니까 나와는 정반대 방향이더군요. 예수를 최고의 '신적 존재'로 그려놓았어요. 사회학적 접근을 시도했다고 하면서도 결론은 그렇게 가고 있어요. 일본 신학계의 분위기가 그러니까요.

▶ 선생님께서 요한복음을 재해석하시는 중심 범주는 역시 '물'(Materie)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렇지요. 요한은 지극히 현실적인 하느님, 구체적으로 병을 고치고 배고픈 자를 먹이고 죽은 자를 살려내는 하느님을 증언했습니다. 하느님이 일하신다, '노동'이라는 언어를 쓸 수 있을지는 몰라도 아니 쓸 수 있겠지요, 노동하시는 하느님입니다. 창조하시는 하느님은 노동하는 하느님이시니까! 노동은 육체로 하는 거지요. 저 높은 하늘 위에서 하는 것이 아니라 땅에서, 세상의 저 밑바닥 민중현장에서 하지요. "지금 뭐가 일어나고 있는지 보라. 눈먼 자가 눈을 뜬다. 앉은뱅이가 걷는다. 주린 자가 배부르게 먹는다. 즉 물적(物的)인 사건이 일어나고 있다. 여기 이 사건 자체에서 하느님 나라의 현실을 보라." 이것이 예수의 말이었습니다.

내가 자주 하는 얘기인데, 요한복음에는 성만찬 기사가 나오지 않습니다. 그 대신에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는 이른바 세족례(洗足禮)로 대신하고 있어요. 여기서 예수는 종의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이것도 나의 눈에는 '유카리스트'(Eucharist, 성만찬)로 제도화 내지 고정화되어가는 교회에 대한 도전으로 보여요. 유카리스트가 그리스도론적 설명으로 끝나버림으로써 비물화(非物化)되는 것에 대한 저항이지요. 성만찬 기사는 나오지 않지만 "나는 생명의 떡이니 이 떡을 받아 먹으라"고 한 기사는 나와요. 그런데 그것은 복음서의 마지막 부분에 나오지 않고 5천 명을 먹인 기사 바로 다음에 나옵니다. 즉, 종교예식으로 변질한 유카리스트에 저항하기 위해 6장의 민중현장으로 끌고 들어온 것입니다. 그렇게 한 의도는 유카리스트의 본질이 '나눔'에 있지, 무슨 그리스도론적 구원에 있지 않다는 구체적 항변에 있어요.

난 적어도 그렇게 봅니다. 사실 공관서에 나타난 유카리스트의 정신이 다름 아닌 공동체의 '나눔'이었거든요. 예수는 제자들과 식사를 같이 하시면서 이 떡과 포도주가 곧 나의 살과 피다, 이것을 나누어 먹으라고 했던 것이지요. 여기에서 사랑의 식사와 유카리스트가 결합되어 새크러먼트화하는 길이 열리게 되었지만, 그 본질은 나눔에 있다는 것을 강조한 흔적은 공관복음서에도 남아 있어요. 이것을 요한은 5천 명이 나누어 먹은 사건과 곧바로 연결시킴으로써 유카리스트를 재해석해서 그 원형으로, 즉 본질로 돌려놓았다, 나는 이렇게 봅니다. 사실 예수의 삶이 그것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이 '나눔'의 관점에서 하느님 나라가 무엇인가를 다시 물어봐야 합니다.

루가는 하느님 나라가 실제로 무엇인가? 그것은 공(公)을 공(公)으로 돌리는 것이다, 사유화하지 않는 것이다라고 해요. 정치나 경제나 모든 걸 다 포함해서 사유화함으로써 분열되고 찢긴 그것을 다시 공으로 돌리는 일은 하느님 나라 성취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그거예요. 자꾸 정신화해버려서 피안적이고 관념화된 하느님 나라는 민중의 입장에선 있을 필요도 없어요. '공은 공으로 돌려라'라는 말은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로 돌리라는 말인데, 이것은 결국 민중의 언어로 바꾸면 다 빼앗긴 사람들, 밭 한 뙈기 없이 거덜난 사람들에게 자기 것을 되돌려주는 것입니다. 생산의 주체인 노동자, 농민에게 그 생산한 몫을 정당하게 돌려주는 것이에요. 이렇게 잃어버린 제 것을 도로 찾는 운동만큼 하느님 나라를 의식할 수 있는 구체적인 건 없다고 생각해요. 어쨌든 하느님 나라의 실현이란 '공은 공으로', 곧 사유했던 것을 다시 참된 주인에게 돌려주는 것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것입니다.

