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선생님의그 말씀을 들으니까 생각나는데, 하느님 나라의 도래라고 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성육신사상의 또 다른 표현이 아니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이 육이 됐다, 육이 된 그 하느님이 하느님 나라를 간절히 대망하는 사람들 가운데서 그 하느님 나라 실현을 위해 현존한다, 그러므로 육이 된 하느님은 하느님 나라 운동이라는 형태로 끊임없이 고백된다, 이런 생각이…….
그렇게 해석할 수 있고말고요. 바로 그 고백이 주의 기도에서 "하느님 나라가 임하옵소서!"라고 한 바로 그 절규가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나는 주의 기도를 하느님 나라 운동의 노래다, 행진가다 그랬던 거지요.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 십시오." 이것이 마태오학파의 주석이었다면, '육이 되신 하느님! 당신은 우리들의 하느님 나라 운동 안에 오늘 인카네이션하십니다', 이것은 우리들의 해석일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자꾸 어떤 정신적 존재로만 생각하는 데 길들여져서 그렇지, 하느님은 역사현장에서 오늘도 일어나고 있는 민중사건 속에 계속 화육(化肉)하시고 물적(物的)인 형태로 계속 재현되는 것입니다. 아까도 말했지만 '물'이라는 언어를 쓰면 도리어 리얼(real)하지 못하고 고답적으로 되는 흠이 있지만 하느님, 예수 그리스도, 하느님 나라를 관념화하는 데 저항하고 그것을 복음서의 원래의 생각으로 환원시키기 위해서는 불가피하게 그 언어를 쓰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안타까운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교의 현실이지요.
▶ '물'이라는 것은 독일어로 'Materie'인데 이 단어가 자꾸 관념적으로 들리는 것은 거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서 사회적 제관계라든지, 사회구조 또는 경제제도라든지, 민중의 생활상의 이런저런 요구라든지, 이렇게 현실문제로 오지 못하고 저 멀리 철학적인 카테고리에 머무르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우리는 오늘 하느님의 인카네이션을 눈물도 아픔도 죽음도 없는 새 나라의 실현이라는 언어로 재해석했는데, 그새 나라의 실현은 우리 사회의 정확한 분석과 그러한 분석결과에 입각한 전략의 수립과 결코 분리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제가 여기 한 구절을 읽어보겠습니다. 픽슬레이의 『하느님 나라』에 나오는 글입니다.
"예수와 젤롯당은 A.D. 1세기 팔레스틴을 각기 다르게 이해했기 때문에 서로 다른 해방전략을 수립했었다. 예수의 전략이 젤롯당의 것보다 성공가능성이 더욱 높았는지는 알 수 없다. 중요한 것은 그 점이 아니다. 어느 것도 우리의 예속자본주의에 적용될 수 없다. 우리에게 적절한 해방전략을 수립하기 위해 우리는 우리의 상황을 분석해야만한다. 그렇게할 때 우리는 성서 속에 나타난 해방전승으로부터 귀중한 도움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성서가 우리의 상황을 분석해주거나 우리의 전략을 수립해주지는 않았다. 그 일은 각기 특수한 상황에 놓여 있는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맡아야 할 과제이다."
나도 평소에 그렇게 강조하지요. 예수는 프로그래머(programer)는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본받는다'('이미타티오 크리스티')고 해서 예수에게서 어떤 행동의 모델을 구한다는 건 잘못입니다. 현장이 다른데 그건 말도 안 되는 얘기지요. 우리의 삶은 우리의 삶인데, 하물며 운동의 전략까지를 성서에 요구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