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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예수와 케리그마의 그리스도

이제까지 성서신학은 소위 '케리그마의 신학'이라는 것에 머물러 왔습니다. 저 역시 불트만의 영향을 가장 강하게 받았던 관계로, 오랫동안 그의 영향력에 붙들려서 지주적이고 독창적인 사고를 하지 못하고 지낸 기간이 있었습니다. 케리그마의 배후를 묻는 것은 불신앙이라고 말한 것이 바로 불트만이었습니다. 케리그마의 배후에 있는 역사적 사실을 묻는 것은 그 질문 자체가 성립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불신앙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역사적 예수를 묻는 것을 전적으로 거절하고 말았습니다. 그가 케리그마적 예수에 대하여 책을 쓴 것이 1920년대였습니다. 그후 약 30년간 학문적으로 역사적 예수를 묻거나 그것에 대해 쓰는 일을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럴 정도로 불트만의 영향력은 절대적이었습니다.

그러다가 1954년이 되어서야 처음으로 불트만의 제자 중 한 사람인 케제만이 불트만학회에서 '역사적 예수의 문제'라고 하는 강연을 하였고, 1956년에는 보른캄이 쓴 『나자렛 연구』라는 책이 나왔습니다. 이는 30년 만의 일이었습니다. 그들은 이른바 후기 불트만학파(post -Bulttmannian)라고 불립니다만, 불트만의 범주를 결코 넘어서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내용을 부분적으로 수정한 정도였지, 케리그마의 신학에 정면으로 도전한 것은 아니었다고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케리그마'라고 하는 것에 대하여 그것을 추상적으로 말하지 않고 몇 가지 예를 들어가면서 직접 성서를 읽고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여러분도 잘 알고 계신 성서구절입니다만, 먼저 고린토전서에 나오는 저 유명한 '부활의 케리그마' 곧 크레도(credo, 信條)의 부분입니다.

나는 내가 전해받은 가장 중요한 것을 여러분에게 전해주었습니다. 그것은 곧 그리스도께서 성서에 기록된 대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셨다는 것과 무덤에 묻히신 것과 성서에 기록된 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신 일입니다. 이리하여 게파에게 나타나 보이시고 다음에 열두 제자에게 나타나셨으며 다음에 오백 명이 넘는 형제들에게 동시에 나타나셨는데 그중에 더러는 세상을 떠났으나 대다수는 지금도 살아 있습니다. 그 다음에는 야고보에게 나타나셨고 그후에 모든 사도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고전 15, 3~7).

아시는 바와 같이, 이것은 바울로 자신의 말이 아니고 이미 전승되어 온 것을 받아서 쓴 것입니다. 고린토전서가 A.D. 60년대에 씌어졌다고 가정한다면, A.D. 40년 혹은 50년에는 이미 이런 형태로 케리그마적 내용이 굳어져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바로 여기에 하나의 문제가 있습니다. 즉, 성서의 본문에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얘기하면서 두 번이나 "성서에 기록된 대로"라는 말을 쓰고 있다는 점입니다. 성서에 기록된 대로 우리의 죄 때문에 죽고, 성서에 기록된 대로 다시 살아났다고만 했을 뿐, 이것이 성서의 어디에 기록되어 있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알 길이 없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성서에 기록된 대로"라고 하는 말로써 역사적 사건을 가려버린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누가, 언제, 어디서, 왜 예수를 죽였는가가 전혀 표현되어 있지 않습니다. 은폐되어 있습니다. 추상화되고 비역사화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공적인 발표의 성격입니다.

또 한 곳을 읽어볼까요. 이것도 역시 가장 오래 된 문서의 하나라고 일컬어지는 것인데, 필립비서에 나오는 저 유명한 '그리스도 찬가'의 한 부분입니다.

그는 본래 하느님의 본체이셨으나 하느님과 동등됨을 취하려 하시지 않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모습을 취하셨으며 사람의 형상을 입으셨습니다. 그는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 자기를 낮추어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는 그를 높이 올리셔서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시어 하늘에 있는 자나 땅위에 있는 자나 땅 아래 있는 모든 사람을 예수의 이름에 무릎을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다' 하고 고백하게 하여 하느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였습니다(필립 2, 3~11).

여기서 말하고 있는 내용도 역시 전승된 것입니다. 소위 전형적인 '그리스도 케리그마'의 원형(原型)입니다. 이것은 매우 리드미컬하고 시적인 노래로 되어 있는데 세 개의 부분으로 나누어집니다. 맨 처음 부분이 유명한 선재설(先在說)입니다. 역사가 시작되기 이전부터 그리스도가 존재하고 있었다고 하는 그리스도 선재설을 전제한 이야기입니다. 가운데 부분은 인카네이션한 예수에 대한 것입니다. 그리고 맨 마지막에 재차 살아나서 하늘로 올라가신 그리스도를 말하고 있습니다.