▶ 그러니까 복음서의 기록에 앞서서 예수의 실천이 있었고, 예수의 실천 자체가 오히려 그러한 해석의 틀을 마련해줬다고 봐야겠군요. 지금까지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정리해보면, 하느님이 '살크스'가 됐다는 것은 하느님이 '물'이 됐다는 말이고, 그래서 하느님이 일하심은 물을 통해서 실현된다, 즉 나눔을 통해서 실현되고, 공(公)을 공으로 돌리는 일을 통해서 실현된다, 이런 말씀이시군요. 그렇다면 그 과정은 물의 독점을 깨뜨려나가는 운동으로 파악된다는 생각이 듭니다. 요한묵시록 21장 3~4절에 보면, "보라. 하느님의 장막 이 사람들 가운데 있다. 하느님이 그들과 함께 계실 것이요, 그들은 하느님의 백성이 될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겨주실 것이다. 그래서 다시는 죽음이 없고 슬픔도 울부짖음도 고통도 없을 것이다. 처음 것들이 다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라는 말이 나옵니다. 앞부분은 하느님의 직접통치, 즉 하느님이 함께하는 새 질서를 말하고 있고, 뒷부분은 그러한 새 질서의 구체적 상태를 지극히 물질적인 표현으로 그려주고 있습니다. 이 구절은 하느님이 물이 됐다는 말과 관련해서 볼 때, 퍽 많은 것을 시사해주는 것 같습니다. 물이 되신 하느님은 이 세상 가운데서 물의 독점으로 인해 당하는 고통을 골고루 체험하셨을 것이고, 그래서 하느님 나라에 대한 표상이 물질적 언어를 통해서 묘사되고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를 묘사하는 듯한 이 묵시록의 구절에 대해서 선생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이 경우에 굳이 '물'이라는 낱말을 쓰지 않아도 되겠지요. 물이라는 언어를 쓰면 고답적으로 되기 쉬우니까요. 요한묵시록의 그 구절에 나타난 내용에서 요한복음하고 일치되는 점이 있어요. 먼저 요한복음이 제자라고 할 때는 자기 공동체를 말합니다. 그런데 요한묵시록의 아까 그 구절에서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사람들'도 개체가 아니고 공동체예요. 그리고 거기에 표현된 새 질서, 새 세상, 즉 눈물도 슬픔도 고통도 죽음도 없는 그 나라는 지금 현실이 아닌 것, 지금 있는 현실과는 반대되는 것을 얘기하고 있는 것 아니겠어요? 지금은 당하고 있고, 지금은 억눌려 있고, 지금은 울고 있고, 지금은 빼앗기고 있고, 지금은 죽임을 당하고 있고…… 이런 현실이 거꾸로 투영되어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런 고통들은 지극히 육적이고 물질적인 것입니다. 말하자면 막연한 정신적인 고통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살을 에는, 가슴이 찢어지게 아픈, 죽임을 당하는 그런 현장입니다.

요한묵시록이 기록된 때가 도미띠아누스 때지요? A.D. 90년대에 도미띠아누스가 자신을 신격화하여 황제숭배를 강요하므로 박해가 극심해졌을 때였으니까, 그때 사람들은 틀림없이 구체적으로 육적인 고통을 당하는 현장에서 그 아픔, 그 눈물, 그 죽음으로부터 해방되는 하느님의 질서, 하느님 나라를 갈구했을 겁니다. 그냥 갈구한 것 만이 아니고 그 나라의 도래를 위해서 전투적 자세로 임했습니다. 그들은 세상권세를 쥔 악마의 주권과 하느님의 주권이 전투하는 현장으로 이 세상을 이해했어요. 그들이 이해한 하느님 나라는 어디까지나 물의 세계 곧 이 땅 위에서 실현되는 세계이지, 이 세계를 떠난 피안에서 이뤄지는 관념의 세계가 아니었어요. 모든 사람의 눈에서 눈물을 씻어준다고 했을 때, 그것은 요르단 강 건너가서 씻어준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사고를 애당초 거부하고 거기에 저항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도미띠아누스를 내몰지 않고서는, 그들의 손아귀에서 해방되지 않고서는, 우리의 눈에서 눈물이 마를 날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 불의한 세력을 하느님의 세력으로 대치하는 운동, 그것이 바로 하느님의 운동이라고 생각했을 거예요. 이건 틀림없습니다. 이런 정치적인 현장기록을 종교적인 것으로, 피안적인 것으로 환원시켜버려서는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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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권
표지
증보판에 부치는 말
머리말
       
