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선생님, 최근에 청년운동 쪽에서 들려오는 얘기로는, 그리스도교적 신앙은 우리의 역사현실 가운데서 벌어지는 민중의 싸움 속에 성육신해야 한다고 하더군요. 그런 말을 들으면서 저희들은 '하느님 나라에 대한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의 역사적 현단계에서 진행되고 있는 민중해방운동에 구체적으로 투신하는 형태로 표현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신앙의 인카네이션이 아니겠나!' 하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렇지요. 하느님 나라가 현재적인 것이냐, 미래적인 것이냐를 둘러싼 논의도 하느님 나라 건설을 위한 구체적인 운동에 투신하고 있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한가한 구경꾼들의 신학적 사변으로밖에는 느껴지지 않는다고 앞에서 말했습니다. 실제로 몸을 던져 싸우코. 있는 사람들에게는 '왔다'와 '올 것이다' 사이에 구별이 있을 수 없어요. 그 나라에 대한 신앙과 눈앞에 전개되는 운동은 결코 분리될 수 없는 일체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운동을 신앙의 인카네이션으로 파악하는 것은 옳다고 봐요. 하느님 나라의 현실은 동적(動的)인 것이지 결코 정적(靜的)인 것이 아닙니다. 동적으로 파악하면 현재냐, 미래냐 하는 물음이 성립될 여지가 없어요. 예수운동과 하느님 나라의 도래는 서로 유리되지 않았어요. 하느님 나라는 교회라든지 어떤 사회체제라든지, 어쨌든 기존의 어떤 것과도 동일시될 수는 없지만, 현재 진행되고 있는 싸움 속에서 지금 그 나라를 경험하는 것이고 또 그 싸움 속에서 하느님 나라가 실현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민중들은 느끼고 있습니다. 민중의 실천 가운데서 하느님 나라는 생생한 오늘의 현실이 되지요.
그런데 여기 명심해야 할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은 동적인 것만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어떤 상(像), 즉 스테이터스(status)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안목에서 구체적인 상을 보여주는 것이 필요해요.
나는 위에서 중요한 것을 말하지 않고 계속 보류해왔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의 하느님 나라 선포에 대한 루가의 해석입니다. 마르코는 예수의 설교의 요약을 하느님 나라의 도래라고 했습니다(마르 1, 15). 그런데 루가는 그 대신 예수의 공생애의 일성으로 이사야서 61장 1~2절을 내세우고 있습니다. 그것은 루가 4장에 나오는데, 그 마지막 구절이 "하느님의(은혜의) 해를 선포하러 왔다"고 되어 있으며 그것은 바로 희년입니다. 루가는 하느님 나라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실현되느냐라는 물음을 제기하고 대답해야 할 단계에 왔던 것입니다. 거기서 그는 희년제도를 하느님 나라의 실현과정으로 본 것입니다.
그 성격을 한마디로 말하면 '해방'입니다. 그 가운데 "포로된 자를 해방하고 눌린 자를 놓아주고"라는 말이 있는데 '해방한다', '놓아준다'로 번역된 낱말은 다 aphesis로서 '종을 놓아준다', '빚을 면제해준다'는 뜻으로 쓰입니다. 이것은 바로 희년의 내용입니다. 7년마다의 안식년제도가(토지를 쉬게 하는 것 외에는) 제대로 안 지켜지니까 결국 7X7=49년째 되는 해를 설정하고, 이때를 사회대개혁의 해로 삼았습니다. 독점된 토지를 돌려주고, 빚을 면해주고, 가난 때문에 스스로 노예가 된 자들을 풀어주는 등 독점화한 것을 놓아 주도록 했습니다. 루가는 '때가 찼다'를 희년이 왔다는 것으로 해석하고 하느님 나라 도래를 바로 빚에서의 해방, 예속에서의 해방으로 파악한 것 같습니다. 이 희년의 선포야말로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는 기쁜 소식(복음)이 될 것이며, 독점ᆞ사유화하고 그 안에서 삶의 보장을 찾는 부유한 자에게는 슬픔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루가복음 4장 내용이나 예수가 세례자 요한의 물음에 대답하여 지금 그를 통해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설명하는 내용(마태 11, 4~5)이 거의 동일한데 이것은 말씀자료(Q자료)입니다. 그러니 이것은 루가의 창안이라고도 할 수 없어요. 그러기에 희년제도에서 해방이라는 것은 원래 예수의 하느님 나라 도래의 내용에서 중요한 것 중 하나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교의 하느님 나라는 자꾸 피안화되고 정신화됐어요. 위기의식(종말의식)이 약화되면 그렇게 됩니다. 그러므로 하느님 나라는 삶 저편으로 밀려났지요. 그러므로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실효를 거둘 수 없게 됐습니다. 여기서 묵시문학에서 볼 수 있는 '천년왕국'이라는 또 하나의 구체상이 등장했습니다. 정신화되어 가는 하느님 나라 대신에, 무감각해진 하느님 나라라는 언어 대신에 메시아가 이 역사 한복판에서 모든 악의 세력을 전멸하고 메시아 왕국을 수립한다는 신념입니다. 이것은 투쟁의 의지이며 하느님 나라는 현실적으로 역사 안에서 활화산으로 임재해야 한다는 신념이지요.
여기서 배울 것은 '하느님 나라'를 향한 노정에서 구체적 상이 제시돼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민중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상을 궁극적인 것으로 정착시켜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천년왕국은 궁극적으로 종국을 남겨둔 것입니다.
예수의 하느님 나라 선포는 일단계적으로 희년으로 구상화할 수 있다고 봅니다. 예수의 행태가 그것을 반영합니다. 그러나 예수는 그것에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그의 하느님 나라는 희년마저 넘어서는 궁극적인 현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