이중에서 우리의 관심을 가장 강하게 끄는 것은 두 번째의 부분입니다. 이것은 고린토전서의 본문과 비교하면 좀더 앞으로 나간 듯합니다. 무엇보다도 '십자가'라는 말이 나오고 있으니까요.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에서도 역시 십자가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한 것이 구체적으로 '누구인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고 있습니다. 게다가 십자가에 죽었다고 하는 이 부분은 후에 첨부되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입니다. 만약에 이 견해를 받아들인다고 할 것 같으면, 십자가에 달렸다고 하는 이 말도 원래는 없었던 것이 됩니다. 이 말이 후에 첨가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우에도 거기에 이미 선재설이 있고 또 하늘에 올려져 세계를 지배하는 그리스도라고 하는 두 개의 중요한 내용이 전제되어 있기 때문에 화­육한, 십자가에 죽임당한 예수의 사건은 그 두 개의 중요한 내용에 다리를 놓아주는 교량 역할밖에는 아무것도 아니게 됩니다. 대단히 약화된 것이지요.

누가, 언제, 왜, 어떻게 예수를 죽였는가하는 것은 전혀 언급되어 있지 않아요. 이것이 바로 '케리그마'의 성격입니다. 신에게 복종했다는 말도 그것만으로는 종교적 표현으로 받아들이면 그만입니다. 그러나 역사의 현장에 살고 있는 우리들은 그 말의 사회적 배경을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 대답은 본문의 그러한 대목들로부터는 거의 얻어낼 수가 없습니다. 있다고 하면 단지 추상화와 비역사화의 과정일 뿐입니다. 그것도 이미 40년에 이르기까지의 시대에 그렇게도 현저히 추상화되고 비역사화되었던 것입니다.

고린토전서 15장 5절의 서술은 부활한 예수가 그 앞에 나타난 최초의 인물은 게파, 즉 베드로라고 전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물론 역사적 사실이 아닙니다. 그 시대의 교회의 대표자 베드로였지, 역사적 인물 베드로는 아닙니다. 이어서 등장하는 12사도의 경우에도 그것은 상징이었지 구체적 인물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 부분이 이미 제도화된 교회의 고백이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겠지요. 또 필립비서 2장의 '그리스도 찬가'의 경우에도 그것이 형성된 현장이 어디였는가를 둘러싸고 논의가 분분합니다. 로마이어(Lohmeyer) 같은 학자는 새크러먼트에 참가할 때 그러한 고백을 했다고 주장합니다. 또 어떤 학자는 예배 때에 고백한 것이라고 합니다. 어느 쪽이 됐든 양자에 공통적인 것은, 이것을 고백하는 현장은 로마가 지배하는 현장도 아니고 유다의 박해자가 있는 바로 그 자리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배를 드리는, 소위 종교적 분위기 가운데서 고백된 것이라는 점입니다.

사도행전에는 가장 오래 된 설교의 원형이 남아 있습니다. 도드는 「사도적 전승과 그 전개」(The apostolic preaching and its development)라는 논문 가운데서 설교의 원형이 어떠한 것이었는가를 잘 분석하고 있습니다. 그 내용을 보고 놀랐던 것은, 공중 앞에서 설교를 하는 경우에는 예수에 대한 사실을 추상화하고 비역사화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바울로의 편지들을 비롯하여 소위 서간문서를 볼 때 우리가 가장 놀라는 것은 역사적 예수에 대해서는 거의 한마디도 언급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케리그마의 그리스도가 중요하지 역사의 예수는 중요하지 않다고 하는 간단한 결론으로 끝나버리는 것이 보편적인 현상입니다. 우리들에게는 그것이 납득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알고 싶은 것입니다. 왜 예수가 죽지 않으면 안 되었는가? 누가, 무엇 때문에 그를 죽이지 않으면 안 되었는가? 그것이 알고 싶은 것입니다. 악마적인 권력에 의해 지금 무수한 인권이 유린되고 있는 현장에 살고 있기 때문에, 바로 그렇기 때문에 예수에 대해서도 인권의 문제로서 그 사실을 알고 싶은 것입니다. 추상화된 채로 만족할 수 없어요. 어쨌든 진실을 알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어요.

그리스도를 위해서라면 죽어도 좋다고 했던 바울로가 왜 역사의 예수에 대해서는 거의 함구했던가? 하나의 예외로서는 갈라디아서 4장 4절에, 예수는 율법 아래 여자의 몸에서 태어났다고 하는 이 한마디를 전하고 있습니다만, 이것만으로는 얘기가 되지 않습니다. 나는 십자가밖에는 아무것도 알지 않겠다고 외쳤던 바울로가 어찌하여 십자가에 대한 사실을 우리들에게 감추는 것인가? 만일 우리들에게 바울로서신밖에 전해지지 않았다고 한다면, 십자가는 가현설(Docetism)의 심벌 이상의 의미는 없지 않았겠는가 생각하게 됩니다. 또한 바울로는 고린토후서 5장 16절에 "나는 금후로는 육에 따라 주를 알려고 하지 않겠다"라고까지 선언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역사에 대해서는 알고자하지 않겠다는 말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역사의 예수는 의미가 없다고 하는, 그런 정도의 것은 아니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그러면 그렇게 선언하지 않을 수 없었던 특별한 사정이 있었던 것이 아닐까? 바로 그런 증거가 그 말에 나타나 있는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하게 됩니다. '왜 당신은 추상적인 그리스도만을 말합니까?' '왜 예수가 죽임을 당했다는 것을 분명히 말하지 않습니까?' 이러한 공격이 바울로의 그 말에 앞서 전제되어 있었던 게 분명합니다. 이에 대하여, "나는 의식적으로 말하지 않는다", "살크스(肉)에는 흥미가 없다. 프뉴마(靈)적인 그리스도에만 흥미가 있을 뿐이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 주의 말씀으로 인용하는 대목도 역사적 예수의 말은 아닙니다. 케리그마의 말입니다.