제1부 고전(古典)으로서의 성서
       
제1장 고전의 의미
    1. 인류와 고전
    2. 현대인과 고전
제2장 성서의 특성
제3장 성서를 보는 눈
제4장 성서에서 보여주는 역사의 주체
제5장 성서의 자료와 편집
       
제2부 약속을 믿고 산 민족사 : 구약
       
제1장 한 책의 민족 이스라엘
제2장 인간사 서장
    1. 창조된 세계와 인간(아담)
    2. 잘못 출발된 역사
제3장 도상의 나그네
    1. 족장들
    2. 탈출의 족장 : 아브라함
    3. 하느님과 겨룬 사나이一야곱
제4장 엑소더스
    1. 히브리
    2. 모세
    3. 하느님과의 계약
    4. 십계명
제5장 종족공동체의 형성
    1. 가나안 정착
    2. 이스라엘 종족동맹
    3. 판관들
        1) 판관 삼손(판관 13~16장)
        2) 판관 기드온(판관 6~8장)
제6장 왕국시대
    1. 왕권과 국가
    2. 다윗왕조
    3. 왕국시대
        1) 솔로몬 왕
        2) 분단 200년
제7장 예언자
    1. 예언자의 현장
    2. 찬양과 저주一나단
    3. 왕권과의 대결자一엘리야
    4. 종교보다 정의를一아모스
    5. 남은 무리 一이사야
    6. 심판과 새 가능성 一예레미야
    7. 해골의 부활一에제키엘
    8. 너 위한 수난一이름없는 예언자
    9. 예언자의 말의 성격
    10. 과거, 현재, 미래
   
제3부 새로운 개벽 : 신약
   
제1장 예수의 사건
    1. 예수의 시대상
    2. 역사와 해석자
    3. 예수의 선포
        1 ) 하느님 나라의 초대
        2) 낡은 질서와의 대결
    4. 예수의 행태
        1) 무슨 권위로
        2) 예수와 민중
    5. 십자가 처형
    6. 갈릴래아에서 만나자一부활사건
제2장 예수운동의 전진(사도행전)
    1. 예루살렘에서의 예수의 민중운동
    2. 이스라엘 민중운동의 목표와 사상
    3. 민중사실
제3장 바울로의 삶과 증언
    1. 그의 삶
        1) 바울로의 위치
        2) 민중사건에 항복한 사울
        3) 바울로의 연대기
    2. 바울로의 증언
        1) 인간세계 심판
        2) 사람됨의 조건
        3) 죽음에서의 탈출
    3. 그리스도와 역사
    4. 자유인의 길
        1) 앞을 향해 달리는 삶(필립 13,1~14)
        2) 하느님 앞에 선 존재 (갈라 4, 1~10)
        3) 이웃과 더불어의 존재
    5. 바울로의 민중론
        1) 고린토교회의 사회계층
        2) 민중을 보는 바울로의 눈
        3) 택함을 받은 민중
    6. 바울로의 수난기
        1)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
        2) 예루살렘에서
        3) 문제점들
        4) 바울로는 ‘정치범’이 아닌가
        5) 예수의 수난사와 바울로의 수난기
제4장 요한의 증언
    1. 요한복음의 특이성
        1) 공관서와의 관계
        2) 요한의 정신적 풍토
        3) 예수의 새 해석
    2. 개벽의 선언
    3. 갈림길
제5장 박해와 희망(계시록의 신앙)
    1. 묵시문학의 성격
    2. 로마제국과의 대결
    3. 결단할 때
    4. 영원의 노크
    5. 마라나타
한국어로 된 성서 연구 참고문헌
전집간행에 부치는 말
판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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