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나는 서양의 성서학이 거의 결정적이라고 생각해 온 이른바 양식사적 방법과 편집사적 방법에 대하여 대담하게 도전해보려 합니다. 이러한 문제제기는 민중신학자들이 거듭거듭 말하고 있는 바와 같이, 책상 위에서 공부한 결과로부터 출발한 것이 아니라 우리들이 처한 정치적 현장으로부터 출발해서 성서에 묻고 성서로부터 답을 얻는, 그러한 과정에서 생겨난 것입니다.
오늘 강연은 성서학의 입장에서 전승의 모태(母胎)에 관해 얘기하고자 합니다. 이것에 관한 책으로는 불트만의 『공관복음 전승사』가 있는데, 이 책은 전형적인 양식사적 방법으로 성서 전체를 분석한 유명한 책입니다. 이 책을 염두에 두면서 저의 이야기를 들으면 좋을 것입니다.
먼저 나의 그런 발상이 어디에서 출발했는가하는 것을 얘기하지요. 민중신학이 시작될 수밖에 없었던 진원적 시기는 1970년이라는 시점부터입니다. 구체적으로는 1970년 11월 13일이었습니다. 전태일이라고 하는 22세의 그리스도인 청년은 정규교육 과정을 거의 거치지 않고 겨우 국민학교를 나왔을 뿐이었습니다. 그는 서울의 유명한 평화시장의 기계공원이었습니다. 평화시장의 노동자들은 15세부터 20세 전후의 여자공원들이 대부분이었는데, 하루에 보통 15시간이라는 장시간 노동을 했고 무엇보다도 지독한 것은 그 노동조건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비참한 상태였다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전태일은 그러한 형편을 다른 사람들에게 호소하려고 갖가지 방법을 써봅니다. 노동청에 직접 편지를 내기도 하고, 대통령에게 탄원서를 내기도 합니다. 서울특별시장을 방문하기도 하고, 그것이 여의치 않을 때에는 교회의 유명한 목사들을 찾아가 어떻게든 이러한 상황을 세상에 알려달라고 호소하기도 합니다만 아무 보람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전태일은 노동자들의 현실을 호소하기 위해 자신의 몸을 던졌습니다.
바울로가 말한 대로 자기 자신을 산 제물로 하느님 앞에 바칠 생각으로 자신의 몸에 휘발유를 끼얹고 불을 당겨 죽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1970년 11월 13일이었습니다.
민중신학은 어떤 의미에서 이 전태일의 사건에 자국되어 생겨난 것입니다. 전태일 한 사람의 희생은 돌연 평화시장의 실상과 노동자들의 고통에 찬 현실을 몸으로, 죽음으로써 세상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것을 시발점으로 하여 여러 곳에서 학생과 노동자들이 비로소 기나긴 동면상태에서 깨어나 외치기 시작했습니다. 정부는 이를 두려워하여 전태일에 대하여 말하는 것도, 쓰는 것도 금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노동문제나 인권문제에 관해서도 아무것도 쓸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때까지 깊은 잠에 빠져 있었던 교회가 그 사건이 계기가 되어 눈을 뜨게 되고, 목사들이 눈을 뜨고, NCC가 눈을 떠서 서울을 중심으로 수도권 산업선교회가 생겨났던 것입니다. 이것이 중심이 되어 1973년에 비로소 인권위원회를 발족시키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소위 1970년대의 인권투쟁이라고 하는 일련의 사건이 박 정권이 쓰러질 때까지 목사, 학생, 노동자 들에 의해 계속해서 일어났던 것입니다.
전태일은 죽었습니다. 그러나 그후 노동문제, 인권문제에 대해서는 거의 말할 수도 쓸 수도 없는 상태였지만 전태일사건은 '유언비어'의 형태로 계속 이야기되고 전해졌던 것입니다. 신문에도 내지 못하게 하고, 더구나 당시에는 등사판을 소지하는 것도 전부 경찰에 보고하지 않으면 안 되었으며, 등사판 인쇄조차도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유일한 길은 입에서 입으로 전하는 수밖에는 없었던 것입니다.