율법이라는 중요한 문제에 대해서도, 적절한 시사가 역사적 예수에는 있습니다. 그런데도 바울로는 계속 예수에게는 의지하지 않습니다. 왜 이토록 바울로는 역사의 예수에 대해서 침묵하지 않으면 안 되는 입장에 있는 것일까? 이상한 것은 바로 이러한 바울로의 태도가 그후에 형성된 위(僞)바울로서신에도 그대로 나타나 있다는 것입니다. 이리하여 우리들은 역사적 예수에 대해서는 알 수 있는 자료가 없다고 하는 묘한 입장에 떨어지게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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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권
표지
증보판에 부치는 말
머리말
       
제1부 고전(古典)으로서의 성서
       
제1장 고전의 의미
    1. 인류와 고전
    2. 현대인과 고전
제2장 성서의 특성
제3장 성서를 보는 눈
제4장 성서에서 보여주는 역사의 주체
제5장 성서의 자료와 편집
       
제2부 약속을 믿고 산 민족사 : 구약
       
제1장 한 책의 민족 이스라엘
제2장 인간사 서장
    1. 창조된 세계와 인간(아담)
    2. 잘못 출발된 역사
제3장 도상의 나그네
    1. 족장들
    2. 탈출의 족장 : 아브라함
    3. 하느님과 겨룬 사나이一야곱
제4장 엑소더스
    1. 히브리
    2. 모세
    3. 하느님과의 계약
    4. 십계명
제5장 종족공동체의 형성
    1. 가나안 정착
    2. 이스라엘 종족동맹
    3. 판관들
        1) 판관 삼손(판관 13~16장)
        2) 판관 기드온(판관 6~8장)
제6장 왕국시대
    1. 왕권과 국가
    2. 다윗왕조
    3. 왕국시대
        1) 솔로몬 왕
        2) 분단 200년
제7장 예언자
    1. 예언자의 현장
    2. 찬양과 저주一나단
    3. 왕권과의 대결자一엘리야
    4. 종교보다 정의를一아모스
    5. 남은 무리 一이사야
    6. 심판과 새 가능성 一예레미야
    7. 해골의 부활一에제키엘
    8. 너 위한 수난一이름없는 예언자
    9. 예언자의 말의 성격
    10. 과거, 현재, 미래
   
제3부 새로운 개벽 : 신약
   
제1장 예수의 사건
    1. 예수의 시대상
    2. 역사와 해석자
    3. 예수의 선포
        1 ) 하느님 나라의 초대
        2) 낡은 질서와의 대결
    4. 예수의 행태
        1) 무슨 권위로
        2) 예수와 민중
    5. 십자가 처형
    6. 갈릴래아에서 만나자一부활사건
제2장 예수운동의 전진(사도행전)
    1. 예루살렘에서의 예수의 민중운동
    2. 이스라엘 민중운동의 목표와 사상
    3. 민중사실
제3장 바울로의 삶과 증언
    1. 그의 삶
        1) 바울로의 위치
        2) 민중사건에 항복한 사울
        3) 바울로의 연대기
    2. 바울로의 증언
        1) 인간세계 심판
        2) 사람됨의 조건
        3) 죽음에서의 탈출
    3. 그리스도와 역사
    4. 자유인의 길
        1) 앞을 향해 달리는 삶(필립 13,1~14)
        2) 하느님 앞에 선 존재 (갈라 4, 1~10)
        3) 이웃과 더불어의 존재
    5. 바울로의 민중론
        1) 고린토교회의 사회계층
        2) 민중을 보는 바울로의 눈
        3) 택함을 받은 민중
    6. 바울로의 수난기
        1)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
        2) 예루살렘에서
        3) 문제점들
        4) 바울로는 ‘정치범’이 아닌가
        5) 예수의 수난사와 바울로의 수난기
제4장 요한의 증언
    1. 요한복음의 특이성
        1) 공관서와의 관계
        2) 요한의 정신적 풍토
        3) 예수의 새 해석
    2. 개벽의 선언
    3. 갈림길
제5장 박해와 희망(계시록의 신앙)
    1. 묵시문학의 성격
    2. 로마제국과의 대결
    3. 결단할 때
    4. 영원의 노크
    5. 마라나타
한국어로 된 성서 연구 참고문헌
전집간행에 부치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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