지금까지도 우리들은 정당한 전달수단을 갖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현실을 있는 그대로 전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닌 것입니다. 시인 김지하는 「비어」(輩語)라고 하는 시를 썼습니다. 그 시로 인해 그는 사형판결까지 받게 되었습니다. 한국에서는 법률적으로도 유언비어는 처벌받게 되어 있습니다. 지금도 학생들은 그들이 진실을 말하고 쓰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유언비어 죄라고 하는 법에 걸려 감옥에 들어가게 되어 있습니다. 유언비어는 진실을 전달하는 도구로서 우리들이 살아가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아주 귀중한 것이 되었습니다. 유언비어가 얼마만큼 커다란 힘을 가지고 있는가 하면, 정부에서는 유언비어 그 자체를 제1의 적처럼 생각하고 있고, 우리들은 그것을 산소와 같은 존재, 그것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는 그런 것으로 여기고 있을 정도입니다.
독재정권하에서 살아가는 민중에게 유언비어라고 하는 것은 그저 만들어낸 이야기도 아니고 습관도 아닙니다. 그것은 생명을 나누어 가지기 위한 수단인 것입니다. 그것은 민중이 독자적으로 창안해낸 방법입니다. 이것은 개미가 음식물이 있는 장소를 알릴 때에 자기 동료들에게 입에서 입으로 전달하는 그런 방식과도 같습니다. 그것은 성서가 생겨난 당시뿐만 아니라 바로 지금도 진실을 전달하기 위한 가장 유효한 수단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최근 20년 가까이 되는 동안에 우리들은 정치적인 현장에서 유언비어의 힘을 경험하는 한편, 그것에 대하여 제도화된 공적(公的) 전승의 방식이 어떠한가를 보아왔습니다. 정부뿐만이 아니라 소위 교회(기존체제 내부에 공적으로 존재하는 제도적 교회)가 말을 하는 방식마저도 민중의 방식과는 전혀 다릅니다. 민중은 유언비어의 형태로 진실 그 자체를 전할 수가 있는데, 그때 전해지는 내용은 논리적인 것도 아니고 아름다운 언어로 장식된 것도 아닙니다. 있는 그대로의 솔직한 내용일 따름입니다. 반드시 거기에 정해진 양식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진실하고 생생한 내용을 전하고 있는 것뿐입니다. 이에 대하여, 제도화된 교회가 모여서 어떤 문제를 놓고 공식적인 성명을 발표한다든가 자신의 입장을 공적으로 표명하는 경우에는, 그 사건 자체가 거의 예외 없이 추상화되어버리고 맙니다. 사건을 있는 그대로 전하지 않고 추상화하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비(非)역사화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죄를 말하는 경우에, 그것이 구체적으로 무슨 죄인가를 말하지 않습니다. 회개하라고 권할 때에도 단지 회개하라고만할 뿐이지 무엇무엇을 어떻게 하라고는 말하지 않습니다. 심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정치에 대해서 발언할 때에도 교회는 정면충돌을 피해서 언제나 추상적인 내용의 성명을 발표합니다. 이렇게 하여 비역사화와 추상화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 세상에서 자신을 보지(保持)하는 것을 대전제로 하는 한 어쩔 수 없는 방식이라는 것을 나는 사무치게 절감하였습니다. 이름없는 사람들의 표현방식과 세상에 이름이 알려진 목사나 교수 등의 표현방식은 전혀 다릅니다. 그래서 나는 민중의 표현방식을 염두에 두면서 성서를 한번 새롭게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나는 신약성서의 전문가라고는 하지만 두 번이나 대학에서 쫓겨나서 10년간 상아탑이 아닌 시정(市井)의 현장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이미 진정한 의미의 학자는 아닙니다. 거리의 성서학자라고나 할까요? 모든 것을 엄격히, 정밀하게 공부할 힘도 없을 뿐만 아니라 그럴 시간도 내겐 없습니다. 그러나 내 나름으로, 배가 고프면 먹지 않으면 안 되고 목이 마르면 마시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입장에서 성서를 읽고 있습니다.
일본의 신학자, 그리스도인들은 한국의 신학자나 그리스도인들에 비해서 책을 훨씬 많이 읽는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판입니다. 신학적 지식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수는 적어도 질적으로는 우수하다고 하는 자부심이 있을 법합니다. 따라서 여러분은 어느 정도 신학적 이해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